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 그놈의 척멘은 진짜 (1) >
"......."
서민하는 어깨 한쪽에 기타 가방을 맨 채 담장 위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성큼성큼 걸어 네다섯 발자국쯤 앞. 서민하의 시선 끝에 걸려있는 건 담장 위에 누워있는 한 마리의 고양이였다. 고양이는 하품을 하며 자기 발등을 핥고 있었다.
"츠츠츠츠...."
허리와 무릎을 구부린 서민하가 이리 와보라는 듯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한참을 그러고 있어도 담장 위의 삼색고양이는 무심하게 서민하를 바라보고 있을 뿐, 움직일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실망한 서민하는 다시 허리를 펴고는, 주위를 몇 번이고 둘러보며 확인했다.
애초에 인적이 적은 곳이기도 해서, 뒷골목에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 고개를 숙인 서민하는 혼자 볼을 새빨갛게 물들이더니, 이내 무언가를 결심한 듯 얼굴을 들어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 발짝 앞으로 내딛으며.
“냐……냐옹.”
귀여운 몸짓으로 그렇게 말했다. 얼굴은 최대한 친한 척 미소를 짓고 있었다. 거의 지어보지 않은 표정인 탓에 상당히 어색했다. 그게 오히려 가만히 있던 고양이의 경계심을 건드린 건지, 와옹! 소리지른 고양이는 탓 뛰어가 골목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서민하는 손을 내뻗은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내 한숨을 쉰 서민하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리고선 자기 자신에게 자괴감 같은 것을 느낀 것인지 두 손으로 새빨개진 얼굴을 덮었다. 어떻게든 마음을 추슬린 뒤 얼굴을 덮고 있던 손바닥을 내리자 옆쪽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서민하는 한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섬뜩함을 느꼈다.
"냐옹?’’
어느새 서민하의 옆에 서있던 지수가 무표정을 한 채 그렇게 말했다. 서민하는 얼굴이 거의 홍당무가 돼서 식은 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마치 인생 자체가 무너져버린 것처럼. 지수에게 처음 흡혈귀인 걸 들켰을 때랑 똑같은 표정이었다.
그 날 뒷골목에 의문의 손톱자국이 하나 더 그어졌다.
***
라이브 하우스의 라운지. 테이블에서 빨대로 레모네이드를 쭉 빨아마신 지수가 말했다.
"그게 다 기물 파손이예요, 이 사람아."
어차피 사람도 안 다니는 데다 쓰레기가 널리고 벽에는 스프레이로 그래피티가 찍찍 그려져있는 뒷골목인 탓에 거기 서민하의 손톱자국 하나가 추가되든 말든 사람들은 신경도 안 쓰겠지만, 좀 더 자제할 필요가 있는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서민하는 아직까지도 부끄럽다는 듯, 말대꾸도 하지 않고 눈도 안 마주치는 채 괜시리 기타줄이나 튕겨 대고 있었다. 기타는 정유현 쪽에서 지원해준 것이었다.
중재역인 김도형의 일처리는 빠르고 확실했다. 집행부 일에다 협회 쪽 견제까지 바빠서 눈이 돌아갈 상황일 텐데, 이쪽의 확인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서민하가 치고 있는 기타는 이전에 쓰던 것과 완전히 똑같은 모델이었다. 모델명을 알려주자마자 신품을 공수해주는 데에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어떻게 그걸 또 좋다고 쓰고 있냐.”
"나는 이게 익숙해서 좋은데.”
“아니 그런 말이 아니고. 이번엔 그거 안 해? 이딴 거 필요 없으니 저한테 신경 쓰지도 말고 상관하지도 마십쇼."
지수는 그 패턴에 별에 별 고생을 했는데 저렇게 간단히 남이 준 걸 받으니 상당히 억울했다. 그러자 혼자 기타줄을 튕기고 있던 서민하가 이쪽을 쳐다보았다.
"미역 씨가 괜찮을 거라고 했잖아.”
"그래, 내 생각엔 괜찮을 거 같긴 한데. 그리고 미역 씨 아니고 이지수라고 했지.”
“그러면 괜찮아.”
서민하는 얘기 끝났다는 듯 다시 고개를 돌렸다.
지수는 어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나타나서 구속한답시고 자기 팔다리를 아작낸 인간들이, 이번엔 짐들을 망가뜨려 미안하다고 생활에 필요한 건 방이든 뭐든 최대한 지원해주겠다 한다. 지수가 서민하의 입장이었다면 상당히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그렇게 묻자 서민하가 대답했다.
"괴물인 줄 알면 보통 그러는 게 당연하잖아.”
"바보냐?"
지수가 제 쪽이 답답하다는 듯 화를 냈다. 그건 그냥 길 가다 어깨 한 번 툭 부딪혔다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예 사람 몸을 바닥에다 짜부라트렸는데 당연하긴 뭐가 당연한가. 아마 지수는 그 반의 반만 당했어도 사과 한다니 뭐니 다 무시하고 복수하겠다 길길이 날뛰고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서민하는 지수보다 훨씬 힘든 일들을 많이 겪어왔기에 이런 일을 당연하다 넘길 수 있는 것 일지도 몰랐다. 이른바 익숙해졌다는 것이었다. 지수가 쯧 혀를 찼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답답한 걸 넘어서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생각을 돌리려고 고개를 휘휘 저은 지수가 말했다.
“그래서. 피 마시고 싶단 생각은 이제 안들고.”
"갈증 같은 건 거의 없어졌어.”
"그래야지. 그 약이 얼마나 비싼 건데.”
지수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사실 용혈은 백묵이 계약금 대신이라고 그냥 가져가라 한 것이기에 그게 정확히 얼마나 하는 건진 지수도 몰랐다. 하지만 무슨 김혜성이 직접 와서 주문을 해제해야 한다느니 호들갑을 떤 걸 보면 엄청나게 비싸다는 건 확실했다. 그 말에 서민하가 움찔 떨었다.
“…많이 비싸?”
기타를 치는 서민하는 애써 신경쓰지 않는 척을 하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상당히 주눅들어 있었다. 부채감 비숫한 걸 느끼고 있는 듯 했다. 지수는 이제 와서 뭘 그런 걸 신경쓰고 있나 생각했다. 지수가 가소롭다는 듯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다 생각이 있으니까 그런 걸 투자한 거지. 미쳤다고 내 살림까지 거덜내면서 남 도와주겠어? 이미 대가 다 받았어.”
"대가? 내가 뭘 해줬다고.”
서민하의 질문에 지수가 움찔, 계약의 조건을 떠올렸다.
조건 1. 상위 이상의 격을 지닌 뱀파이어가, 계약자가 될 대상의 피를 흡혈한 상태일 것.
조건 2. 해당 뱀파이어가 계약자가 될 대상에게 독점욕을 느껴, 곁에 두고 싶다고 강하게 바랄 것.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지수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서민하가 자신에게 독점욕을 느끼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서민하의 인생이 완전히 개판이 나있었다는 증거 같은 것이었다. 통제할 수 없는 흡혈충동. 그런 시한폭탄을 안고 살아가던 서민하에게 있어,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지수는 적잖이 안도감을 주는 상대일 것이다. 아마도 유일한.
하지만 흡혈충동이 사라지는 것으로 서민하는 커다란 구속에서 해방되었다. 이제 그녀는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을 테고, 얼마 안 있어 더 좋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이겠지.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지수에 대한 독점욕 또한 사라질 것이다. 그때까지만 잠깐 서민하를 케어해주는 게 자신의 역할이었다.
지수는 그런 식으로 납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민하의 면전에 대고, 네가 나한테 독점욕을 느끼고 있어서 얻고 싶은 거 다 얻었어. 뭐 이렇게 말할수는 없는 거 아닌가. 결국 지수가 택한 방법은 뒤로 미루기였다.
"있어 그런 거. 나중에 말해줄게, 나중에.”
“그런 게 어딨어? 신경 쓰이게.”
"너도 편지 써놓고 보지 말라며. 사람 신경 쓰이게.”
지수가 웃긴다는 듯 반박했다. 그 말에 서민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정론이었기 때문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서민하가 말했다.
"그런데 미역 씨. 오늘은 왜 또 온 거야.”
"말했잖아. 노래 들으러 올 거라고.”
지수가 잊어버렸냐는 듯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사실 그때의 기세로 꺼낸 말이긴 했지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은 건 아니었다. 지수의 말에 휙 등을 돌린 서민하는 마음대로 하시든가, 하고 작게 중얼거리며 계속 기타를 만지작댔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을 카운터의 여주인은 모은 두 손바닥에 턱을 괸 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
저녁이 되어 라이브 하우스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오늘도 언제나와 같이 서민하의 무대는 마지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서민하의 노래는 철저히 매니아층만이 즐기는 컬트적인 스타일이었다. 지수는 저번과 똑같이 좌석에 앉지 않고 홀 맨 뒷편에서 벽 쪽에 등을 기댄 채 서있었다.
"오늘 무대 기대되네.”
"오늘은 뭐 인기 있는 밴드라도 오는 겁니까?"
옆에 다가온 여주인의 말에 지수가 물었다. 하지만 여주인은 뭐라고 대답하지 않고 씨익 웃음지을 뿐이었다. 그녀의 미소는 꼭 어린아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여주인은 지수가 확 눈썹을 찌푸리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눈치채지 못한거면 뭐, 보면 알겠지.”
영문 모를 말을 하는 사람이었다. 어깨를 으쓱인 지수는 팔짱을 낀 채 밴드들의 공연을 감상했다. 처음 들었을 때도 느꼈지만, 연이어 이어지는 라이브 무대들은 역시 상당한 수준이었다. 적어도 단순한 동호회 수준의 연주는 하나도 끼어있지 않았다.
여주인이 이 라이브 하우스에서 공연하는 밴드를 고르는 데에 까다로운 기준을 가진 것 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마지막 순서. 서민하의 무대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청중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기 시작했다. 모두가 큰 소리를 내진 않았지만 뒤에서 보고 있으면 크게 당황하고 있는 것이 한 눈에 보였다. 지수는 그것에 의아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지금 지수 또한 상당히 당황하고 있었다.
"…드디어 폈구나. 정말로 멋져.”
웃는 얼굴을 한 채, 역시 이렇게 됐다는 듯 평정을 지키고 있는 건 라이브 하우스의 여주인 뿐이었다.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서민하의 무대는 무언가 이질적이었다. 평소와 똑같은 목소리에, 평소와 똑같은 분위기의 곡이었다. 악기를 연주하는 기교 또한 그리 크게 달라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질적이었다. 이것은 저번에 들었던 서민하의 연주하고는 느낌이 완전히 틀렸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듣기 괴롭지 않다.
오히려 찢어질 듯 짜릿한 비트의 곡을 연주하고 있는데도, 가슴에 다가오는 풍부한 무언가가 있었다. 대체 뭐가 달라진 거지?
설마 흡혈귀로서 진화한 탓에 노래도 덩달아 진화해버린 것인가? 지수는 무대 위에서 노래부르는 서민하를 보며, 이 극명한 차이의 이유를 해명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지수는 한 가지 사소한 차이점을 깨달았다. 노래는 무엇보다 강렬하게 감정을 전달한다. 그건 분명 사소했지만, 보고 있는 입장에서는 상당히 커다랗게 느껴지는 차이점이었다. 옆을 돌아보자 눈이 마주친 여주인이 눈웃음쳤다.
“……그치?”
기타를 연주하고 있는 서민하는 웃고 있었다.
***
<윤나연 : 윤나연입니다! 지수 씨, 길드장님이 목요일쯤에 비즈니스 관련으로 연락을 하실 거라고 하시네요!>
집에 돌아오자 윤나연에게서 온 메세지가 있었다. 비즈니스라는 건 아마도 그것이었다. 지수의 능력으로 던전의 게이트 정보를 열람해주는 사업. 제대로 일에 착수하기 전에 여러 가지 협의할 점이 있을 것이다. 그런 쪽의 이야기인 듯 했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김도형이 보낸 장문의 문자가 와있었다.
집행부, 정확히는 집행부의 배신자 동맹끼리 보내는 메시지였다. 문자에는 이제부터 지수가 어떻게 행동해주고 있으면 좋을지와 의심되는 인간들, 그들과 만났을 때의 대처 등이 자세하게 쓰여있었다. 또한 정유현이 직접적으로 행동을 개시했으니 얼마 안 있어 격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그리고 연금술도 한 단계 뛰어올랐지….”
그것 또한 확인하고 불식에 재료를 발주해야 했다. 지수가 의자 등받이에 기대 이마를 짚었다. 할 일이 말 그대로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문득 지수는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청중들 사이에서 스마트폰으로 무대를 찍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라이브 하우스의 규정상으로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핸드폰으로 녹화하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단순히 개인 소장용 일지도 모르지만, 혹시나 인터넷에 업로드하려고 찍은 것일지도 몰랐다.
지수는 혹시나 싶어 미튜브에 라이브 하우스의 이름을 검색해보았다. 꽤 많은 목록들 중에 오늘 업로드된 영상이 있었다. 영상의 제목은 따로 없이 숫자로 된 날짜와 라이브 하우스의 이름만이 적혀있었다. 지수는 마우스를 딸깍여 그 영상을 재생해보았다. 화질과 음질은 상당히 깨끗했다.
"요즘 스마트폰 성능 진짜 좋네.”
감탄한 이어폰을 끼고 서민하의 노래를 다시 들어보았다. 정말로, 아는 사람이라서 이러는 게 아니라 서민하의 노래와 연주는 정말로 훌륭했다. 다만 에전에는 보고 들어줄 수 없을 정도로 괴롭게 노래를 부른 탓에 그런 평가를 할수 없었을 뿐이었다. 서민하의 영상을 보던 지수가 고깔에 들어갔다.
[제목 : 노래가 좋아서 올려요 ^^]
작성자 : 척척박사
- https://metu.be/JeFTHTEaNDY
별 생각 없이 한 행동이었다. 좋은 노래니까 공유하고 싶다. 그뿐이었다. 게시판은 그냥 잡담란에 올렸다. 굳이 마법에 대한 토론이나 팁 같은 것 말고도 자유게시판에선 고깔의 회원들끼리 일상의 잡담들을 떠들곤 했다. 노래를 추천하는 것 정도야 그냥 담담히 지나갈 글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하지만 고깔의 반응은 지수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거셌다. 이 미친 인간들이 무슨 척척박사 닉네임으로 글을 올릴 때마다 핸드폰에 알림이라도 가게 해놨는지, 지수가 글을 업로드하자마자 게시글 조회수가 백 단위로 박혔다.
<댓글창(1/2)〉
샌드위치 : 1 등이네요 ^^
검은용 : 척-멘.
샐러맨더 : 척-멘.
네머리위메테오 : 헐 척척박사님이 정보글 말고 다른 글을 올리셨어! 와 세상에 이건 기념해야 해 근데 저기 가면 척척박사님 만날수 있나요? 절대 스토킹 하거나 그러려는 게 아니고요 제가 평소부터 척척박사님 팬이라서 저기어디죠?
민승123 : 노래가 좋네요.
라무다 : 어 저 저기 아는데! 부평에 라드 맞죠!
명란젓 : 미쳤다 미쳤어 척-멘!
"뭐여 이게.”
이놈들 미친 건가? 지수가 모니터를 보며 눈썹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