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 이건 계산에 없었는데 (2) >
조용한 옥상, 마력으로 밝힌 호롱불이 은은히 흔들렸다.
“그래서, 뭐 하는 거야?”
“곤충 채집……비슷한 거.”
지수가 캔커피를 홀짝이며 대답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서민하를 함께 데려왔지만, 사실 그녀가 나서야 할 상황이 될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정령의 호롱불의 설명에 따르면, 호롱불은 지수와 파장이 맞는 정령을 끌어온다고 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아마 난폭한 정령이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지수는 싸움에 관해서는 완전히 잼병이었으니까. 자신과 비슷한 성격이라면, 충분히 말로 설명하면 알아들을 만한 합리성을 갖추고 있을 거라고 지수는 자신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옥상 위에서는 정령은커녕 나방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호롱불의 불꽃은 조금씩 흐릿해져가고 있었다.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설마 이거 꽝도 있는 건가? 생각해 보면 정령을 호롱불에서 만들어내는 것도 아닌데 주변에 정령이 없으면 불러내지 못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이거 소모품이라 한 번 쓰면 끝인데.’
지수가 곤란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어디 정령 많을 것 같은 숲이나 던전에서 켜야했던 건가. 아무리 공짜로 받은 물건이라도 영웅 급 아이템, 그것도 수제작으로 만들어진 마도구를 날려먹은 건 커다란 타격이었다. 조금 더 있으면 나타날지도 모른다. 지수는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러자 옆에서 서민하가 지수의 소매를 꾹꾹 당겼다. 추우니까 웃옷 좀 내놓으라는 뜻이었다. 확실히 옥상의 공기는 꽤 쌀쌀했다. 지수도 조금 춥다 느꼈지만 이쪽에서 도와달라고 부른 건데 이 정도는 해줘야겠다 싶었다. 서민하가 받은 코트를 담요처럼 어깨 앞쪽에 걸쳐 덮었다. 그리고 말했다.
“저거 왜 여기서 굴러다니고 있어.”
“어? 뭐가.”
“저거 말이야. 그림책 같은 거…. 미역 씨 책 아니야?”
서민하가 가리키고 있는 곳엔 그 말대로 낡은 가죽 커버의 책 하나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서민하가 바닥의 책을 줍기 위해 일어섰다. 그리고 지수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지수는 저런 디자인을 하고 있는 책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 떨어뜨리고 갔나.’
그리고 지수의 시야에 그 표지가 들어온 순간,
[‘해석’ 스킬이 발동됩니다.]
눈앞에 알림창이 나타났다. 눈을 번쩍 뜬 지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평범한 책을 바라본다고 해서 갑자기 해석 스킬이 활성화 될 리가 없었다.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벌떡 일어난 지수는 서민하를 제지하기 위해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그 책 만지지 마!"
그 말에 휙 고개를 돌아본 서민하는, 이미 양손으로 두꺼운 그림책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펑! 만화 같은 연기가 터져나오며 서민하의 모습이 옥상에서 사라졌다. 들고 있어주던 사람을 잃어버린 그림책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그림책이 서민하를 먹어치웠다. 침을 꿀끽 삼킨 지수가 책에 다가섰다.
그리고 해석으로 정보를 읽어낸 지수가 눈을 번뜩였다. 바닥에 떨어져있는 그림책의 정체는, 하나의 작은 던전이었다.
[인스턴스 던전 : 재버워키의 감옥]
<난이도 : C랭크 ~ S랭크〉
<주요 출현 속성 : 없음〉
<주요 등장 패턴 : 환혹〉
<특이사항: 최상격의 정령, ‘이야기의 정령 재버워키’가 계약을 원하는 자에게 내리는 시련. 이야기의 환상에 사로잡히지 않는 자만이 재버워키의 계약자가 될 수 있다.〉
인스턴스 던전. 정령. 시련. 지수는 그제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던 건지 이해했다. 흑마녀에게 선물받은 등잔은 헛되이 불타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이 그림책이야말로, 지수의 마력을 머금은 호롱불이 불러낸 정령의 정체였다.
지수가 그림책을 향해 손을 가져갔다.
본래라면 조금 더 신중하게 결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좀 도와달라고 불러낸 사람이 자기 때문에 영문도 모를 물건에 잡아먹혀버렸는데, 냉정하게 밖에서 바라보고 있는 게 가능할 만큼 지수는 능숙하고 요령 좋은 인간이 아니었다.
지수가 손을 대자 그림책에서 활자의 사슬이 튀어나왔다. 덩굴처럼 얽힌 글자들은 지수의 몸을 얽어, 식충식물과 같이 먹잇감을 페이지 안으로 끌고 갔다. 풍덩. 이야기 속으로 빠져든다. 물 속을 끝없이 떨어지는 듯한 감각 속에서, 마구 날뛰던 글자들이 춤추며 지수의 눈앞에서 정렬되었다.
<소녀는 아무도 몰래 상상했다.〉
<어째서 좀 더 빨리 만나지 못한 것일까. 그 날 옆에 그가 있어주었다면, 많은 게 달라졌을지도 모를 텐데.〉
<이야기는 모든 상상이 이루어지는 공간.〉
<하지만 염원이 이루어지는 건, 이야기 안에서 뿐.〉
[Title : IF의 이야기 ]
***
지수가 현기증과 함께 눈을 뜨고 일어났다. 재빨리 몸상태를 확인해보았지만 무언가 달라진 점은 없었다. 분명히 호롱불이 불러낸 정령의 그림책에 빨려들어가버리고, 그 다음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보자 인적 없는 공장 터였다.
여기가 어딘가 싶어 스마트폰을 켜 위치 정보를 확인해보았지만, GPS가 전혀 동작하지 않았다. ‘날짜 및 시간이 잘못되어 있습니다.’라는 오류만 계속해서 나타날 뿐이었다. 지수가 쯧 혀를 차고 전화를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일단은 서민하를 찾는 게 급선무였다.
공장 터에서는 사람들이 작업을 하고 있지도 않았고, 출입금지 테이프가 여기저기 둘러쳐져있었다. 마치 유령도시처럼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였다. 이런 인기척 없는 넓은 부지를 예전에도 한 번 돌아다녀본 적이 있었다. 그리 좋지는 않은 기억이었다. 정유현과 함께 집행부 첫 업무를 보았을 때.
아무도 없는 건물 터를 터벅터벅 걷고 있던 지수가 한 순간 위화감을 느꼈다. 자신의 발자국 소리가 한 번이 아니라, 아주 빠르게 두 번 겹쳐서 울리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위화감이라고 하기에도 너무나 사소한 느낌이었다. 어쩌면 흡혈귀의 계약자가 되어 민감해진 감각 탓일 수도 있었다.
‘혹시 모르니까 시험해볼까.’
터벅터벅 걷고 있던 지수는 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하며 다음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지면에 발바닥이 닿기 바로 직전 내딛던 발을 아슬아슬하게 멈추었다. 그리고 터벅. 기척을 최대한 숨긴 듯 미세한 소리였지만, 분명히 들렸다. 발소리가 등 뒤에서. 고개를 돌리자 무언가가 총알같이 튀어나왔다.
“큭!”
그와 동시. 화들짝 놀란 지수가 순식간에 몸을 굴렸다. 지수가 있던 자리에 내리꽃힌 검이 커다란 폭발을 일으켰다. 폭발의 여파로 커다란 바람이 터져나왔다. 지수가 침을 꿀끽 삼켰다. 서민하의 계약자가 되어 신체능력이 상승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분명 이 일격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죽었다.
“재밌네….”
지수에게 쇄도해 다짜고짜 검을 휘두른 남자가, 바닥을 부순 검을 치켜들어 어깨에 걸쳤다.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을 지키고 있으라길래, 짜증이 나서 그냥 다 터뜨려버릴까 했는데. 딱 맞춰 쥐새끼가 숨어들어 와주는군. 여기에 뭐라도 숨겨져 있는 거냐?”
그 모습을 확인한 지수의 눈이 크게 떠졌다. 남자가 입고 있는 검은 색의 제복. 그것은 지수 또한 알고 있는 옷이었다. 알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직접 걸치고 있었던 적도 있었다. 가면을 쓴 남자가 입고 있는 것은 집행부의 제복이었다.
남자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건 도깨비 가면. 보다 정확히 설명하면, 축구 국가대표를 응원할 때 사용하는 붉은 악마 문양처럼 생긴 형태의 가면이었다. 하지만 지수가 놀란 건 그가 입고 있는 제복 때문도, 쓰고 있는 가면 때문도 아니었다.
“당신……"
어딘가 눈이 익었다.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눈앞의 이 남자는 지수가 만난 적 있는 사람이라고 모든 감각이 고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지수가 알고 있는 그 사람과는 말투도 분위기도 달랐다. 말하자면 훨씬 날이 서있는 느낌이었다.
아직 확신을 가지지 못한 지수는 천천히 스마트폰을 들어, 저장되어 있는 ‘그’의 번호에 전화를 걸었다. 그것과 동시에 집행부 제복을 입고 있는 남자의 주머니에서 착신음이 울렸다. 빙고. 도깨비 가면을 쓴 남자가 이쪽을 쳐다보았다.
“오성화 씨예요…?”
“뭐야 너. 내 번호를 왜 알고 있냐.”
도깨비 가면을 쓰고 있는 오성화가 이상하다는 듯 검을 거두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결코 우호적인 태도는 아니었다. 원래는 그냥 박살내버리려고 했는데, 상황이 돌아가는 꼬라지를 보니 뭔가 낌새가 이상하니 심문한 다음 박살내자. 딱 그 정도의 생각이 담겨있는 움직임이었다.
다가오는 오성화를 보고 지수가 침을 꿀꺽 삼켰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지수 쪽이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지금 당장 이 인간을 납득시키지 않으면 팝콘 기계에 들어간 옥수수 꼴이 되어버릴 거라는 사실이었다. 눈앞의 오성화는 지수가 알고 있는 오성화랑은 거의 정반대 수준으로 성격이 달랐다.
마물에게 부적을, 유령에게 십자가를 내미는 것처럼, 지수가 재빨리 집행부원의 사원증을 지갑에서 꺼내 내밀었다. 눈썹을 찌푸린 오성화가 사원증을 바라보았다. 위조 같은 게 아닌지 확인하려는 셈이겠지만, 백 날을 본다 해도 눈치채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이건 위조 같은 게 아니라 진짜니까.
“뭐야. 알바? 충원지시 같은 거 못 받았는데. 기다려 봐. 일단 연락해보고 판단할 테니까. 너 이름이 뭔데?”
오성화가 스마트폰을 꺼내들어 툭툭 번호를 눌렀다. 본부에 연락해서 지수의 이름이 명단에 존재하는지 아닌지 대조해볼 요량인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완전히 역효과다. 다음에 뭐라고 변명하든 오성화가 지수를 죽여버릴 것이다. 지수가 식은땀을 흘렸다. 어떻게 해야 하지? 생각을 멈추지 마.
그리고 입술을 깨물고 있던 지수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비밀 임무입니다. 본부에의 연락은 불허합니다.”
“뭐라는 거야. 약 먹었냐?”
“우선은 한 가지 질문을 하죠.”
눈을 감은 지수가 필사적으로 기억을 떠올렸다. 그 때 정유현이 자신에게 뭐라고 했었는지. 꽉 쥔 주먹 안에서 연신 검지로 손바닥을 두드렸다. 지수의 말이 매끄럽게 이어졌다.
“당신의 상사가 남들 몰래 반인륜적인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심증이 있을 때, 규율을 어기는 한이 있어도 그걸 파헤칠 의사가 있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지금 당장….”
“됐고. 본부 아니면 누구 명령 받고 왔는데.”
관심 없다는 듯 지수의 말을 끊은 오성화가 추궁했다. 지수는 재빨리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여기서 꺼내야 할 답이 무엇일까. 생각할 필요도 없이, 여기서 지수가 말할 수 있는 이름은 하나밖에 없었다. 지수가 침을 한 번 꿀꺽 삼킨 뒤에 말했다.
“늑대 씨 명령입니다."
“아. 쥐포장수 앞잡이였어? 말을 하지."
그 한 마디에 모든 경계가 풀어졌다는 듯이, 오성화가 어깨를 으쓱였다. 생각 외의 반응에 오히려 지수가 황당했다. 아까와는 반응이 전혀 달랐다. 지수가 눈썹을 찌푸리며 오성화에게 물었다.
“…확인 안 하십니까? 거짓말이면 어쩌려고.”
“그 인간 일중독이잖아. 바쁘다고 안 받겠지 어차피. 그리고 그 양반이 얽혀있단 얘길 들으니 대충 감이 오네.”
아까 질문도 그런 뜻이었구만. 터벅터벅 걸어가던 오성화가 화난다는 듯이 옆으로 휘잉 칼을 휘둘렀다. 동시에 일어난 거대한 폭발이 건물의 담벽을 무너뜨렸다. 모래먼지에 콜록대는 지수에게 앞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오성화가 말했다.
“그러니까 정황을 따져 보면, 여기에 뭔가가 숨겨져있다는 거겠지? 나를 경비로 박아둬야 할 만큼 아주 좇같은 뭔가가.”
지수의 말로 인해 그의 안에서 맴돌고 있던 퍼즐 조각들이 끼워맞춰진 것 같았다. 난폭해보이는 분위기와 별개로 지수가 알고 있는 오성화처럼 생각이 깊은 건 마찬가지인 듯 했다. 그리고 바닥에 주저앉은 오성화가 지수에게 턱짓하며 말했다.
"잘 됐네 . 안 그래도 짜증 좀 풀고 싶었는데. 찾아내봐."
지수도 오성화와 만나고 대화한 것을 통해 지금 여기가 어딘지 슬슬 짐작이 가고 있었다. 단서는 많았다. 오성화의 스마트폰이 지금 쓰이지 않는 구형인 것. 날짜 정보가 어긋나있다는 것, 지수 앞에 나타난 오성화가 불식 길드가 아닌 집행부 소속이라는 것.
이곳은, 정확히 이 던전 안이 재현하고 있는 것은 과거의 어딘가였다. 그리고 집행부원이 지키고 서있었다는 점, 겉보기엔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이라는 점. 서민하가 빨려들어간 결과 발현된 던전 이라는 점. 그 모든 상황을 고려하면, 여기에 숨겨져있는 것은 아마도.
‘실험장.’
기분이 더없이 불쾌해졌다. 눈을 감은 지수의 몸에서 파사의 마력이 넘실넘실 흘러나왔다. 몸 안의 마력의 흐름을 단절시킨다. 명경지수. 완전한 고요를 찾은 지수가 어둠 속에서 바깥의 마력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당첨이었다. 이 주변 어딘가 확실한 위화감이 느껴지는 지점이 있었다. 지수가 천천히 걸음을 내딛기 시작하자, 팔짱을 끼고 있던 오성화가 일어나 말없이 따라붙었다.
“...여기네요.”
지수가 공장 건물 중 한 곳의 바닥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것은 대단히 복잡하고 교묘하게 쳐져있는 결계였다. 어떤 문이나 입구의 존재 자체를 숨기고, 결계의 존재를 알아챈다고 해도 적절한 방법과 순서로 마력을 흘려넣어 해제하지 않으면, 집적된 마력을 폭발시켜 안에 있는 모든 걸 박살내버리는 구조였다.
물론 그 '적절한 방법과 순서'는 결계를 친 본인이 아니면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들킨다 해도 증거를 인멸한다는 점에 있어선 아주 훌륭한 장치였다.
하지만 지수는 코웃음을 쳤다. 적어도 마력의 배열로써 복잡하게 구조를 숨기는 것은 지수 앞에서 무의미한 일이었다. 이미 지수의 시야는 마력의 배열을 언어로서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언어인 이상, 지수의 능력을 피해갈 수 없다.
<'해석’ 스킬이 발동됩니다.>
일 분도 지나지 않아, 결계는 너무나 간단하게 해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