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 이건 계산에 없었는데 (5) >
싸늘한 공기가 감도는 옥상에서 이형의 괴물이 말했다.
<계약자여, 방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지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수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방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분명 자신은 아까까지만 해도 환상에 감싸여있었고, 그 안에서 정령에게 계약자의 자격을 시험당해, 마지막에 나타난 한 남자의 등을 보고….
‘루드비히 베리야에프.’
지수가 동경하고 있던 그 작가. 그가 이쪽을 돌아보는 동시에 환상이 무너졌다. 머릿속에서 그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거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기에 그렇게 된 건가? 그게 아니면. 생각에 잠겨있는 지수에게 재버워키가 말했다.
<대답하지 않겠다면 그걸로 좋다. 모든 일에 시시콜콜한 설명이 준비되어있는 건 이야기의 특권이니까. 확실한 것은, 그대가 이 재버워키의 시련을 보란 듯이 돌파해냈다는 것.>
괴물의 형상을 하고 있던 활자의 소용돌이가 한 데로 뭉쳐 새까만 구슬 형태가 되었다. 정확히는 구슬 자체가 새까맣게 물들어있는 게 아니라, 끝이 없는 글자와 이야기들의 집합이자 정수이기에 새까만 것처럼 보이는 것일 뿐이었다.
[최상격 정령, ‘이야기의 정령 재버워키’가 당신과 교감하여 계약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지수의 눈앞에 계약의 안내가 떠올랐다.
목록에서 정령을 깃들게 할 매개체를 선택하십시오.
<1. ‘늪지옥 여왕의 반지’>
<2. ‘던전 모험가 디트리히의 몬스터 백과’>
<3. 계약자 본인>
높은 등급의 아이템에 깃들게할 수록 계약한 정령의 초기 능력치가 증가하며, 정령이 선호하는 종류의 아이템에 깃들게 하면 정령이 가진 능력을 보다 깊게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해당 카테고리 : 책) 계약자 자신에게 깃들게 하기 위해선, 일정 수준 이상의 정령 교감 레벨이 필요합니다.
지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설명을 읽어보면 첫 번째랑 두 번째의 장단점은 명백했다. 등급이 높은 늪지옥 여왕의 반지에 정령을 깃들게 하면 초기 스탯이 높아지고, 상성이 맞는 책 종류의 아이템에 깃들게 하면 후반 포텐셜이 높아진다.
평소라면 망설임 없이 두 번째를 선택했겠으나, 반지는 책과 달리 언제나 편리하게 가지고 다닐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한 번쯤 고민해볼 만한 사안이었다.
문제는 바로 세 번째 선택지였다. 지수 본인을 매개체로 정령과 계약하는 것. 설명을 읽어보면 정령 교감 능력의 수준이 높아야 가능하다고 적혀있는데, 지수는 정령술의 정 자도 접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가능한 선택지라고 표시되어있는 거지. 지수가 시스템 창을 열어 확인해보았다.
[정령 교감 (Lv.MAX)]
정령의 의사를 눈치채고 교감할 수 있는 능력. 높을 수록 정령의 능력을 더 잘 이끌어낼 수 있다. 노력해서 개선될 여지가 있지만, 보통 재능에 크게 의존한다. 정령의 말을 완전히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을 정령사로서 최고로 친다.
‘아하….’
지수가 질렸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말하자면 그런 이야기였다. 정령에게 자신의 부탁만을 전하는 일반적인 정령사들과 달리, 지수는 해석 스킬 덕분에 정령 쪽의 말 또한 그대로 알아듣고 서로 대화할 수 있었다. 그것이 높은 레벨의 정령 교감 스킬로 나타난 듯 했다.
‘그러면 3번이지.’
지금까지 살면서 지수가 깨달은 것은, 아이템이나 뭐시기에 레벨이나 스킬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제한이 걸려있는 건 그만큼 좋은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었다. 지수가 망설임 없이 계약자 본인을 매개체로 한 계약을 선택했다.
그러자 활자가 뭉쳐 만들어진 새까만 구슬이 지수의 그림자 속으로 풍덩 빠져들었다. 그림자에서 물방울이 튀어올랐다.적잖이 동화적인 풍경이었다. 그림자의 늪 속에서 구슬이 천천히 풀어지며 녹아들고, 눈앞에 알림창이 나타났다.
[계약자 본인을 직접 매개체로 삼은 것, 정령과 계약자의 성향이 맞는 것으로 추가 보너스를 얻습니다.]
정령의 호롱불에도 쓰여있던 사실이었다. 지수와 성향이 맞는 정령을 불러낸다는 점. 그런데 이제 보니 그 성향이라는 것이 단순히 정령과 합이 잘 맞는다 하는 문제를 떠나서 능력치에도 영향을 끼치는 모양이었다. 안내창이 이어졌다.
[‘이야기의 정령 재버워키’는 고유 속성의 정령입니다. 고유 정령은 총 1체만 계약할 수 있으며, 계약을 해제하기 전엔 어떤 원소 속성의 정령과도 계약할 수 없습니다.]
특별한 정령 하나와 계약하면 평범한 정령을 줄줄이 달고 다니는 일인군단 행세는 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애초에 정령사도 아닌 지수에게는 상관없는 문제였다. 또한 물 불 바람 같은 원소를 다루는 건 만년필의 룬 마술로 충분했다.
[계약이 완료되었습니다.]
재버워키와의 계약이 끝나자마자, 밀려있던 안내창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그림책의 던전을 클리어한 보상들이었다. 계약 과정에서 만들어진 던전이기 때문인지, 내용을 읽어보자 보상들 또한 전부 재버워키와 관련된 아이템이었다.
[인스턴스 던전 ‘재버워키의 감옥’을 클리어하였습니다!]
[던전을 클리어한 보상으로 <체셔 고양이의 페이지〉를 얻었습니다. 해당 정령의 능력을 개방시킬 수 있습니다.]
[단독으로 클리어한 보상으로 <미친 모자장수의 페이지〉를 얻었습니다. 해당 정령의 능력을 개방시킬 수 있습니다.]
[던전 자체를 파괴한 보상으로 <보팔의 검의 페이지〉를 얻었습니다. 해당 정령의 능력을 개방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수의 손 위에 반짝이며 팔랑거리는 세 장의 페이지가 떨어졌다. 페이지에는 동화풍의 삽화와 함께, 한 구씩 시가 쓰여져있었다. 아이템의 설명은 셋 모두 똑같았다. ‘이야기의 정령 재버워키의 능력을 해방할 수 있는 재료.’
지수가 페이지를 발치의 그림자에 떨어뜨리자, 그림자에서 생겨난 이빨이 페이지를 우물우물 먹어치웠다.
"뭐야…. 곤충 채집인지 뭔지 벌써 다 끝났어?”
코트를 담요처럼 덮고 있던 서민하가 하품을 쉬며 눈가를 비볐다. 막 잠에서 깬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그림책의 던전 속에서 있었던 일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재버워키 또한 지수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고. 효과를 다한 정령의 호롱불도 부서져 새까만 모래가 되어있었다.
“어. 대성공.”
“잡은 건 어디 있는데?”
“이따가 보여줄게, 이따가.”
두 사람이 천천히 옥상의 계단을 내려갔다. 결국 오늘밤 이 옥상에서 무언가가 일어났었다는 건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되어, 지수 혼자만이 알고 있는 채. ···였을 터였다.
“저거, 최상격 정령도 불러낼 수 있구나~ 처음 봤어.”
밤하늘에 떠있는 건 한 명의 마녀였다. 자신의 발명품이지만 신기하다는 듯, 빗자루에 앉아있는 여자가 손바닥에 턱을 괴었다. 흑마녀는 부럽다는 듯 옥상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호롱불을 쓸 때는 난폭한 악령들만 찾아와서, 계약 같은 건 생각도 못해본 채 사용할 때마다 전쟁을 치러야 했다.
“애프터 서비스는 필요 없으셨던 모양이네.”
혹시나 이쪽이 선물한 물건 때문에 화를 입으면 입장이 난처해지니, 악령이 나타나면 도와주려고 혹시 몰라 대기하고 있었는데 역시 기우였던 모양이었다. 하기야 그 ‘척척박사’ 님이니, 자신 같은 인종하고는 달리 본질이 선량하다는 거겠지.
정령이 유사 이계(異界)를 만들어냈을 때는 어떻게 되나 싶었지만, 역시 척척박사 님답게 도움 따위 필요 없이 자력으로 돌파해냈다.
최상격 정령과 계약까지 맺었으니 모든 게 잘 풀렸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
계약 과정의 마지막, 최상격 정령의 환상이 갑자기 부서질 때.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는 관측할 수 없었지만, 한 순간 더없이 이질적인 마력이 흘러나왔다. 그 때 잠깐, ‘그 자’의 기척이 느껴진 것 같았는데. 흑마녀가 한숨을 흘렸다.
“기분 탓인가…?”
애초에 ‘그 자’가 눈에 띄는 움직임을 내보이기 시작했다면 대전쟁의 재림이다. 그걸 백묵을 비롯한 구세대의 늙은이들이 가만히 두고 보며 앉아있을 리가 없다. 기분 탓이겠지. 어깨를 으쓱인 흑마녀가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갔다.
‘요즘 접속 뜸하신데, 카페 좀 많이 와주시면 좋겠네….’
이제부터 단신으로 한 길드를 박살내러 가면서도, 마녀가 품고 있는 건 그런 소소한 생각이었다.
***
“저거… 뭐야?”
서민하는 경악에 찬 표정으로 지수의 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와 별다를 것은 없었다. 적당히 어질러져있는 책상 위와, 몇 번이고 녹차를 타마신 머그컵. 한 가지 다른 점은 바닥에서 몸을 웅크린 채 갸르릉대고 있는 무언가였다.
그것은 검은색과 연보라빛이 섞인 부푼 털을 하고 있는 고양이였다. 다른 게 아니라 지수가 계약한 정령인 재버워키였다. 이야기의 정령 재버워키는 그 이름과 같이 천변만화(千變萬化)의 이능을 지닌 정령이었다. ‘체셔 고양이’. 눈앞에서 갸르릉대는 건 그런 재버워키가 가진 형태 중 하나였다.
지수가 힐끗 고양이 쪽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때 옥상에서 잡았던 거.”
“곤충 채집이라며…. 매미 같은 거라며.”
“곤충 채집 같은 거라고 했지 언제 진짜 곤충이라고 했냐. 그리고 곤충이나 저거나 뭐가 달라, 그게 그거잖아.”
“엄청 다르거든. 사과해!”
지수가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무래도 감시해야겠어.”
“뭘."
“미역 씨, 고양이 사료 제때제때 챙겨줄 수는 있어? 그냥 놔두면 고양이 스트레스 받을 텐데 켓타워랑 스크래처는 어디 갔고? 하루에 30분은 놀아줘야 하거든?”
“얘 그런 거 필요 없는데.”
지수가 눈을 끔뻑이며 대답했다. 지금 바닥에서 갸르릉대고 있는 건 단순한 고양이가 아니라… 아니, 애초에 고양이도 아니었다. 고양이 형태로 변화한 정령일 뿐이었다. 먹이 같은 건 가끔씩 지수의 룬이나 몇 개 먹여주면 충분했다.
“그러면 안 돼.”
하지만 그런 말로는 납득이 안 된다는 듯 서민하가 지수를 노려보았다. 그 눈동자에 담겨있는 건 이렇게 되면 이 고양이는 절대로 무조건 자신이 돌봐줄 수밖에 없다는 결사의 의지였다. 마음대로 하세요. 지수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말려들게 한 일 사과할 것도 있고.’
그림책의 던전에 들어갔을 때 지수가 보았던 광경. 그건 서민하의 소원이었다. 그곳에서 고양이를 키우고 있었다는 건, 즉 현실의 서민하 또한 고양이를 키우고 싶어한다는 것이었다. 마음대로 남의 내면을 엿보아버렸다는 죄책감도 있었고, 들어줄 수 있는 범위라면야 하나쯤 들어주는 게 맞았다.
<흠, 여자. 보아하니 그대 또한 환상 속의 괴물인가? 재미있군. 같은 괴물끼리 서열을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다가간 고양이가 앞발로 서민하의 발목을 툭툭 쳤다. 하지만 그 중후한 재버워키의 목소리도, 서민하의 귀에는 냥~냐냥~냐냐냥 하는 귀여운 고양이의 울음으로 들릴 뿐이었다. 눈을 부릅뜨고 있던 서민하가 천천히 고양이를 들어올렸다.
“귀여워….”
<계약자여. 이 여자를 당장 내게서 때어놓아라.>
“만져도 안 도망치는 거 처음이야….”
<들리지 않는가? 계약자여!>
지수는 옆에서 한 명과 한 마리가 꽁트를 찍고 있는 건 내버려두고, 계약하게 된 정령의 안내창을 살펴보았다.
[페이지 넘기기 : 체셔 고양이]
이야기의 정령 재버워키를 ‘체셔 고양이’의 형태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체셔 고양이는 계약자의 주문을 꿀꺽 삼키는 것으로, 해당 주문의 위력과 특성을 얻어 전투를 보조합니다.
부재증명 : 한 순간 주변 공간을 왜곡해 모든 공격을 통과시킵니다. 사용한 뒤에는 다시 활자로 돌아갑니다.
(활자로 돌아간 뒤에는 다시 ‘체셔 고양이’ 페이지의 동화시(詩)가 완성된 뒤에야 다시 변화할 수 있습니다.)
[페이지 넘기기 : 미친 모자장수]
이야기의 정령 재버워키를 ‘미친 모자장수’의 형태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미친 모자장수는 계약자를 감싼 채 비행할 수 있으며 망토 형태가 되어 계약자를 보호할 수도 있습니다.
실크햇 : 한 순간 무저항인 두 대상의 위치를 서로 맞바꿉니다. 사용한 뒤에는 다시 활자로 돌아갑니다.
(활자로 돌아간 뒤에는 다시 ‘미친 모자장수’ 페이지의 동화시(詩)가 완성된 뒤에야 다시 변화할 수 있습니다.)
[책갈피 꽂아두기 : 보팔의 검]
이야기의 정령 재버워키가 ‘보팔의 검’ 형태로 대기합니다. 보팔의 검은 재버워키가 비활성화 상태일 시 그림자 안에서 항시 지속됩니다. 검의 숫자는 페이지 수에 비례합니다.
보팔 소드 : 그림자의 검들이 주변을 감싸고 돌며 계약자를 지킵니다. 계약자의 검술에 대한 이해도에 따라 검로가 개선됩니다. 계약자의 임의로 검을 사출할 수 있습니다.
최상격의 정령이라는 이름값은 하는 모양인지 이제 막 계약한 상태인데도 능력의 개수가 아주 많았다. 각 능력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할 수 있을 때까지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순서대로 마법, 보조, 검술이네.’
체셔 고양이의 경우에는 지수의 주문을 먹어 강해지는 구조이기에 별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바로 보팔의 검이었다.
언제나 지수의 그림자 속에서 지수를 지켜준다는 점은 든든하지만, 검들이 똑똑해지려면 검술에 대한 이해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니. 지수는 검에 대한 이해도는커녕 어릴 때 검도 학원 하나 다녀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중요한 패시브 스킬을 낮은 성능으로 썩혀두는 것도 아까웠다.
‘뭐 검술교본이라도 읽어야 되나….’
옆에서 투닥거리고 있는 재버워키와 서민하를 내버려두고, 지수가 손바닥에 턱을 괴었다. 사실 지금 당장은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것보다 신경쓰이는 점이 하나 있었다. 키보드를 두드린 지수가 옥션에 올라왔었던 한 매물을 검색해보았다.
그것은 학생 시절부터 지수가 소장하고 싶어 죽으려 하던 하나의 책이었다. 텍스트를 긁어놓은 이북이나 인쇄본이 아니라, 작가 본인이 직접 수기로 작성한 친필본. 지금에 와선 누가 구매했는지도 알 수 없는, 루드비히 베리야에프의 처녀작의 사진이었다.
설마. 설마에 불과한 이야기지만, 정말로 그 작가에게 무언가가 있는 거라면. 재버워키의 환상을 부쉈던 것이 지수의 이미지가 만들어 낸 우연이 아니었다면, 그의 정체가 단순히 ‘글을 대단히 잘 쓰는 작가’가 아니었던 거라면. 해석 스킬이 분명 반응할 것이다. 그리고 책의 사진을 시야에 담은 지수의 눈에 알림이 떠올랐다.
[‘해석’ 스킬이 발동됩니다.]
잠깐 눈을 감았던 지수가, 침을 꿀꺽 삼키고 진실을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