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 이건 계산에 없었는데 (1) >
지수는 방에 찾아온 윤나연이 건넨 자료를 살펴보았다.
그녀가 가지고 온 자료는 불식 길드가 중개해주는 '던전 정보업'의 첫 일감이었다. 판별된 던전의 등급은 B급이었다. 사실 C급 이하의 던전은 정보가 없어도 어떻게든 대처할 수 있기 때문에 돈을 주고 정보를 확인하려는 사람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녹차를 홀짝이던 지수가 그녀에게 말했다.
"분석에는……며칠 걸릴 것 같네요."
"네! 일단 1차 마감일까지만 맞춰주시면 될 것 같아요!"
사실은 거짓말이었다. 해석 스킬을 발동한 지수의 눈은, 윤나연이 가져온 자료를 보자마자 몇 초 만에 정답을 적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지수의 생각에 그건 섣부르게 밝히면 안 될 사실이었다. 너무 과하게 편리하다. 불식이 동맹 따위 그냥 무시하고 지수를 손에 넣는다는 계산을 해버릴 만큼.
'신중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툭툭 자료들을 정리해 봉투에 넣은 지수가 생각했다. 솔직히 말해 불식 길드 중에서도 오성화에 대해선, 지수 개인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는 인상을 받고 있었다.
그건 그가 보여준 행동들을 봤을 때 반쯤 증명된 사실이었다. 하지만 백묵은 다르다. 그 아저씨는 당최 무슨 꿍꿍이속인지 알 수가 없었다.
눈동자를 가늘게 든 지수 앞에서 윤나연이 말했다.
"그런데 방이 되게 깨끗해졌네요? 예전에는 좀 더 어질러져있는 느낌이었는데. 이렇게 막 바닥에 종이들 있고…. "
"그랬었죠."
차를 홀짝인 지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러자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윤나연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활짝 편 양손을 휘저었다.
"아, 아니! 더럽다거나 그랬다는 말이 아니라요! 저는 진짜 멋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뭔가 연구자 같아서!" "진짜예요!"
"아, 네…."
"진짜라고요! 믿어주세요! 심지어 예전이 더 좋아요!"
"네, 알겠으니까 앉아주세요."
당황한 지수가 진정하라는 손짓을 보내며 말했다. 그러자 윤나연은 자신이 얼마나 큰 소리를 내고 있었는지 눈치챈 모양인지 자리에 주저앉아 푹 고개를 숙였다. 만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 사람은 비등점이 너무 들쭉날쭉이라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이내 지수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도 예전 방이 더 마음이 놓이는데. 옆집 사는 애가 눈 뜨고 못 봐주겠다고 맨날 들어와서 마음대로 정리해서요."
"옆집 사는 애가 매일 들어와서? 지수 씨 방 정리를 해준다고요! 어떡해, 지수 씨 여자친구예요!?"
흥미가 넘친다는 듯이 눈동자를 빛낸 윤나연이 꺄꺄소리를 내며 연신 옆쪽의 벽과 지수의 얼굴을 번갈아쳐다보았다. 자기 일도 아닌데 두근거려서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그걸 본 지수는 현기증이 난다는 듯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런 게 아니고요. 걔가 가게 청소하는 일을 하고 있어서 그런 걸 진짜 눈 뜨고 못 보는……아무래도 상관없는 얘기는 그만두고. 이번 발주를 2주 정도 미룰 수 있을까요."
"네? 다른 바쁜 일이 있으신가요?"
윤나연이 재빨리 메모하기 위해 수첩과 볼펜을 꺼내들었다. 화제 돌리기 성공. 입꼬리를 살짝 틀어올린 지수가 무릎 위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하지만 정말로 말을 돌리기 위해서만 꺼낸 이야기는 아니었다. 헛기침을 한 지수가 말을 이었다.
"요 주변에 작업실을 하나 따로 구하려고요."
정확히는 작업실이 아니라 마도학과 연금술의 공방이었다. 지금까지는 지수의 방 구석에 가마솥이니 뭐니를 놓아두고 어떻게든 해나갈 수 있었지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 하고 있는 가내 수공업 같은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마법 연구는 집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다지만, 연금술을 궁구하는 건 이 좁아터진 방 안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재료와 완성품들을 넣어둘 창고 또한 필요했다. 걸맞은 설비를 갖추려면 여기보다 훨씬 넓은 공간이 필요할 것이다.
돈 문제에 관해선 일단 걱정이 없었다. 지금까지 불식에 계속 공급한 영약 값들도 있고, 이번 던전 정보업의 착수금이라고 불식에서 들어온 액수는, 날로 먹는 것도 이 정도면 범죄 아닌가 싶어 지수의 양심이 찔릴 점도였다. 윤나연은 오히려 이제야 방을 구하는 게 신기하다는 듯 간단히 납득했다.
"아하. 그러면 저희 쪽에서 한 번 수배해볼까요? 원하는 조건을 말씀하시면 가까운 부지 중에서 매물들 리스트업해서 가져다드릴게요. 지수 씨가 한 번씩 살펴보실 수 있게."
"그러면 저야 감사하고요."
지수가 고개를 꾸벅이며 대답했다. 솔직히 작업실을 구하느라 직접 여기저기 조건을 따져보며 살펴보러 다니는 건 피곤한 일이었다. 지수 쪽에서는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같은 길드 소속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번거롭게 해드려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저쪽이 먼저 꺼낸 말에 사양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면 평대랑 층수랑. 올 전세로 하는 게 낫겠죠? 여기 이 사진들 보시면…저희 길드 대장장이 분들께 지원해드리는 공간이 이런 식이거든요. 이런 느낌 방들로 괜찮을까요?"
윤나연이 지수의 옆에 다가와 스마트폰에 있는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지수는 화면 가까이 얼굴을 가져다대며 사진들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작업실이라해도 여러 가지 형태가 있었다. 큰 거 작업할 땐 거의 공방에서 지내야할지도 모르니 책상이랑 욕실도 있어야겠고…. 그리고 방문이 쾅 열렸다.
"미역 씨. 오늘 점심 말인데…!"
문을 열고 들어온 서민하가 새까만 비닐을 들어 내보였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조금쯤 신난 표정이었다. 부스럭거리는 새까만 비닐에는 대파와 이런저런 식재료들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서민하는 딱 붙어서 방들을 살펴보고 있던 윤나연과 지수를 바라보더니, 돌처럼 굳어 움직임을 멈췄다.
조금쯤 나른해보이던 얼굴이 완전히 정색한 무표정으로 변하기까지 5초가 걸렸다. 어느새 서민하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어있었다. 저거 진짜 렌즈 하나 사서 끼라 해야 하는데. 지수가 침을 꿀꺽 삼켰다. 쾅 열렸던 문이 또다시 쾅 닫혔다.
잠시 지수의 방 안에 정적이 일었다. 그리고 닫힌 문을 빤히 바라보던 윤나연이 웃으며 짝 손뼉을 쳤다.
"아, 저 애가 지수 씨 방 청소해준다는 그…!"
흥미가 있는 걸 넘어서 철철 넘치고 있다는 듯, 윤나연의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겨우 화제를 돌렸나 싶었더니 산 넘어 산이 었다. 어쩌다가 만난 거예요? 무슨 사이예요? 호기심에 불타고 있는 윤나연이 지수에게 질문공세를 해왔다. 손깍지를 낀 지수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돌겠네 진짜…. '
지수는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작게 읊조렸다.
***
윤나연이 떠난 뒤 옆방의 문을 열자, 풍선껌을 씹는 서민하가 선반에 앉아 기타를 조율하고 있었다. 지수가 신발을 벗고 방 안에 들어와도 서민하는 인사는커녕 보는 척도 안 하고 기타줄만 띵가띵가 튕겼다. 지수가 손을 흔들었다.
"안녕."
"...누군데?"
그 말에 지수가 한숨을 쉬었다. '안녕'이라는 말을 했는데 저쪽에선 '누군데'라는 대답이 돌아오고 자빠졌다. 말이 전혀 맞물리지가 않는다. 제대로 된 대화가 성립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였다. 진짜 어린애도 아니고 이게 뭐하는 꼴이야.
"같이 일하는 사람인데. 이번에 방 하나 구해야 돼서. 문을 왜 그렇게 쾅 닫아, 사람 놀라게."
이런 것 가지고 구구절절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다. 간단히 요약해 대답한 지수가 주방으로 걸어갔다. 서민하가 사온 비닐에는 온갖 종류의 고기들과 대파, 마늘이 들어 있었다. 지수가 눈썹을 찌푸리며 비닐을 들었다.
"이보세요, 무슨 대낮부터 고기를 구우시려고?"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린 지수가 흠칫 놀랐다. 아까까지만 해도 기타줄을 조율하고 있던 서민하가 어느새 지수의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있었다.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하던 서민하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지수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방을 구해? 왜? 미역 씨 이사갈거야?"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근처에 작업실 하나 구하려고."
"이사가는 건 아니고?"
"왜 가 내가."
무슨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인 것 같은데 지수 입장에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다. 지수의 대답에 서민하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선 소파에 앉아 몸을 기댔다. 뭔진 몰라도 방금까지 삐져있던 게 풀린 것 같아 다행이었다.
"무슨 기분이 들어서 대낮부터 고기를 구워먹는대. 근데 이거 고기 굽는 냄새 위층에 올라가면 민폐일 텐데."
"...고기 좋아해서. 먹고 싶어서 그래. 안 돼?"
"안되는 건 아닌데."
어깨를 으쓱인 지수가 비닐에서 서민하가 사온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 늘어놓았다. 요즈음 서로 시간이 맞으면 서민하에게 간단하게라도 식사를 만들어주는 게 지수의 일상이었다. 허구한 날 하루 세끼를 컵라면 같은 것만 집어먹길래 저러다 죽는 거 아닌가 걱정이 돼서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서민하가 이런 심정으로 자신의 방을 청소했던 건가 싶었다.
한 가지 궁금한 건 사온 물건에 마늘이 끼어있다는 점이었다. 서민하는 반쯤 흡혈귀인데 마늘을 먹어도 되는 건가. 마늘 같은 거 먹으면 피 토하면서 괴로워하는 거 아닌가? 그리고 물건들을 다 늘어놓은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뭐야. 고기 좋아한다면서. 쌈장이랑 밥 어디갔어?"
무슨 대파 같은 이상한 건 사와놓고 이렇게 중요한 걸 빼먹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지수가 슬쩍 돌아보자, 소파 구석에서 무릎을 끌어 안은 채 앉아있는 서민하가 조용히 말했다.
"몰라, 구워먹어 본 적 없어서…."
"뭐?"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안 갔다. 지수가 어이없다는 듯 눈썹을 찌푸리자, 서민하는 무릎에 더욱 얼굴을 박았다.
"그러니까. 보통 고기를 혼자 구워먹지는 않으니까. 지금까지는 같이 먹을 사람이 없었으니까. 나도 먹어보고 싶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그냥. 그랬던 건데…. "
갑자기 분위기가 암울해졌다. 무릎을 감싸안은 서민하가 변명하듯이 계속 중얼거렸다. 그것은 아웃사이더인 지수도 구구절절히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지수가 멍하니 머리를 긁적였다. 어차피 밥이랑 쌈장 정도는 지수의 방에 있으니 상관 없었다. 냄새나 연기는 룬 마술로 정화하면 될 것이다.
방에서 햇반과 쌈장을 가지고 온 지수는, 버너에 부탄가스를 넣고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고기가 지글지글하게 익어갔다. 서민하는 그 광경 자체가 신기하다는 듯 눈을 빛내며 관찰하고 있었다. 가위로 고기를 잘라준 지수가 말했다.
"이제 먹어도 돼."
"어, 어."
나무젓가락을 든 서민하가 고기를 들어 기름장에 찍어먹었다. 그리고 맛있다는 듯 계속 고기를 몇 점 더 연이어 입에 가져갔다. 고기가 구워지는 속도보다 명백히 빠른 페이스였다. 지수는 방에 냄새가 배지 않도록 정화의 룬을 그렸다. 안주머니에서 꺼내든 것은 세련된 디자인의 만년필이었다.
"그거 뭐야?"
"내 전용 마법 지팡이라고 할수 있지."
지수가 씩 미소지으며 능숙하게 손으로 휘리릭 만년필을 돌렸다. 몇 시간 동안 연습해 손에 익은 묘기였다. 만년필은 고깔의 스터디 모임에 참석해 수많은 주문들의 구조를 해석 스킬로 훔쳐본 결과 얻은 보상 아이템이었다. 생각해 보면 지수가 마법사로서 제대로 된 장비를 얻은 건 이게 처음이었다.
[파사의 만년필 - 영웅]
한 때 '마법사의 악몽'이 라 불리었던 무기. 다른 지팡이나 완드처럼 주문을 저장하거나 마력 자체를 증대시키는 효과는 없지만 필흔(筆植)으로써 주문의 시동을 가능케하고, 마력을 극도로 섬세하고 정확하게 뽑아낼 수 있다. '파사의 마력'을 가진 마법사가 사용하면 숨겨진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평범한 주문을 만년필의 필흔을 이용해 발동시키기 위해선 추가적인 마력 소모가 필요했지만, 지수의 룬 마술은 똑같이 각인으로 발동되는 체계인 터라 그런 과정이 필요 없었다. 이 만년필과 룬 마술은 상성이 극도로 잘 맞는 조합이었다.
지수가 지글지글 구워지고 있는 고기 위에 만년필로 휘리릭 정화의 룬을 그렸다. 이전과 달리 마력의 잔향 자체가 거의 남지 않는, 대단히 얇고 깔끔한 형태의 룬이었다. 은은하게 빛나는 룬이 고기의 냄새를 빨아들여 정화해갔다. 지수가 필기감에 손을 부르르 떨며 달콤한 한숨을 내쉬었다.
"대단하지."
"잘 모르겠는데…."
지수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쳐다보았지만, 서민하는 정말로 관심 없다는 듯 고기만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로 대단했다. 예전과 똑같이 한 획을 그어도, 주변에 흩어지는 마력의 양이 다르다. 지금까지 지수가 손가락으로 발동한 방식이 먹물을 듬뿍 묻힌 붓을 휘갈기는 것과 같다면, 만년필을 사용한 발동은 주변에 번지지 않는 얇은 볼펜심으로 긋는 것 같은 깔끔함이 있었다.
다시 말해 정말 최소한의 마력만을 사용해 주문을 발동할 수 있다. 걷거나 뛰면서도 마도 명상을 계속할 수 있는 지금에 와서는, 사실상 마력에 대한 걱정이 없어지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팔짱을 낀 지수가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또한가지 숨겨진 기능이 있는데. 이게 진짜…"
"어, 저거 타겠다. 빨리 뒤집어줘."
서민하가 버너에서 지글지글 익어가고 있는 고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한숨을 쉰 지수는 만년필을 집어넣고 집게를 들었다. 에휴, 얘가 마법사도 아닌데 말해서 뭣 하겠냐. 고깔카페 사람이 봤으면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를 물건인데.
"그래, 많이 먹어라…."
집게를 든 지수는 고기를 구워주느라 제대로 먹지도 못했지만, 딱히 먹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고 그냥 계속 잘라만 줬다. 앉아서 잘라줄 때마다 젓가락으로 찹찹 가져가는 게 먹이라도 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밥을 먹던 서민하가 말했다.
"맞다. 나 오늘 공연인데."
"알아. 보러 갈게."
"그러니까 그게. 영 집중이 안돼서 그러는데."
"뭐가?"
지수가 추궁하는 듯 시선을 보냈지만, 서민하는 계속 꾸물대며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뭐 못할 말이라도 하려는 건가 싶었다. 그리고 이내 지수는 지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서민하의 시선이 어딜 가리키고 있는지 깨달았다. 새빨갛게 물든 서민하의 눈동자가 노려보고 있는 건, 지수의 목덜미였다.
'미친, 흡혈충동이 사라지기는 무슨.'
목덜미를 만지는 지수가 섬뜩해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 * *
밤이 되어 지수와 서민하가 두벅두벅 빌라의 계단을 올라갔다. 방금 막 공연을 끝낸 밴드들끼리 모여 술을 마시기로 했지만, 서민하는 핑계조차 대지 않고 묵묵히 빠져 나왔다.
"뒷풀이 자리 같은데, 너도 가야하는 거 아니야?"
지수가 뒤에서 계단을 올라오고 있는 서민하를 바라보았다. 서민하는 원래 그런 자리에 참석하지 않는 주의였다.
낯을 가린다고 해야 하나, 자기와 친한 사람 이외에는 말을 섞기 싫어했다. 그러면서 외로움은 많이 타니 참 곤란한 성격이었다. 지금까지는 서민하의 그런 면모를 다른 사람들도 그러려니 납득하고 있었지만, 요즈음은 이야기가 달랐다.
서민하의 공연을 보러 오는 청객들은 점점 더 늘어가고 있었다. 인터넷에서 조금씩 입소문도 타고 있었고, 이제는 라이브 하우스의 간판이라고 해도 좋은 입지가 되었다. 조금씩 바뀌어가는 서민하의 노래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다시 말해 뒷풀이의 주인공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너가 빠지면 사람들 김 샐 것 같은데."
"미역 씨도 같이 갈 거야?"
"내가 거길 왜 가? 관계자도 아닌데."
"그러면 됐어."
서민하가 간단한 이야기라는 듯이 머리에 쓴 모자의 챙을 눌렀다. 사실 똑같이 사람이랑 부대끼는 걸 싫어하는 지수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런 면모가 조금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 같이 좀 와달라며."
계단을 올라가는 서민하가 말했다. 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였다. 오늘 할 일을 생각하면 서민하가 옆에 있어 주는 게 안심이 되었다. 옥상에 올라가자 도시의 야경이 보였다. 지수가 바닥에 내려놓은 것은 새까만 등잔이었다.
[정령의 : 호롱불 - 영웅 / 소모품]
흑마녀의 72가지 마도구 중 하나. (넘버 12) 마력을 이용해 불을 붙이면, 파장이 맞는 정령이 이끌려 찾아온다. 다만 찾아온 정령과 교감하여 계약할 수 있을지, 그냥 떠나가버릴지는 호롱불을 붙인 자의 재능과 친화력에 달렸다. 마력의 성질에 따라선 악령에게 공격받을 위험도 존재한다.
이미 호롱불 자체는 분해와 재조립을 끝내고, 부품의 구조를 대강 이해한 뒤였다. 사실 이해했다고 해봤자 이 아이템에 적용된 모든 기술이 지금 지수의 실력 로는 조악하게 흉내 내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사실 뿐이었지만.
아이템의 정보에 쓰여있는 것처럼 만약의 경우 정령 혹은 악령에게 공격받을 위험도 존재했다. 그 정령이라는 놈이 얼마나 강한지 상정할 수 없는 이상, 보험으로 서민하를 보디가드로 데려오는 게 옳은 선택이었다.
"춥네."
서민하가 손바닥에 입김을 호호 불었다. 그 모습이 적잖이 안심이 되었다. 얼마나 날고 기는 정령이라고 해도 자그마치 귀족인 흡혈귀에게 당해낼 수는 없겠지. 그리고 무릎을 꿇은 지수가 등불에 마력을 붙였다. 상당히 고민했지만, 결국 지수가 선택한 것은 보통의 마력이 아닌 파사의 마력을 이용한 점화였다.
"대체 뭐가 나올까…. "
지수의 마력을 머금은 정령의 호롱불은,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는 불꽃을 일으켰다.
이제는 정령인지 뭔지가 찾아오기를 기다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