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 그놈의 척멘은 진짜 (2) >
지수는 불식의 응접실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것은 다름 아닌 백묵이었다. 길드장에게 직접 브리핑을 받는 것은 비밀 유지 문제 때문이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우선 마법사 하나를 섭외해 더미로 세워놓았다. 누군가 네 정체를 캐내려는 놈이 있다면 정황상 그 녀석 쪽에 도달할 수밖에 없도록. 임시조치일 뿐이지만 이쪽이 대응할 시간만 벌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니까."
일종의 보험 또는 경보기인 셈이었다. 일부러 미끼를 세워두고서 그걸 문 물고기들을 철저하게 사냥한다. 지수 개인으로서는 불가능한, 불식이라는 거대한 조직과 협업하고 있기에 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콧숨을 내쉰 백묵이 말을 이어갔다.
"전에도 말한 거지만, 역시 A급 정도는 되지 않으면 이야기가 귀찮아져. 이번에 C급까지 올라왔다고 했던가? 괜찮은 속도다만 더 빨리 올라오도록 해. 조급해 할 필요가 있어."
지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백묵은 간단히 말하고 있지만, A급이라면 현역 헌터들 중 최강자들이나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자면 정유현이나 불식 1팀의 멤버들 수준의 강함. 도달하려고 해서 도달할 수 있는 등급이 아닌데, 백묵은 지수가 몇 년 내에 A급이 될 것을 전제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백묵이 비즈니스에 대한 브리핑을 시작했다.
지수 앞에 놓여져있는 보고서엔 여러 가지 예측들과 함께 수많은 그래프들이 그려져있었다. 솔직히 이 자리에서 수십 장 짜리 분량을 전부 읽어볼 수는 없었고 우선은 겉핥기로 훑어보며 결론 쪽만을 살펴보았지만, 불식 길드가 지수의 서포트에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두 가지 전략을 요약하자면 그것이었다. 중견 길드들을 고객으로 삼는 것과, 고위 길드들만을 대상으로 서비스하는 것. 전자의 경우 업계에서 압도적인 인지도를 갖는 것이 강점이었고, 그에 반해 후자는 일감 하나하나마다 큰 금액을 받을 수 있고, 업계 고위층과 직접적인 라인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번 사업에서 불식은 말 그대로 중개역일 뿐이니까. "
결국 지수가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빈도나 쓸 때마다 지불해야 할 대가에 따라 어떤 방식을 취해야할 지가 달라지니, 지수가 직접 방향을 선택하라는 것이 백묵의 말이었다. 그 말에 소파에 앉아있는 지수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거 없는데. ’
백묵은 지금 지수의 해석을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사용하는 비장의 스킬 같은 것이라 오해하고 있었다. 사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던전 정보를 읽는다는 건 그만큼 파격적인 능력이었다. 하지만 지수의 해석 스킬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대가고 뭐고 그냥 보기만 하면 읽히는 것이다.
솔직히 마음만 먹는다면 하루 종일 던전 정보들만 계속 읊어줄 수도 있었다. 그런 지수를 보며 백묵이 말을 이었다.
"효율을 따진다면 최대한 적게 서비스하는 게 이득이겠지. 길드들은 위쪽으로 올라올 수록 경쟁이 치열하니까, '다른 길드들은 알지 못하는 정보를 우리만 독점할 수 있다'는 건 무슨 수를 써서든 확보하고 싶은 메리트가 될 거다."
그 말에 지수는 불식 길드가 왜 최저한의 수수료만을 받고, 용의 혈정이나 되는 물건을 계약금 명목으로 선뜻 넘겨주었는지 이해했다. 그런 길드들의 동향과 정보들을, 불식은 중개역에 서는 것만으로 전부 수중에 넣게 된다. 그리고 불식에는 그 모든 걸 제대로 활용할 수 있을 만한 역량이 있었다.
‘서로, 철저히 이용하는 관계인가.‘
지수가 턱을 쓰다듬었다. 별로 그것이 기분 나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안심과 신뢰가 느껴졌다. 호의 같은 것에 기반한 협력이 아니라, 서로의 필요에 따라 맺어진 협업. 동맹으로서는 이상적인 구도라 할 수도 있었다.
"그래. 그리고 적당한 이름도 하나 생각해둬라. 익명이라고 해도 어마어마한 네임 밸류를 갖게 될 테니까."
그 브랜드 가치로 얻을 수 있는 이득들을 생각하면, 서비스 공급자의 이름을 대길 포기하는 건 말도 안 된다. 그것까지 불식에 양도하겠다면야 1할의 중개료도 포기해줄 의향이 있다만. 피식 웃은 백묵에게 지수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쪽의 문제에는, 언제나 쓰는 닉네임이 있었다.
…응접실을 나와 복도를 걷고 있자, 뒤에서 어깨동무를 걸쳐오는 사람이 있었다. 새빨간 색의 넥타이에 정장을 쫙 빼입고, 얼굴에는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남자였다. 눈이 마주쳐 씨익 웃는 오성화에게 걷고 있던 지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뭔가 좀,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요."
"같은 게 아니지. 오랜만에 보는 거 맞잖아. 그 인간한테 이야기 다들었어. 집행부에서 요즘 장난 아니라며."
아마 오성화가 말하는 그 인간이라는 건 정유현을 말하는 듯 했다.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지수의 생각에 정유현은 그리 입이 가벼울 것 같은 인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라 해도 좋았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이야기를 들었다는 거지?
서민하와 관련된 이야기인가, 그게 아니면 정유현과 싸웠던 이야기? 설마 집행부 내부에서 준비하고 있는 반란인지 뭔지 하는 걸 오성화에게도 상담하고 있는 건가? 지수가 슬쩍 오성화의 눈치를 살피자 오성화가 환하게 웃었다.
"벌써 C급 됐다며? 진짜 초고속 승급 아니야? 협회에서도 주목하고 있다고. 사실 처음 봤을 때부터 나는 지수가 잘 나갈 거 그냥 딱 알았다니까. 한 번 축하로 같이 샴페인 따야지."
오성화가 들뜬 어조로 말했다. 아, 그쪽 이야기인가. 지수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성화는 그냥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축하해주고 싶은 듯했다. 하긴 저번에 용혈을 가지러 갈 때 김혜성과 만났을 때도 지수가 연락을 안 해서 섭섭해하고 있다던가 하는 말을 했었다.
그게 아니면 오성화처럼 바쁜 사람이 이렇게 딱 맞춰서 지수를 기다리고 있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웃고 있는 오성화의 얼굴에 조금쯤 진지한 기색이 내비쳤다.
"그리고, 집행부에 관해서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고."
그런 분위기를 내비친 건 아주 잠깐이었고, 한 순간 뒤 오성화는 다시 쾌활한 분위기로 돌아왔다. 그리고 오성화는 태워다주겠다며 지수와 주차장까지 걸어갔다. 새빨간 색의 코브라는 정성 들여 관리하고 있는지, 신차처럼 윤기나는 광택이 흘렀다. 지수를 태운 채 도로를 달리는 성화가 말했다.
"스케줄은 어떻게든 맞춰볼 테니 일정 비는 날 좀 알려줘."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단순한 축하가 아니라, 무언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 또한 있는 모양이었다. 사람과 사적인 자리에서 어울리는 건 그리 좋아하지만,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사양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다. 지수는 알겠다 고개를 끄덕이고 다음주 중에 한 번 날을 비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오자 옆방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들의 발소리와 바닥에 무언가가 끌리는 소리, 뭐라뭐라 지시하는 목소리들이 한 데 섞인 채 벽을 넘어 들려왔다. 그냥 방음이 잘 안 되는 수준이 아니라, 벽에 귀를 갖다대기만 해도 옆방의 대화를 전부 엿들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프라이버시를 중요하게 여기는 지수에게는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 입지였지만, 어차피 지수가 방에 친구들을 데려와 떠드는 것도 아니고 이웃 중에 한밤 중 시끄럽게 구는 민폐쟁이도 없었기에 별 생각 없이 지내고 있는 중이었다.
'누가 또 이사왔나 보네.'
문을 연 지수가 복도 쪽에 고개만 빼꼼 내밀고 옆집을 살펴보았다. 예상한대로 그곳에선 현관문을 열어둔 채 업자들이 짐과 가구들을 실어나르고 있었다. 몇 달 비어있더니 드디어 누가 들어온 듯 했다. 지수는 슬리퍼를 신고 복도로 나왔다.
그야 바로 옆집이라면 인사 정도는 해두는 게 좋을 것이다. 붙임성이 좋은 성격이라기보단 필요 없는 트러블을 일으키지 않기 위한 처세술이었다. 혹시 조금 이상한 사람이 들어온 것 같다면 미리 대비하기 위한 정찰의 의미 또한 있었다.
지수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옆집에 다가섰다. 그리고 방 안. 그리고 업자들에게 지시하고 있는 사람은 지수 또한 잘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지수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병정 씨?"
"어, 박사. 잠깐만, 이거 도배 좀 시켜야 해서."
영문을 모르겠다. 지수가 작게 인상을 쓰고 이사하고 있는 옆방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뒤에서 툭, 누군가 주먹으로 지수의 등을 약하게 때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파스슥거리는 비닐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지수가 고개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기타 가방을 매고 있는 서민하가 있었다.
"이거, 받아."
"응?"
서민하가 지수에게 들고 있던 비닐을 넘겼다. 얼떨떨해하며 받아든 지수가 비닐을 열어보았다. 서민하가 주먹을 꽉 쥐고 내밀었던 새까만 비닐 안에는, 동네에서 막사온 듯한 시루떡이 들어있었다. 갑자기 웬 떡?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지수의 머릿속에서 모든 상황의 퍼즐이 맞추어졌다.
"……설마.”
추리라고도 할 수 없는 간단한 추론이다. 보통 생활에서 남한테 시루떡을 선물하는 경우는 그런 것이었다. 지수는 설마 그건 아니겠지 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서민하는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듯 아주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리고선 ,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인사했다. 빌라의 복도 앞. 뚜벅뚜벅 옆방에 들어간 서민하가 기타 가방을 내려놓았다.
요즈음 지수는 평소 어떤 한 가지 걱정을 하고 있었다.
[뱀파이어 프린세스의 계약자 (현재 비활성)]
계약자는 계약한 뱀파이어의 능력에 비례하는 추가 스탯을 얻으며, 피를 빨리는 것으로 처음 활성화되고, 장기간 피를 빨리지 않을 시 일시적인 계약 비활성화 상태로 전환됩니다.
바로 계약자의 효과에 대한 문제였다.
조건을 달성해 계약자가 되는 것 자체는 성공했지만, 아직 한 번도 서민하에게 직접 피를 빨리지 않은 탓에 효과가 활성화되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급한 게 아니니 필요할 때 빨리면 된다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정작 급할 때 피를 빨릴 여건이 갖춰지지 못하면 호된 꼴을 당할지도 몰랐다.
대체 뭐라고 말해야 하지. 그냥 팔 내밀고 빨아보라고 할 수도 없고. 이렇게 된 거 그냥 계약에 대한 걸 전부 밝혀버릴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 라이브 하우스에 앉아있는 지수를 괴롭히고 있는 건 그것과는 또 다른 고민이었다.
'기분 탓이야.'
무대가 시작되기 전. 테이블에 앉아있는 지수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밤이 되기 전에는 파리나 날리고 있던 이 가게에 오늘은 꽤 사람들이 있었다. 여주인은 뭐가 그리 신나는지, 주문받은 음료에다 디저트들까지 서비스로 가져다주며 공연이나 라이브 티켓에 대해 열심히 설명해주고 있었다.
'기분 탓일 거야.‘
앉아있는 지수가 손으로 깍지를 낀 채 생각했다. 지금 앉아있는 손님들이 죄다 동그란 안경을 쓰고 있는 것도, 라이브 하우스에 와서 밴드나 음악 얘기는커녕 마력이 어떻다느니 고깔이 어떻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는 것도, 전부 기분 탓일 것이다. 기분 탓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스마트폰을 들고서 고깔 카페에 속속들이 올라오고 있는 '성지 순례 왔습니다. 척-멘' 따위의 글들을 확인해 보면, 아무리 지수라도 기분 탓 같은 게 아니라는 걸 알수 있었다. 무슨 연예인 팬클럽도 아니고 이 인간들 진짜 미친 거 아니야? 지수가 두통이 느껴진다는 듯 꾹 눈을 감았다.
그리고 지수가 앉은 테이블 쪽으로 다가온 한 명의 인영이 있었다. 지수가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 남자는 짙은 눈썹을 하고 있는 잘생긴 청년이었다. 얼굴을 보자 앗 하고 머릿속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분명 아는 사람인데 이 사람을 어디에서 봤는지 확 하고 떠오르질 않았다.
"뭐야. 너도 '학파'였냐."
던전 쪽에선 네 이름이 안 돌아서, 다시 만나는 건 훨씬 뒤일 거라생각했는데. 피식 웃은 남자가 의자를 끌어 지수의 맞은편에 앉았다. 저쪽 또한 이쪽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한 번 보면 잊어버릴 수가 없는 강렬한 인상이었다. 저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것 같은 얼굴을 대체 어디서 봤었더라. 그리고 그러한 의문은, 남자가 꺼낸 다음 말에 명꽤히 풀렸다. 남자가 이쪽에 악수를 내밀었다.
"오랜만이군, 25번."
자존심 강해보이는 청년이 피식 웃었다. 그 말에 지수의 기억이 떠올랐다. 생각났다. 헌터 라이센스 시험에서 만났던 마법사. 강력한 주문을 펑펑 써대며 응시자들을 학살하다, 마지막에 지수와 겨루고 패배해 결국 차석으로 합격하게 된 2번 응시자. 바로 그 양반이었다. 지수가 입을 벌리며 말했다.
"아, 포인트 배달 상자 씨…. "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와버린 그 말에, 팔짱을 낀 전승민의 관자놀이에 확 핏줄이 솟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