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 그놈의 척멘은 진짜 (5) >
앉아있는 흑발의 여자가 시원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번에 선물해드린 책. 잘 받으셨나 해서요.”
테이블에 앉아있는 지수가 침을 꿀꺽 삼켰다. 여자가 말하는 책은 아마도 몬스터 백과일 것이다. 말하는 것을 보니 그녀는 고깔 카페의 운영자였다. 그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수가 마법사라는 걸 한눈에 간파한 것 또한, 대단한 실력의 마법사인가 보다 하고 받아넘길 수 있었다.
지금 정말로 문제가 되는 건 한 가지 뿐이었다.
‘내가 척척박사라는 걸 알고 있어….’
지수의 얼굴에 식은땀이 흘렀다. 흑발의 여자는지금 척척박사의 정체가 지수라고 확신한 채 다가왔다. 들켜버린 건가. 무엇을 근거로? 어떻게 해서? 언제까지고 숨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일러도 너무 이른 타이밍이었다.
지수는 최대한 태연함을 가장하며 침묵을 지켰다. 사실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어쩌면 그냥 한 번 떠보는 것일지도 몰랐다. 섣불리 긍정하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입을 다물고 있는 지수에게 아랑곳않고, 여자가 음료를 주문했다.
“여기, 아삼 티 라떼로 한 잔 주세요.”
"•••홍차 취급 안 하는데요.”
“어. 그럼 녹차라떼로 부탁드릴게요.”
주문을 받은 서민하가 인상을 쓴 채 성큼성큼 카운터로 돌아갔다. 접객 태도가 최악이라고 클레임이 걸려도 할 말이 없을 표정이었다. 하지만 별로 신경쓰지 않는지, 흑발의 여자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지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질문했다.
“근데 왜 남자세요?”
'네?”
지수가 황당해서 되물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온갖 경험을 해보게 되는 법이지만 하다 하다 성별 가지고 시비를 걸리게 될 줄은 몰랐다. 왜 남자냐니. 유감스럽게도 엑스 염색체와 와이 염색체가 결합해버린 탓에 이렇게 돼버렸다고 대답하면 되나? 눈썹을 찌푸린 여자는 지수를 면밀히 관찰했다.
“정체 때문에 변신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네요. 성흔은 어딨어요? 목덜미에 문신은 딱 봐도 다른 계약이고..”
"성흔…이라는 게 무슨 소립니까?”
“마녀의 성흔 말이에요. 척척박사 님 마녀잖아요?”
"마녀란 게 뭡니까.”
지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심정을 그대로 담아 대답했다. 그 말에 여자의 인상이 조금 찌푸려졌다. 이야기가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깨달은 듯 했다. 그리고 여자가 한 번 눈을 번뜩이자, 끝을 알 수 없는 늪 같은 무언가가 지수의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놀란 여자가 입을 벌렸다.
“뭐야. 진짜 없잖아. 어디다 숨겼어요? 왜 없어요!”
“아니 정말로. 무슨 말씀 하시는 질 모르겠는데….”
“거짓말 하지 말아요! 마녀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지식들을 다 알아요! 빨리 고백하세요! 자기가 백마녀라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여자가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범인에게 자백을 종용하는 탐정 같았다. 차분한 분위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쉽게 냉정을 잃어버리는 성격인 듯 했다. 여자의 흥분을 가라앉힌 건 음료를 가지고 온 서민하였다.
"…가게 안에서는 조용히.”
서민하가 테이블에 접시를 쿵 내려놓았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는 얼굴은 무표정었지만,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눈동자가 새빨갛게 변할까 말까 하고 있었다. 그 말에 흑발의 여자는 큼큼 헛기침을 하더니 냉정을 되찾고 자리에 앉았다.
“이상하네. 당연히 다섯 번째 마녀의 등장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면 그 지식량이 설명이 안 되는데… 심각한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눈앞에 앉아있는 지수가 마녀가 아닌 건 확실하다고 자신의 안에서 납득을 끝낸 듯 했다. 그리고 그녀가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뭘 어떻게 하시게요.”
지수가 식은땀을 흘리면서 되물었다. 지수가 필사적으로 이해한 상황은 이러했다. 여자는 지금 무언가를 착각 해서 지수한테 찾아온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이 착각이었다는 게 방금 밝혀졌다. 소설에서는 보통 이런 장면 다음에 비밀을 알았으니 당신을 제거해야 되겠다는 대사가 나오곤 했다.
하지만 여자가 하려는 말은 그런 게 아닌 듯 싶었다.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눈썹을 까닥인 여자가 지수에게 말했다.
“회원 신상조사하기 금지. 카페 규정 위반이잖아요."
"아….”
"정말 참. 마녀면 어차피 발푸르기스의 밤 식구가 될 테니 그 정도 사소한 문제는 넘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 진짜 꼼수 없이 그 이론들을 다 정립했다고요?”
여자가 두통을 느끼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계산이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틀어져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는 표정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여자가 바로 옆의 허공에 손을 쑥 집어넣었다. 아공간 포켓이었다. A급 중에서도 최상위의 헌터들만이 가지고 있다는, 개인에게 귀속되는 고유 창고.
“일단 이거, 사죄의 표시로 받아주실래요?”
그리고 여자가 비어있는 공간에서 꺼낸 것은, 고급스러운 문양이 각인되어 있는 고깔모자 모양의 새까만 등잔 이었다. 지수는 여자가 내민 검은 등잔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연금술과 마도학 양쪽에 소양이 있는 지수이기에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마력으로 작동하는 어떠한 종류의 마도구였다.
“혹시 연금술로……"
"역시 척 하면 척이시네요.”
완전히 질렸다는 듯 흑발의 여자가 웃었다. 지수가 천천히 등잔을 살펴보자, 아이템의 정보가 떠올랐다.
[정령의 호롱불 - 영웅 / 소모품]
흑마녀의 72가지 마도구 중 하나. (넘버 12) 마력을 이용해 불을 붙이면, 파장이 맞는 정령이 이끌려 찾아온다. 다만 찾아온 정령과 교감하여 계약할 수 있을지, 그냥 떠나가버릴지는 호롱불을 붙인 자의 재능과 친화력에 달렸다. 마력의 성질에 따라선 악령에게 공격받을 위험도 존재한다.
“이건……"
“척척박사 님 수준의 마법사라면 별 도움이 안 되겠지만, 지금 드릴만한 게 이것밖에 없어서. 그래도 이걸로 저도 정체를 공개했으니, 부디 쌤쌤이라는 걸로 부탁드려요.”
지수가 미묘한 표정으로 눈앞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척척박사 님 수준의 마법사에겐 별 도움이 안 될 거라고? 이건 오히려 지수의 수준을 한참 넘어서있는 물건이었다. 대체 이쪽을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지 궁금했다. 지수의 얼굴을 살핀 흑발의 여자가 알았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 시선은……부족하다는 뜻이군요? 하긴 먼저 잘못을 한 건 이쪽이니까, 명분을 잡았는데 쌤쌤이 정도로 끝내면 그게 바보죠. 정말 비싸신 분이네요. 알겠어요, 자.”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난 흑발의 여자가 양팔을 벌렸다. 의도를 알 수 없는 행동에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흑발의 여자가 빨리 오라는 듯 연신 어깨를 으쓱였다.
“무슨...."
"포옹이요, 포옹. 빨리 해주세요."
지수가 무슨 괴상망측한 무언가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자, 걸어온 여자가 지수의 어깨를 꽉 껴안았다. 멀찍이서 이쪽 테이블을 바라보고 있던 서민하가 얼어붙었다. 다른 손님을 상대하고 있던 여주인도 그런 걸 감지하는 센서라도 있는 건지 휙 고개를 돌리더니 꺄 소리를 냈다.
‘미친 사람인가?’
진지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너무 당황스러워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갈피가 안 잡혔다. 그러고 있기를 1초, 2초, 3초. 이내 정색하고 있던 지수에게서 여자가 몸을 떼어냈다. 그러자 지수의 눈앞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흑마녀의 포옹’이 발동됩니다. 일주일 간 마력이 25% 증가하고, 모든 기술의 숙련 속도가 50% 증가합니다. 이 효과는 비약 및 보조 스킬의 효과와 별도로 적용됩니다.〉
“이거, 한 달에 한 번 밖에 못 써주는 건데.”
그리고 다시 자리에 앉은 흑발의 여자는 녹차를 홀짝이며 좋은 가게네요, 하고 감탄했다. 알림창의 안내를 확인한 지수는 어이가 없는 걸 넘어서 공포심이 들 수준이었다.
포옹 한 번 해줬다고 마력 증가율이 25퍼센트에 숙련 속도가 뭐 ?
"……사기야.”
"겸손하시긴. 뭘 저희 사이에 숨기고 그러세요. 억누르고 있는 마력이 그 정도라면, 그쪽도 상당한 괴물이잖아요?"
흑발의 여자가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여자는 지금 서민하와의 계약으로 증폭된 지수의 마력을, 기척을 지우려 억눌린 상태라고 판단하는 것 같았다. 적어도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척척박사’라는 마법사의 이미지는 그러했다.
"아무튼, 마음에 드신 것 같아 다행이네요. 그러면.”
자리에서 일어난 흑발의 여자가 지수에게 악수를 내밀었다. 이걸로 지수의 뒤를 캐낸 건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 주고, 화를 풀어 화해해달라는 의미가 담긴 악수였다. 지수가 손을 내밀자, 붙잡아 위아래로 한 번 흔든 여자가 웃었다.
“그러면 앞으로도 고깔에서의 활동, 잘 부탁드릴게요. 척멘 !”
그놈의 척멘은 진짜.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이내 음료의 계산을 한 여자가 뚜벅뚜벅 계단을 올라갔다.
그녀는 잠깐 나타났던 신기루였던 것처럼 유유히 사라졌다. 그녀와 교대하듯이 계단에서 내려온 건 김혜성이었다. 테이블에 다가온 그의 얼굴은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여기 혹시 S급 던전이라도 나타났냐?”
"네?”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지수의 말에 김혜성이 휘휘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잘못 본거라면 다행인데. 방금 마주친 인간, 우리 길드 지명 수배범이랑 뒷모습이 비슷한거 같아서….”
귀신이라도 봤다는 듯 창백한 얼굴이 된 김혜성이 식은땀을 닦고 음료를 주문했다.
***
그늘이 져있는 어두운 방 안. 자리에 앉아있는 한 명의 남자가 있었다. 그 옆에 서있는 인영들은, 전부 새까만 제복으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다름 아닌 집행부의 제복이었다. 서있는 셋은 가면을 쓴 채 흉흉한 안광을 흩뿌리고 있었다. 그들의 몸에서 인간의 것이 아닌 마력이 풀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면, 늑대와 조우한 것 같다는 그 실험체는.”
까마귀 가면을 쓴 남자의 질문에, 앉아있던 협회장이 대답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내버려두는 편이 낫겠지. 어차피 실패작이다. 얼마 안 가 이성을 잃고 괴물로 떨어져서 소란을 피우겠지. 그렇게 되면 알아서 헌터들한테 토벌될 거다. 일반인들의 희생은 조금 나오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깔끔하게 증거를 인멸하고 싶기도 했고, 데이터를 얻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지금 상황은 이미 그럴 단계를 지나있었다. 집행부에서도 가장 압도적인 전투력을 자랑하던 그 놈. 정유현이 본격적으로 협회에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늑대는 분명히 역대 최강의 집행부원이지. 그 괴물 같은 놈을 이길 가능성이 있는 건 지금은 집행부를 탈퇴한 폭탄마 정도밖에 없을걸. 하지만 그건 순수한 각성자로서만 평가했을 때의 이야기야. 너희들은 각성자의 ‘다음 단계’에 있다.”
자리에서 일어난 협회장이 말했다.
“늑대가 괴물 같은 각성자라면, 너희는 진짜 괴물이 됐다. 방식은 맡기지. 격의 차이를 보여줘라. 정면에서 힘으로 짓눌러버려.”
정유현을 제외한 사천왕 전원이 그를 제거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협회장이 떠올린 것은 한명의 집행부원이었다.
늑대의 측근이라 생각되는 병정이나, 다른 집행부원들이 아니었다. 막 아르바이트로 들어와 실적을 올린 청년.
‘확실해…. 그 놈은 이레귤러다.’
협회장은 '박사'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능력에 대해선, 보안을 뚫는 스킬이나 무언가를 조작하는 스킬 이라는 둥 수많은 추측이 가능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정보전에 있어서 커다란 변수가 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것.
그러한 변수는 내버려둘 수 없었다. 어차피 각성한 지도 얼마 지나지 않은 풋내기. 전투능력은 거의 없을 것이다. 죽이는 건 간단했지만, 문제는 그의 뒤에 불식 길드가 서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협회가 손을 댔다간 일이 귀찮아진다.
‘아직은 백묵과 부딪칠 수 없어. 아직은….’
하지만 걱정은 없었다. 협회가 손을 댈 수 없다면 걱정 없는 외부의 인력에 부탁하면 그만이다. 굉장한 재능을 가진 풋내기 각성자. 그런 소재를 보면 미치고 팔짝 뛰며 알아서 죽여줄 편리한 자식이 한 명 있었다. 협회장이 할 것은 그 탐욕스러운 각성자 사냥꾼에게 미끼를 던져주는 것 뿐이었다.
"이 미친놈이랑은…최대한 얽히고 싶지 않았는데.”
하긴 일처리는 확실할 테니까. 콧숨을 내쉰 협회장이 손에 들고 있는 종이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 종이의 구석에는, 등에 커다란 관을 맨 채 꼭두각시를 조종하고 있는 한 각성자의 사진이 클립으로 찝혀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