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규격외 등급 해석사-44화 (44/176)

44화.  < 이건 계산에 없었는데 (4) >

<···그대는 이것이야말로 올바른 결말이라고 생각하는가?>

→ [예] / [아니오]

지수는 멍하니 선택지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리면 검은 머리의 서민하가, 선물로 받은 통기타를 소중한 듯이 꼭 안고서 연주하고 있었다. 서민하는 언제나 명랑하고 쾌활하며, 수많은 친구들에 둘러싸인 채 활짝 웃고 있는 아이였다.

현실과는 다른 어쩌면의 이야기. 모든 것이 잘 풀렸다. 사건의 진상에 훨씬 빨리 도달해, 서민하는 악몽 같은 경험들을 겪지 않고 끝났다. 하지만 그것이 근거 없는 가공은 아니었다. 눈앞의 광경은 분명히 존재했을지도 모르는 현실의 가능성이라고, 지수는 왠지 모르게 이해하고 있었다.

“라~♪ 라라~♬"

지금 웃고 있는 서민하의 얼굴에 거짓 따윈 하나도 섞여있지 않았다. 지수는 문득 기억을 떠올렸다. 분명 그림책의 던전 안에 끌려들어올 때, 이 이야기는 한 소녀가 몰래 품고 있던 소원이라고 했었다. 그 소녀가 누구인지는 이미 명백했다.

평소의 지수라면 망설임 없이 아니오를 눌렀을 것이다. 지수는 만약의 이야기 같은 것엔 관심이 없었다. 애초에 일어난 사실 자체를 가지고 마음에 든다, 들지 않는다가 아닌 올바르다 잘못됐다를 따지는 것부터가 웃기는 일이었다.

어떤 환상을 보여준다 해도, 지수는 지금까지 자신이 한 행동에 반성한 적은 있어도 후회한 적은 없었다. 언제나 자신이 생각하는 최선을 선택해 왔다. 과정에 후회가 없다면 결과를 부정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이런 건 전부 무의미하다고.

무의미할 뿐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정말 이것이 서민하의 소원이라면, 이곳을 부정하는 건 서민하의 소원을 박살내는 행위였다. 바깥이 싫어서 방에 틀어박힌 사람을, 의사를 무시한 채 억지로 끌고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은 지수가 가장 경멸하는 종류의 행위였다. 그런 독단을 저지른다면 자신은 나중에 반드시 후회한다.

그저 자기 자신이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지수는 결국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한 채 자리에 앉아있었다. 서민하가 진정으로 마음 속 깊이 바깥의 현실을 잘못되었다고, 이곳이야말로 올바른 세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라면.

“지수 오빠, 왜 그래! 어디 아파?”

지수의 얼굴이 찌푸려진 것을 본 검은 머리의 서민하가 연주하던 통기타를 내려두고 이쪽으로 달려왔다. 솔직하게 걱정이 된다는 울상이었다. 서민하는 재빨리 정수기에 가서 물컵을 떠왔다. 그녀가 이쪽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고양이는 좋아하냐?”

“당연히 좋아하지! 너무너무 좋아!”

서민하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분명히 좋아할 자격 같은 거 없다고 했었는데. 그것과 동시에, 집에서 키우고 있는 검은 고양이가 마룻바닥에서 냐앙~ 하고 앞발을 들어올렸다. 교복을 입은 서민하는 달려가서 고양이와 능숙하게 놀아주었다. 동물을 대하는 게 서투르던 서민하와는 딴판이었다.

“…네가 괴물이라 생각해본 적 있어.”

“지수 오빠, 무슨 소리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누워서 고양이를 안고 뒹굴거리는 서민하가 대답했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지금 지수의 눈앞에 있는 서민하는 몸에 괴물을 이식당한적 따위 없으니까. 언제나 울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을 저주하던 바깥의 서민하와는 딴판이었다.

“날 이름 말고 미역이라고 부르는 녀석이 있는데.”

“그게 뭐야, 부끄럽다고 일부러 이름 대신 별명으로 부르는 거야? 쑥스럼 타는 초등학생도 아니고.”

“……그러냐.”

무언가 납득한 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머니를 뒤져보았지만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저장된 서민하의 번호에 전화를 걸어보아도,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라는 음성 만이 반복될 뿐이었다. 이곳에는 이미 지수가 알고 있던 서민하의 흔적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서민하 스스로가 그 모든 것들을 전부 부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난 지수가 우뚝 멈추었다.

모든 것이 부정당해 바뀌어있는 와중에 단 한 가지.

이곳에는 존재할 리가 없는 물건이 그곳에 있었다. 의자에 걸려있는 저것은 뭐지? 그것은 서민하가 그림책에 빨려들기 직전 옥상에서 춥다고 하길래 빌려주었던, 지수의 코트였다. 성큼성큼 걸어간 지수가 코트를 휙 채서 손에 들었다.

“어, 겨울옷이 왜 거실에 나와 있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서민하를 뒤로 하고, 입을 다문 지수는 코트 안의 안주머니를 살펴보았다. 그 안에 들어있던 건 납작하게 접혀있는 한 장의 편지지였다.

그 때, 라이브 하우스의 여주인에게 받았던 물건이었다.

분명히 안주머니에 넣어두고서 깜빡하고 있었다. 서민하가 절대 읽지 말라고 몇 번이나 당부했던 편지. 접혀있는 편지지를 펴서 읽어 보자, 그곳에는 몇 번이나 내용이 지워진 흔적과 함께, 조금쯤 서투른 글씨로 한 마디만이 쓰여있었다.

- 고마워.

"허."

몇 초 동안이나 편지를 바라보고 있던 지수가, 유쾌하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그야 서민하의 성격에 이런 말을 써놓으면 부끄러워질 만도 했다. 그리고 이 코트와 편지의 존재가 서민하의 본의를 해석할 수 있는 단서였다. 몰래 품고 있던 소원의 실현, 싫은 현실을 모두 부정하는 이야기 속 꿈에 틀어 박히면서도. 서민하는 이 물건들을 끝까지 부정하지 못했다.

서민하는 갑자기 왜 웃고 그러냐는 듯 이쪽을 호기심 넘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지수는 말 없이 편지를 휙 뒤집어 적혀 있는 내용을 보여주었다.

“어어······.”

하고, 편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서민하의 반응이 변하기 시작했다. 증기가 차오르는 듯이, 그녀의 얼굴이 귓가에서부터 새빨갛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붉은 색을 띄기 시작하는 것은 서민하의 얼굴만이 아니었다. 그 검은 눈동자도 머리카락도 천천히 연한 분홍색으로 물들기 시작하며.

“읽지 말라고 했잖아! 미역 씨!”

그곳에 있는 건 지수가 알고 있는 서민하였다. 순간 살기까지 띠며 땅을 박찬 서민하가, 한 손으로 편지지를 빼앗으려 달려들었다. 가지고 있어 달라며? 지수는 피식 웃으며 손에 쥔 편지지를 닿지 않게 높이 올리고, 천천히 다시 접어갔다.

“이런 게 어딨어. 반칙이야!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어!”

거의 이성을 잃은 서민하가 소리쳤다. 그것 자체가 훌륭한 대답이 되었다. '아니오’의 선택지가 눌리고, 그림책 속의 모형정원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세계가 단순한 글자들이 되어 무너져간다. 어딘가 멀리서, 책장이 덮이는 소리가 났다.

눈을 뜨자 차가운 밤공기가 떠도는 옥상이었다. 정령의 호롱불은 이미 꺼져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바닥에 덮인 채 놓여있는 그림책 과, 어깨에 지수의 코트를 걸친 채 기절한 듯 눈을 감고 앉아서 등에 벽을 기대고 있는 서민하가 있었다.

고개를 든 지수의 눈앞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인스턴스 던전 ‘재버워키의 감옥’을 클리어하였습니다.]

그 아래에는 클리어 보상이니 뭐니 하는 것들이 주르륵 나열되고 있었지만, 지금 지수는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아무래도 시련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듯 했다.

“이게, 정령이라고….”

지수가 침을 끌끽 삼켰다.

옥상 위, 지수의 눈앞에 거대한 이형의 괴물이 숨을 흘리고 있었다. 언뜻 보기엔 용처럼 보이지만, 머리는 괴이한 물고기였고, 등에서는 박쥐의 날개를 펄럭이고 있었으며 길게 늘어뜨러진 목은 지렁이를 연상시켰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모든 몸이 꿈틀대는 잉크의 활자로 이루어져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었다. 정체불명이자 의미불명의 괴물이었다.

<훌륭하다. 주역에게 현실이 아니라는 걸 억지로 일깨워, 이야기 자체를 부숴버렸는가? 허나 나와 계약하고자 하는 자여. 이 재버워키는 아직 그대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나를 납득시키지 못하면, 이야기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

몸을 분해해 수많은 글자들로 흩어진 정령이 지수의 몸 주변을 커튼처럼 감쌌다. 또다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주변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몰아치는 활자의 나열들 속에 비치며 시작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지수의 이야기였다.

<나와의 계약에 있어 중요한 질문은 오직 하나. 가공의 힘을 다루는 자는 반드시 현실에 뿌리내리고 있는 자여야만 한다. 그대는, 이야기에 잡아먹히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저편에서 비치고 있는 건 눈에 익숙한 학교였다. 아직 교복을 입고 있던 시절이었다. 노을이 지고 있는 방과 후의 도서관. 몇몇 학생들이 떠들고 있는 사이에서, 혼자 묵묵히 노트에 무언가를 적어내려가는 학생이 있었다. 명찰에 적혀있는 이름 세 글자는 이지수.

<그대는, 자신을 비틀린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그 말대로 학생 시절의 이지수는 괴팍했다. 다가오는 친구들을 밀어내고, 혼자 고립되어서 책만을 읽고 있었다. 그때는 주변 같은 게 보이지도 않았다. 이루고 싶은 꿈이 있었으니까. 그렇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댄 수재였으나 천재는 아니었고, 노력가였으나 집착은 없었지. 요령이 좋지만 자존심이 강해, 비겁한 술수는 떠올린다 해도 쓰지 못하고. 자신만의 것을 찾으려 노력해봐도 그대가 쥐어짜낸 이야기는 전부 다른 무언가의 짜집기일 뿐.>

하지만 지수에게는 창작의 재능이 없었다. 독자로서 작품을 분해하고 비평해도 자신의 이야기는 쓸 수 없었다. 적성의 문제였다. 다른 이야기의 다음 전개를 간단히 해석하면서도, 스스로 훌륭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

결국 이지수라는 인간은 꿈을 이루겠답시고 다른 모든 걸 포기한 주제에, 꾸던 꿈조차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그런 그대이기에 발현한 힘도 남이 써놓은 글을 해석할 뿐인 시답잖은 능력이지. 결국 책으로 배운 다른 사람의 지식을 모방하는 것 밖에 할 줄 모르고. 괜찮다고 어른스러운 척 하고 있지만 사실은 아직도 질투로 부글부글 끓고 있잖나.>

“그래. 맞아. 맞는데.”

지수 또한 때때로 생각하는 것이었다.

사실은 좀 더 다른 방식의 삶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적극적으로 친구들과 어울리며, 지금처럼 배배 꼬이지 않은 솔직하고 훌륭한 인간으로 성장했다면. 지금쯤 좀 더 즐거운 인생을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정말로 어쩌면, 꿈을 이뤘을지도 모른다.

“이미 끝난 얘기 몇 번이나 말하지 마.”

하지만 그건 지수의 알 바가 아니었다. 지수는 지금의 배배 꼬인 자신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해온 모든 일들을 긍정할 수 있다. 실수하고 고민하면서 하나하나 직접 선택해왔다. 꿈을 쫓다가 실패했다. 인격이 배배 꼬였다. 마음을 나눌 친구 하나 없다. 그런데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

“그러니까 현실 도피해서 망상이나 하고 있으라고? 아니면 내가 못났으니까, 더 잘난 놈이랑 바톤 터치라도 해버리라고?”

<나를 다루다 보면, 반드시 그런 결론에 이르게 되지.>

활짝 웃은 지수가 가운데 손가락을 펴 들었다.

“일 없으니까 꺼져.”

그 도발에 재버워키는 격렬하게 반응했다. 지수의 이야기를 샅샅이 훑어, 반드시 그의 빈틈을 찾겠다는 듯이. 페이지가 휘리리릭 넘어가는 소리가 마치 폭풍을 연상시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령이 보여준 환상은 한 남자의 등이었다.

<그래, 예를 들면 그대가 광신하고 있는 그 작가. 자신은 다시 태어난다 해도 절대 이런 감성을 가지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있지. 하지만 가정해보자. 만약 그대가 그런 재능을 가질 수 있다고 한다면….>

흔들리지 않던 지수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근거 따윈 하나도 없다. 하지만 확신했다. 저것은 '그 작가'였다. 지금은 손에서 놓아버린 지수의 옛 꿈도, 지금 손에 쥐고 있는 해석사 로서의 능력도. 전부 저 남자에 대한 동경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저기에 서있는 건 지수가 속으로 언제나 쫓고 있던 등이었다.

“루드비히, 베리야에프….”

멍하니 읊조린 지수의 말에, 환상 속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눈이 마주쳤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이상하다는 듯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 남자는.

“아하. 날 재현하고 있는 건가?”

납득했다는 듯 그렇게 말하고는.

“불쾌하군."

무덤덤한 어조로 감상을 뱉었다. 무대에 마음대로 자신을 올려놓지 말라는 듯이. 그리고 주먹을 쥔 그가 허공을 향해 쾅 휘두르자, 유리창이 깨지는 듯 별안간 모든 환상이 박살났다. 모든 간섭이 거절당해 끊어졌다. 단순한 활자로 화한 파편들이 무너져내렸다.

돌아온 풍경은 차가운 공기가 감도는 옥상이었다. 지수로부터 강제로 떨쳐내진 이야기의 정령 재버워키가, 경악을 감추지 못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계약자여.〉

<방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입을 벌린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건 정말로, 이쪽이 묻고 싶은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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