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규격외 등급 해석사-37화 (37/176)

37화.  < 그놈의 척멘은 진짜 (3) >

벌떡 일어난 전승민이 섬뜩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누가 포인트 배달 상자라고?”

“아뇨, 그게 아니고. 앉으세요 일단.”

지수가 본의가 아니라는 듯 쓴웃음을 지으며 양손으로 진정하라 제스처를 취했다. 솔직히 다른 응시자들 포인트를 싹 다 모아서 지수한테 두 번이나 가져다주었던 것이 너무 인상깊었던 탓에, 생각나자마자 입 밖으로 튀어나와버렸다.

그 말에 쯧 혀를 찬 전승민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흥. 발끈하는 것도 어른스럽지 못하지. 떠들고 싶으면 마음대로 떠들어라. 어차피 미숙했던 시절의 일이야. 이제 와서 그런 걸로 화낼 만큼 속이 좁지는 않으니까. ”

‘이미 화낼 거 다 화내놓고. ’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번에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자리에 앉은 전승민은 안주머니에서 동그란 뿔테 안경을 꺼내 썼다. 집행부에서 지나가다 들은 적이 있었다. 동그란 안경은 척척박사를 추종하는 마법사들의 상징 비슷한 것이라고. 그렇다는 건 설마 전승민도. 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때의 나라고 생각하지 마라."

호승심에 불타오르는 얼굴을 지은 전승민은, 앞으로 내민 손을 주먹으로 꽉 쥐었다. 헌터 라이센스 시험 때 있었던 패배를 상당히 의식하고 있는 듯 싶었다. 어서 빨리 지수와 다시 결판을 내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하다는 태도였다.

“척척박사 씨의 강의를 보고, 몇날 밤을 새며 이해하려 노력했다. 그 결과 내 마법은 몇 단계나 성취를 이뤘어. 단언하지. 지금 다시 승부한다면, 이기는 건 내 쪽이다.”

"아, 척척박사 씨요….”

“그래. 너도 알다시피 세계 최고의 마법사지.”

팔짱을 낀 전승민이 같은 카페 회원으로서 자랑스럽다는 듯 턱끝을 치켜세웠다. 지수의 입가가 부르르 경련했다. 어떤 표정으로 뭐라 반응을 해줘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지수를 구해준 건 터벅터벅 다가온 또 한 명의 마법사였다.

"거기선 말만으로라도 스승님을 치켜세워줘야지. 이 배은망덕한 놈이.”

다가와 전승민에게 꿀밤을 먹인 건 김혜성이었다. 불식 1 팀의 부팀장이자 현역 최강의 마법사 중 한 명. 유명인사 중 유명인사인 그 또한 이곳에 와있을 줄은 몰랐다. 마법사들 중에서도 김혜성을 아는 인간들은 많은 모양인지, 이쪽을 유심히 보고 있는 시선들이 있었다. 지수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저번에 만나고 바로 또 뵙네요. ”

불식 길드의 창고에서 용의 혈정을 꺼낼 때 만났으니 정말 얼마 안 돼서 재회하는 꼴이었다. 생각해 보니 김혜성과 사적인 자리에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처음 만났을때부터 저번까지, 지수와 김혜성이 얼굴을 마주대한 건 불식의 동맹과 1 팀의 부팀장으로서 비즈니스 관계의 자리 뿐이었다.

"그래. 얘가 또 와서 괜히 시비 털지는 않디?"

“이 자식! 이거 놔!"

전승민의 귀를 잡아당기고 있는 김혜성이 말했다. 그리고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는 듯, 전승민을 자리에서 질질 끌고 갔다. 끌려 가던 전승민은 마지막 발악으로, 앉아있는 지수에게 라이센스 카드를 내보였다. 적혀있는 랭크는 E급이었다. 라이센스를 딴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미 한 단계 승급을 끝냈다는 뜻이었다. 전승민이 마지막 말을 남겼다.

“빨리 올라와라.”

너만이 내 유일한 라이벌이라는 듯이 전승민이 말을 남겼다. 그 말에 지수는 가만히 앉아 쓴웃음을 지었다. 지수의 라이센스 카드는, 이미 두 단계 승급해 D급이었다.

전승민과 김혜성이 멀찍이 사라지자, 그제야 대걸레로 같은 곳 바닥만 몇 분 동안 닦으면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던 서민하가 걸어 왔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서민하는 테이블 옆자리에 푹 주저앉더니, 추궁하는 어조로 물어왔다.

"……누구?”

"같이 시험 쳤던 동기인데.”

"그런데 왜 존댓말을 써.”

“난 원래 만나는 사람한테 다 존댓말 해.”

지수가 빨대로 레모네이드를 쪽 빨며 말했다. 사실 서민하처럼 존댓말 쓰지 말라고 박박 우기는 특이한 경우가 아니면 지수는 누구에게나 존댓말을 쓰는 편이었다.

예의상의 문제 말고도, 그냥 지수가 그쪽이 더 편했다. 많이 화났을 때나 도저히 존댓말을 써줄 만한 인간이 아닐 때는 별개였지만.

그러고 보니 서민하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수에게 반말을 내뱉고 있었다. 이쪽이 연상인 게 확실한데도 거침없이 초면에 반말을 내뱉었다. 정반대의 성향이나 마찬가지였다. 지수의 대답을 들은 서민하가 멀리 다른 곳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면 누구한테 반말 해?”

“너한테밖에 안 쓰는데.”

지수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곰곰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요즘 만나는 사람들 중에 지수가 반말을 쓰는 건 서민하에게 뿐이었다. 그 말에 서민하는 기분이 나쁜 것인지 좋은 것인지, 기묘하게 입가를 일그러뜨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휙 고개를 돌리고 모자를 푹 눌러 쓴 채 저쪽으로 걸어갔다.

"쟤는 또 왜 저래. 삐졌나.”

지수가 턱을 괸 채 남은 레모네이드를 마셨다. 갑자기 와서 갑자기 가버리고, 이상한 녀석이었다.

‘그건 그렇고. 이거 좀 민폐 같은데……'

스마트폰을 든 지수가 한숨을 쉬었다.

카페를 살펴보자 고깔의 인간들은 이 라이브 하우스의 위치를 알아내, 성지순례니 번개니 스터디니 하며 별에 별 글들을 올리고 있었다. ‘김혜성 떴다’라는 글까지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있는 지경이었다. 이곳은 음악을 즐기러 오는 장소다. 이런 식으로 손님이 모여드는 건 여주인도 원치 않을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기 전에, 이쪽에서 뭔가 수습을…’

하고 고개를 돌려보니, 좋아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음료를 만들고 있는 여주인이 보였다. 여주인은 서빙하며 어머 어머 참 하고 손님들 어깨까지 때리면서 밤의 라이브 티켓 영업을 하고 있었다. 혹시 그냥 내버려둬도 되는 건가?

지수가 자리에서 턱을 괸 채 어깨를 으쓱였다.

밤이 되어 라이브가 시작되었다. 무대는 수용인원 문제 때문에 좌석식에서 스탠딩식으로 바뀐 채였다. 고깔 카페의 마법사들이 매장에 방문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많아 봐야 열 명쯤 되는 소수 인원이었다. 요즈음 이곳 라이브 하우스가 크게 입소문을 타고 있는 또 한 가지 요인이 있었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

“사 랑 한 다 서 민 하! 우 윳 빛 깔 서 민 하! ”

무대에 그녀가 나오자 가게 안의 분위기가 한껏 달구어졌다. 드럼 소리와 함께 그녀의 음악이 시작되었다.

예전과 똑같이 서민하의 무대는 마지막 순서였지만, 이유는 정반대나 마찬가지였다. 듣는 사람들만 듣는 하드코어한 음악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곳 라이브 하우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무대이기 때문이었다. 즉 끝까지 사람들을 묶어두기 위한 역할이었다. 그만큼 서민하의 노래는 완전히 달라졌다.

마치 번데기가 우화한 것처럼. 그곳엔 사람을 매료시키는 풍부한 무언가가 있었다. 서민하의 팬들은 한 번 무대를 거칠 때마다 일파만파 퍼져나가고 있었다. 조금만 있으면 이 라이브 하우스가 비좁아서 터져버릴 판이었다.

‘매료라고 하니까, 저거 설마.’

형형색색의 조명에 감싸여있는 서민하를 바라보며, 지수가 한 가지 가능성에 침을 삼켰다. 어쩌면 지금 서민하에게 카리스마나 매력으로 인간들을 휘어잡는, 흡혈귀의 특성이 발현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의 노래였다.

‘저러다 메이저 데뷔하는 거 아냐.’

팔짱을 낀 채 노래를 듣는 지수가 피식 웃었다.

일주일 쯤 지나자 무언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느 동네 구석. 인적 없는 뒷골목의 거리에, 마법사들이 모이는 가게가 있다는 입소문이 은밀히 퍼져나갔다.

정보에 민감한 인사들은 재빨리 그 가게를 수배해 마법사들과 라인을 맺기 위해 몰래 방문했고, 가게 안에서 아는 얼굴을 만나면 모르는 척 시치미 뚝 떼고 이런 곳에서 다 만나네 악수를 건넸다. 평소부터 음악을 좋아했던 척 하면서.

그 결과가 바로 저것이었다.

무슨 수업이라도 하는 것처럼 여주인을 중심으로 앉아있는 아저씨들이 노트에 무언가를 열심히 필기하고 있었다. 여주인이 설명 하고 있는 건 라이브 하우스에서 취급하는 음악과 장르에 대한 이해, 그리고 관련 용어들이었다.

업계의 인사들은 그 모든 것들을 철저히 암기해서 대화에 어울리기 위해 여주인이 떠드는 이야기들을 진지하게 메모하고 있었다.

그들이 개인적으로 시간을 내달라고 여주인한테 부탁해서 배우고 있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비즈니스를 위한 교양이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지수는 한숨을 쉬었다.

“저 인간들 뭐야. 단체로 작업이라도 걸고 있는 건가.”

"아니, 그런 거면 오히려 걱정할 일 없겠는데….”

옆에서 대걸레질 하고 있는 서민하의 물음에, 지수는 두통이 인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아저씨들은 선생님, 선생님 하고 악수까지 청하며 마지막까지 허리를 숙인 채 떠나갔다. 정말 열심히 하는사람들이었다.

"뭔가 죄송하네요."

"아냐, 아냐. 저렇게 열정적인 손님들은 오랜만이라 나도 즐거운걸. 손님들을 끌어와줬으니 이쪽에서 고맙다 해야지~”

여주인이 팔꿈치로 툭툭 장난스럽게 지수의 어깨를 찔렀다. 이 동그란 뿔테 안경을 쓴 수상한 인간들의 모임으로부터 시작된 일련의 흐름이, 모두 지수에게서 비롯된 거라고 이미 눈치채고 있는 듯했다. 역시 허투루 가게를 경영해온 건 아닌 모양인지, 상황을 살피는 능력이 훌륭했다.

그리고 지수가 일어나 가져온 물건을 꺼내었다.

"이거, 받아주세요.”

지수가 허리를 숙이며 여주인에게 선물을 건네어주었다. 그것은 예쁘게 포장되어있는 찻잎이었다. 지수 나름대로 가게에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없을까 생각한 사과의 표시였다. 일단 시중에서 구할수 있는 찻잎 중에서는 거의 최고급에, 지수의 비법인 활력의 룬과 파사의 마력으로 정화와 생기 활성을 거듭해 몇 단계 더 품질을 올린 물건이었다.

재료를 가지고 올 때마다 녹차를 한 잔씩 홀짝이는 윤나연의 말로는, 차를 끓이는 데에 별 소양이 없는 지수 손으로 끓인 차도 진짜 엄청나게 맛있다고 했었다. 제대로 차를 끓일 수 있는 사람이 사용하면 더 훌륭한 차를 우릴 수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지수의 자식같은 찻잎들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어머, 무슨 이런 걸 또."

여주인이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찻잎을 받아들었다. 그녀 또한 요즈음 높은 연령대 손님들이 자주 찾아오는 까닭에, 칵테일이나 음료 말고도 차 종류를 좀 더 구비해놔야겠다 생각하던 중이었다. 상당히 센스가 있는 선물이었다.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아보니 상당한 상등품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고마워, 우리 지수밖에 없네. 잘 쓸게~”

그렇게 말한 여주인이 찬장에 지수가 선물한 찻잎을 소중히 넣어두었다. 그게 무언가 못마땅한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던 서민하가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로 말했다.

"……나도 줘.”

“뭘 줘. 너한테는 맨날 끓여주잖아, 녹차.”

"그게 아니라, 선물 달라고.”

서민하의 말에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라이브 하우스에는 조금 민폐를 끼쳤으니까 찻잎을 선물한 거고, 서민하에게 선물 같은 걸 줄 이유는 전혀 없었다. 뭐 생일이나 그런 거라면 몰라도. 그렇게 생각하던 지수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이것은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수가 미끼를 던졌다.

큼큼, 한 번 헛기침을 하고 조금쯤 농담 같은 어조로.

"……뭐, 내 피라도 빨게 해줘?”

옆에 들리지 않게 슬쩍 속삭인 지수의 귓속말에,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있던 서민하가 벌떡 일어났다. 흡혈충동은 없어졌다더니 그녀의 반응은 격렬했다. 말 한 마디 건넨 것만으로 서민하의 눈동자가 새빨갛게 변해있었다.

“진짜로? 빨게 해줄 거야?”

"야, 야. 눈…!"

"농담하는 거 아니고?”

지수는 누가 볼세랴 당황하며 눈동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서민하가 진정한 것은 몇 초나 지나서의 일이었다.

***

"……그러면 이의는 없는 걸로 괜찮겠지?”

통째로 빌린 고급 세미나실 안, 가운데 앉은 중년의 발언에 자리에 앉아있는 남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의 주제는 한 매장이었다.

마법사라는 희귀 인종들이 몇 명이나 나타나는 가게가 있었다. 그곳에 앉아 밀정들까지 심어가며 마법사들의 이야기를 필사적으로 엿듣고 알아낸 키워드가 몇 가지 있었다. ‘척멘’이니 ‘척이루’니 하는 건 당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분명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두 가지 단어가 있었다.

‘성지’와 ‘학파’,

즉 그 가게는 모여있는 마법사들에게 있어서 어떠한 의미가 있는 공간이며, 그냥 아무 이유도 없이 우연히 그 가게에서 모이게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 그것은 그 가게에 투자하는 것이 결코 손해를 볼 수가 없는 장사라는 뜻이었다.

그들 사이에서는 이미 그 가게의 미래에 대한 전망들이 그려지고 있었다. 그 김혜성을 비롯해 가게의 단골이 된 마법사들과, 그런 마법사들과의 관계를 맺기 위해 찾아온 헌터 업계의 고위층들. 아직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런 꼴이다. 조금 있으면 아마 냄새를 맡고 온 각계의 인사들로 북적일 것이다. 그 전에 가게 안에서의 발언 주도권을 획득해야 했다.

"그보다 우리가 답답해서 좀 넓혔으면 좋겠네 ”

"나는 그냥 마법사 걔네 문제 아니어도 거기 단골 될 것 같다니까. 어? 이모님도 얼마나 이쁘셔, 친절하시고. 음료도 맛있고 좁은 것만 빼면 다 좋은데 진짜.”

“그래. 다 좋은데, 작업 걸다가 일 망치진 마라.”

“공사 구분은 합니다 이 양반아. 그래서 도장 꺼내?”

시선을 교환한 남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날, 라이브 하우스 ’라드’ 매장의 확장을 위한 출자 제의에 남자들 전원이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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