47화. < 그런 건 상관 없다고 (1) >
- 박사 : 아 이런 거 보내지 마시라고요 ㅡ,ㅡ
스마트폰에 떠오른 건 이지수의 답장이었다. 병정 가면을 쓰고 있는 남자가 그걸 보고 큭큭 웃었다. 지수는 얼마나 한가하길래 게임 초대 문자같은 걸 보내고 있냐고 혀를 찼지만, 실상은 반대였다. 김도형은 지금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무수히 산개한 꼬마 병정들로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박사는 딱 봐도 잔걱정이 많아 보이는 성격이니,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계속 이쪽을 신경쓸 것이다.
적의 모습은 금방 나타났다. 흑사병 의사와도 같은 가면을 쓰고 있는 건 집행부의 사천왕 중 하나, 까마귀였다. 그의 모습을 확인하자 마자 여기저기 숨어서 까마귀를 엿보던 병정 인형들이 하나하나 파괴당했다. 하지만 그런 건 상정 범위 내였다. 김도형은 당황하지 않고 동료에게 연락했다.
“까마귀 사냥 시작합니다. 그쪽으로 유도하죠.”
<부탁하지.>
노이즈가 잔득 낀 채, 늑대의 대답이 들려왔다. 품질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집행부의 주파수를 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일단 스크램블은 쳐놓았으니 저쪽도 간단히 방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김도형이 달려나갔다.
직접적인 전투는 몰라도 간을 보다 도망치는 건 집행부의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었다. 달려나가는 김도형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평소라면 다른 사천왕과의 싸움은 되도록이면 회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늑대는 전에 없는 절호조였다.
‘저렇게 생기 넘치는 모습은 여태껏 본 적이 없어.’
박사 덕분에 늑대에게 불이 붙었다. 솔직히 말해 지금의 정유현과 함께라면 사천왕 전부를 동시에 상대해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모든 일이 다 끝나면 선물을 사들고, 함께 그 아이 공연이라도 한 번 보러 가는 것이다.
달려나가던 병정은 마침내 까마귀가 육안으로 보이는 거리까지 도착했다. 각 구획에 견제사격을 위한 꼬마 병정들을 배치하고, 손에는 온갖 다트를 쥐고 있는 채였다. 한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병정이 친근하게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에 보네, 선배.”
“친한 척 지껄이지 마라. 변절자가.”
“변절자가 누구 쪽인데 그래?”
김도형이 까마귀 가면의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까마귀 또한 마력을 끌어올렸다. 더 이상 대화는 불필요했다. 집행부로서 할 일을 다시금 확인한 뒤. 가면을 다시 쓰고, 제복을 치켜세우고. 두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같은 말이었다.
““집행을 시작하지.””
***
확장공사를 끝낸 라이브 하우스는 시끌벅적했다. 유리창 벽면에는 공연하는 다른 밴드들의 포스터와 함께, 서민하가 찍혀있는 사진 또한 붙어있었다. 오, 하고 감탄한 오성화는 서민하의 포스터를 가리키며 지수를 바라보았다.
“이거 아까 그 애 아니야?”
“네. 걔 맞아요. 오늘도 공연한다고 해서.”
“멋진데. 사실 나도 예전에 메탈 좋아했거든. 요즘은 취향이 좀 바뀌긴 했지만. 지수 지인이구나. 이거 기대되네.”
지수는 오성화와 함께 지하로 내려갔다. 1층과 같이, 지하의 무대 또한 더 많은 손님들을 수용할 수 있게 확장이 되어있었다. 그럼에도 자리는 한적하지 않고 와글와글 가득차있었다. 확장공사를 하며 전단을 뿌린 것도 있고, 입소문에 입소문을 타면서 아는 사람들끼린 다 아는 가게가 되어있었다.
같이 온 동행이 있기도 하고. 이번에는 맨 뒷편 벽에 등을 기대 서서 보는 게 아니라, 무대가 잘 보이는 앞쪽 좌석에 가서 앉기로 했다. 앉아서 무대를 구경하는 건 처음이었다. 밴드들의 순서가 끝나고, 또다시 서민하의 차례가 찾아왔다.
그녀가 무대에 나타나자마자 사람들 사이에서 우와아아아아-!! 하고 열광적인 호응이 터져나왔다. 옆에 앉아있던 오성화마저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진짜 뱀파이어 특성으로 집단 매료라도 걸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될 수준이었다.
서민하는 이미 라이브 하우스에서 확고한 팬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오버그라운드로 넘어가자는 계약 제의도 몇 개인가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기야 연주와 음색은 처음부터 일류였다. 듣는 사람을 암울하게 만드는 분위기 때문에 대중에게 어필하지 못했을 뿐, 지금은 그 문제도 해결되었다.
서민하의 노래를 듣고 있던 오성화가 지수에게 말했다.
“지수 너…잘도 얼굴 하나 안 붉히네. 고단수야.”
“네?”
"응?"
앉아있는 지수가 무슨 소리냐는 듯 오성화를 바라보자, 오성화가 또한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저걸 눈치채고 있지도 못했냐는 표정이었다. 설명해달라는 지수의 시선에 오성화가 무대를 턱짓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저 애, 노래하면서 계속 너만 쳐다보고 있잖아."
***
1층으로 올라가자 가게 내부는 예전과 달리 훨씬 넓어져, 단순한 라운지 수준이 아니라 십수 개가 넘는 테이블이 놓여있었다. 아르바이트생 또한 더 많이 고용한 것 같았다. 이쪽 업무에 지하의 드링크바와 무대까지 관리하려면 상당히 힘이 들겠다 싶었다. 자리를 안내 해준 건 여주인이었다.
“가게도 엄청 넓어졌네요.”
“응, 상상 이상으로 손이 바쁘네. 익숙해져야지.”
그 말대로 테이블엔 수많은 사람들이 앉아 이리저리 안주와 술이 내가지고 있었다. 처음 방문했을 때는 뭐라고 할까, 조금쯤 조용하고 퇴폐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는데. 지금은 오히려 왁자지껄한 활기를 띠고 있었다. 다행히 여주인은 그런 변화가 마음에 드는 듯 했다. 매출도 올랐을 테고.
“옆에 앉은 사람은? 친구?”
여주인의 질문에 일어난 오성화가 웃으며 인사했다.
“아, 지수랑은 뭐라고 할까. 이미 형 동생 하는 사이죠.”
“어머머, 정말요? 이런 멋진 형이 있었구나?”
“누가 형 동생입니까. 그냥 아는 사이죠.”
지수는 팔짱을 낀 채 부정했지만, 오성화는 얘가 원래 이런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고, 여주인은 다 알겠다는 듯 웃으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지수가 한숨을 쉬었다. 참 죽도 잘 맞지. 둘은 한 순간에 의기투합해서 지수를 놀리고 있었다.
조금 지나자 오성화는 아예 여주인과 살갑게 잡담까지 나누고 있었다. 오히려 지수보다 더 친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둘 모두 누구 하고나 빨리 친해지는 성격이니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 것일지도 몰랐다. 여주인이 지수를 돌아보았다.
“아, 그렇지 참. 저번에 지수 네가 준 찻잎 어디서 샀는지 말해줄 수 있어? 그걸로 차 끓여서 내갈 때마다 사람들 반응이 엄청 좋아서. 가능하면 계속 매장에 들여놓고 싶거든.”
아. 하고 지수가 입을 벌렸다. 찻잎이라면 분명 저번에 선물로 주었던 그것이었다. 시중에서 파는 찻잎에 별도로 지수가 몇 가지 마법적 처리를 거친 물건이었다. 그런 것쯤은 활력의 룬과 파사의 마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다.
“필요하신 수량 말씀해주시면 제 쪽에서 구해드릴게요.”
“어머, 그럼 고맙고."
“아, 혹시 포스터 남는 거 있으면 하나 주세요.”
기타를 든 서민하의 사진이 찍혀있는 포스터. 별다른 건 아니고 놀리는 데에 직빵이겠다 싶었다. 여주인은 흔쾌하게 수락해주었다. 다른 주문을 받으러 여주인이 떠나간 뒤, 활기차게 웃고 있던 오성화가 무언가를 보고 입을 벌렸다.
“왜 저 아저씨랑 저 아저씨가 여기서 술을 마시고 있지? 저 아저씨 보니까 내 스폰서 중에 한 명 같은데….”
잠깐만, 잠깐 인사 좀 하고 올게. 구석진 테이블을 힐끗힐끗 바라보고 있던 오성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는 얼굴이라도 발견한 것 같았다. 오성화가 저 멀찍이 두 아저씨가 술을 마시고 있는 테이블에 가서 얼굴을 비추고 인사하자, 중년의 남자가 유쾌하다는 듯 오성화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역시 불식 1팀장! 정보가 빠르구만? 자네 성격이라면 이 가게 찾아올 줄 알았지! 스카우트할 인재라도 살펴보러 온 건가. 그런 거라면 아마 낮에 오는 게 나을 텐데.”
껄껄껄 웃는 웃음소리에 오성화가 당황했다. 겉으로는 웃음으로 얼버무리고 있었지만, 속에서는 무슨 개소리야? 라는 의문이 소용돌이치는 표정이었다. 중년의 남자가 끌끌끌 웃음을 터뜨리며 소주잔을 들었다. 한 잔 받으라는 눈치였다.
졸지에 소주 한 잔을 들이키고 온 오성화가 자리에 앉았다.
“…여기에 무슨 비밀결사 집회라도 열리고 있는 거야?”
지수는 그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비밀결사까지는 아니지만, 비슷한 거라면 있기야 있었다. 고깔의 집회. 정기적으로 열리는 마법사들만의 모임. 하지만 고깔의 모든 정보는 외부 유출 금지이기에 오성화에게 뭐라고 말해줄 수가 없었다.
“단골 되시면 알겠죠 뭐.”
그것이 지수가 짜낼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
서민하는 기타 케이스를 맨 채 뒷골목으로 빠져나왔다.
지수와의 술자리엔 어떻게든 끼어들고 싶었지만, 모르는 사람과 같은 자리에 앉는 것은 거북했다. 밴드들의 뒤풀이 따위는 당연히 거절했다. 그렇다고 아무도 없는 방에 돌아가는 것도 싫었다. 어쩔 수가 없는 외로움을 느끼며, 서민하는 가만히 뒷골목에 등을 기댄 채 거리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혼자지만, 미역 씨는 혼자가 아니니까.
서민하가 푸우- 풍선껌을 불었다.
납득하고 있을 생각이었지만 오늘은 유난히 그 사실이 답답했다. 오히려 지수와 자신이 함께 있는 게 이상하다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렇게 혼자 있으면 생각이 어두워진다. 마치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서 두려웠다.
‘돌아갈까……'
그런 생각을 했을 때,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불고 있던 풍선을 터뜨린 서민하가 휙 고개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서있는 건 모르는 여자였다.
“저, 저기….”
여자가 등에 매고 있는 건 마치 시체를 싣는 관처럼 생긴 커다란 케이스였다. 세련된 장식으로 꾸며져 있는 케이스 위에는 수많은 굵기의 실들이 팽팽히 휘감겨있었다. 이를 테면 가야금을 연상시키는 형태였다. 이 사람도 악기 연주자인가. 저지의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던 서민하가 물었다.
“나를 부른 거야?”
“네……그러니까, 오늘 연주 정말 잘 들었어요!”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여자가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정말로, 정말로 온몸에 소름이 끼쳤어요. 원래는 이 동네에서 찾아야할 사람이 있는데, 그것도 잊어버리고 당신 뒷모습만 쫓아버리게 될 만큼 감동했어요. 가능하다면 영원히, 곁에 두고 노래하며 연주해달라 부탁하고 싶을 만큼.”
여자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끊임없이 말을 쏟아냈다. 하지만 시선은 이쪽을 마주치지 않고 아래쪽 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사람과 눈을 맞대는 게 익숙하지 않은 듯 했다. 말이 엄청나게 많은 건 말이 없는 자신과는 정반대였지만, 서민하는 왠지 눈앞의 여자가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닮았다기보다는 무언가, 같은 것을 공유하고 있는 듯한.
“사, 사인이야…? 팬 같은 거 없는데.”
서민하가 답지 않게 허둥지둥대며 말했다. 조금쯤 부끄럽기도 했지만, 자신의 연주에 감동했다는 사람을 만나는 건 음악을 하는 인간으로서 순수하게 기뻤다. 하지만 사인 같은 건 필요 없다는 듯 휙휙 고개를 저은 여자가 말을 이었다.
“저는 알아요. 꼼꼼이 덧칠해서 숨겨놓았지만 당신의 색깔은 결국 새까만 검정이라는 거.”
“응?"
“절망했던 거죠? 세상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던 거죠. 죽어버리고 싶은데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서 필사적으로 썩은 동아줄에 매달려 있었던 거죠.”
“자, 잠깐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서민하는 얼버무리듯 여자를 제지했지만, 심장은 철렁해서 두근두근 뛰고 있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얼굴색이 지금 백지장처럼 새하얘져있다는 것을. 눈앞의 여자는 뭐가 그리 행복한지 몸을 떨며 웃고 있었다.
‘뭐야.’
모든 게 정곡이었다. 마치 알몸이 까발려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여자는 마치 새까만 어둠 속이 익숙하다는 것처럼. 간단히 방문을 찾아내 열고 서민하의 마음속에 발을 내딛어온다.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며 폭로를 계속했다.
“겨우 찾아낸 희망과 행복에 매달리면서도 그 희망이 떠나버리진 않을까 겁내고 있는 거죠. 언제나 최악보다 더한 최악을 상상하면서. 그것에 비하면 자긴 행복하다고 안도하는 한편. 그런 생각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자길 혐오하고 있죠….”
어느 새 여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저도 똑같아요.”
그 한 마디에 서민하가 입술을 깨물었다.
미역 씨와 자신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같이 시간을 보내긴 해도, 마음을 터놓는 친구라기엔 관계가 조금 달랐다. 동경할 수는 있어도 서로 이해할 수는 없다. 그에게는 자신의 어두운 면을 내보일 수도 없고 내보이기도 싫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이 여자는. 서민하와 같은 절망을 품고 있었다.
“제 친구가 되어주실래요?”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여자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 다섯 손가락엔, 여러 가지 실이 칭칭 감겨있는 반지가 빠짐없이 끼워져있었다. 마치 꼭두각시에 연결해 조종하기 위한 장치 같은 형상이었다.
서민하는 한참동안 그 손을 바라보다, 조용히 손을 맞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