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 무슨 뜻인지 쯤이야 (9) (유료 시작) >
말 없는 대치는 몇 초 간 이어졌다. 이내 비키지 않고 서있는 지수를 빤히 바라보던 정유현이 입을 열었다.
"…일단 하나 물어보지. 입구는 전부 봉쇄되어 있을 텐데. 여기까지 오는 길에 병정을 만나지 못한 건가?"
"만나긴 했는데요."
지수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냥 가라고 보내주시던데요. 일반인이면 몰라도, 같은 집행부 동료를 막는 건 자기 할 일 아니라고."
"못 말리는 녀석이군. "
정유현이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입가엔 웃음기 하나 섞여있지 않았다. 김도형이 지수를 막지 않고 그냥 보내준 것은 그냥 생각 없이 한 행동이 아닐 터였다. 오히려 깊게 고민한 결과일 것이다. 그것은 정유현에게 보내는 메세지였다.
숨기려 들지 말고, 우리가 하는 일을 똑바로 보여줘라.
지금 김도형은 그런 말을 돌려서 말하고 있었다. 그는 동료 사이의 유대감 따위를 중시하는 성격이기에, 문제가 있다면 동료끼리 서로 똑바로 마주보고 대화하길 원했다. 조용히 일을 끝내길 원하는 정유현과는 정반대의 의견이었다.
"유감이군. 박사 넌 모르는 채로 있으면 했는데."
정유현의 시선을 받은 지수가 꿀꺽 침을 삼켰다. 아군일 때는 몰랐지만, 적대하는 상태로 마주서보면 저렇게나 위압감이 드는 상대도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의 지수가 정유현과 싸워서 이길 가능성은 만에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딱히 싸울 필요는 없어.'
아마 정유현이 지금 서민하를 끌고 가려는 건 제어가 되지 않는 몬스터로서의 면모, 사람들을 덮칠지도 모른다는 위험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협회가 자행한 실험의 피해자라고 해도, 집행부로서 그 위험을 방치해둘 수는 없다는 거겠지.
그리고 지금 지수는 그 문제의 해결책을 손에 들고 있었다. 온갖 방법을 다 써서 만들어낸 정화된 용의 혈정.
혈정을 든 지수가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약이 있어요. 불식 길드 창고에 있던 용의 피를 가공한 거고, 마시면 흡혈 충동을 제어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이제 얘가 저번처럼 못참고 날뛸 일은 없을 거라고요."
"그러냐. 잘 됐군."
지수의 말에 정유현이 담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끝. 너무나 가벼운 수긍이었다. 도저히 이야기를 믿고 있는 사람의 반응이 아니었다. 지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늑대 씨. 믿기 힘드실 건 저도 아는데 정말로…..."
"아니, 믿는다."
정유현이 지수의 말을 끊고 대답했다. 의외로 지수가 한 이야기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듯 했다.
"박사 너라면, 그 정도 방법쯤은 찾아낼 수도 있겠지. 요 짧은 시간에도 내 상상을 몇 번이나 뛰어넘었으니까. 잠깐 상황을 모면한다고 금방 들킬 거짓말을 할 성격이라고도 생각이 안 들어.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어."
지수가 이해하지 못하고 눈썹을 찌푸렸다. 그런 게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고? 그게 상관이 없으면 대체 뭐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거지? 내가 무언가 상황을 잘못 파악하고 있나.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다른 목적은 짚이는 곳이 없었다. 지수의 의문에 아랑곳않고 정유현이 말을 이어갔다.
"문제는 저 애를 협회에서 두 눈 부릅뜨고 찾고 있다는 거고, 우리가 먼저 찾아낼 수 있었던 건 말 그대로 기적이고 결코 저 애가 밖에서 돌아다니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는 거다. 박사, 이게 마지막이다. 두 번 다시 말하지 않아."
그리고 대화의 시간은 여기서 끝이라는 듯. 한 손을 치켜들어 위협하는 정유현이 두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지금 당장, 거기서 비켜."
그 말에 지수는 잠시 뒤를 돌아 쓰러져있는 서민하를 바라보았다. 잠깐 지수와 눈이 마주친 서민하는 꺼낼 말조차 없다는 듯이 시선을 돌렸다. 마치 정유현이 하고 있는 말이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하는 듯한 태도였다. 자신은 결국 괴물이니까, 격리하려는 저쪽이 올바르고 당연한 거라고.
"어떡하죠, 늑대 씨."
지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정유현을 향해 웃었다.
"싫은데요."
그리고 지수는 쓰러져있는 서민하에게 용의 혈정을 내밀었다. 처음 만났던 날, 울면서 콜록이고 있는 서민하에게 지수가 물병을 내밀었을 때. 그때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네 노래 들어봤는데. 고칠 부분이 너무 많아."
그 날 서민하는 손을 휘둘러 지수가 내밀어준 물병을 땅바닥에 쳐내버렸다. 온몸에 가시를 두른 고슴도치처럼 , 더 이상 이쪽으로 다가오지 말라는 듯 으르렁거리며 지수를 적대했었다. 도와주는 것 따위는 필요도 없고 바라지도 않는다고. 그게 필사적으로 짜낸 거짓말이었다는 걸 지금은 알고 있었다.
"계속 가서 들어줄 테니까, 좀 웃으면서 불러라."
그 말에 쓰러져있던 서민하는 멍하니 지수를 바라보더니, 이번에는 망설이는 일 없이 용의 혈정을 받아들어 자신의 입에 가져갔다. 농축된 혈액이 서민하의 목을 타고 넘어갔다.
"무슨…!"
그리고 늑대탈을 쓴 정유현의 눈동자에 경악이 스쳤다.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을 상태일 터였던 서민하의 상처가, 시간을 빨리감기라도 한 것처럼 급속도로 치유되고 있었다.
용의 혈정의 정보창에 적혀있던 사실.
…'빈사상태의 인간을 죽음에서 돌아오게 한다’.
그 말대로 용의 피는 온갖 상처를 치유해주는 극상의 영약이었고, 특히나 흡혈귀의 경우엔 용혈의 효능을 백 퍼센트 끌어낼 수 있었다. 중상을 입은 채 쓰러져있던 서민하는 거대한 마력을 터뜨리며 순식간에 온몸의 상처를 회복했다.
"윽......!"
한 순간 격통을 느끼는 듯 서민하가 자신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그 한 순간이 결정적인 빈틈이었다. 정유현은 곧바로 중력의 철퇴로 서민하를 다시 찍어누르려 시도했다. 그리고 전부 예상했다는 듯 지수의 손이 그 지점을 가리키고 있었다.
파사의 마력으로 그려낸 방호의 룬.
내리찍히던 중력의 철퇴가 비스듬히 꺾여, 서민하 바로 옆의 바닥을 강타했다. 처음부터 예측하고 있던 곳에 빤히 보이는 공격이 들어오는데도, 전력을 다해야 살짝 방향을 비틀 수 있는 정도였다. 아직 힘의 크기 자체가 너무 차이났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지수가 벌어낸 그 한 순간 동안, 서민하의 등 뒤에서 새빨간 마력의 날개가 솟아올랐다. 뱀파이어로서 한 단계 상격의 존재, 귀족으로의 각성이 끝났다.
마력의 급류가 소용돌이처럼 주변을 휩쓸었다. 상당히 떨어져있는 정유현조차 휘청거릴 정도였다. 정유현이 재빨리 다음 공격을 시도했다.
"무슨…!"
그리고 서민하는 정유현의 중력 압박을, 오른손을 옆으로 휘두르는 것만으로 완전히 찢어버렸다. 지수가 휘말리는 걸 고려해 적당히 힘조절을 하긴 했지만, 정면에서 찢어져버리는 경험은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이제 진짜 싸움이 시작되겠구나 예감을 느꼈을 때, 서민하는 지수를 안고서 멀리 하늘로 날아가버렸다.
"와. 대단하네요, 저거. 실패작이라던 거 아니었나. 마력은 A급 수준인데."
싸움의 무대였던 공터. 지수와 서민하가 사라지자마자, 뒤쪽에서 김도형이 뚜벅뚜벅 걸어나왔다.
"다 보고 있었으면서. 도와주지도 않았나."
벽에 등을 기대고 있는 정유현이 말했다. 병정 가면을 쓰고 있는 김도형이 웃기는 말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도와주지도 않았나는 개뿔이, 애초에 진심으로 싸우지도 않아놓고. 오히려 제가 물어보고 싶네요. 무슨 바람이 불어서 마음이 변한 겁니까? 평소 성격대로면 저쪽이 도망쳐도 같이 날아가서 끝까지 따라붙을 줄 알았는데."
김도형이 몇 년 동안 겪은 정유현이란 남자의 성격은, 한 번 정한 일은 절대로 안 굽히는 고집쟁이였다. 김도형의 의문에 잠시 침묵을 지키던 정유현이 대답했다.
"어차피 원망받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천천히 늑대탈을 벗은 정유현이 손에 든 가면을 바라보았다. 무표정이었지만 어딘가 씁쓸함이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이러나 저러나 그 실험은 집행부를 위한 거였고, 몰랐다는 변명 따윈 통할 리가 없지. 우리가 확인한 실험체 중에 살아있는 건 그 애밖에 없고, 나머지는 전부 죽거나 제거당했다. 그러니 어차피 원망받을 거라면. 거친 방식으로라도 안전한 데에 가뒤놓고 협회 청소가 끝날 때까지 책임지고 보호하는 게 최소한의 도리라고 판단했다."
"…꽉 막힌 것도 그 정도면 정신병인 거 아세요?"
그냥 위험하니까 구속하자는 게 아니었구나. 김도형이 아주 질렸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정유현은 작게 콧숨을 쉬었다. 자신이 사고방식이 비틀려있는 인간이라는 건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유현의 생각에는 그것이 최션이었다.
집행부와 협회는 서민하의 인생을 망친 원흉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곳의 간부인 정유현이 감히 그녀에게 같이 싸우자거나 동료가 되자는 말을 꺼낼 자격이 있을 리 없었다. 자격 운운 이전에 그런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불가능한 일을 지수는 해냈다.
서민하는 자기 뼈를 으스러뜨렸던 원수를 공격하는 것보다, 적 앞에서 지수를 지키고 도망치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보호 따위 필요하지 않다는 강함조차 증명해냈다. 자신의 생각과 주장이 정면에서 철저히 반박당해 깨져버렸다. 싸워서 진 게 아니라도, 그것은 완벽한 패배였다.
"....착잡하군."
원망을 받을 건 처음부터 각오하고 있었지만, 역시 미안하다는 말 정도로는 끝낼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정유현이 가장 걱정하던 것 한가지가 사라졌다. 뭔가를 지키거나 보호하는 건 그에게 있어 결코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서민하의 문제가 해결됐다면, 이제는 협회 안의 쓰레기들을 박살내는 데에만 집중할 수 있다.
자리에서 일어난 정유현은 다시 늑대탈을 얼굴에 썼다.
전쟁을 준비할 시간이었다.
***
"아이구~ 민하가 쓴 이별 편지 읽고 눈물로 손수건을 적시고 있었는데, 바로 돌아오니까 기분이 묘하네!"
지수가 통화를 끝내고 들어오자, 라이브 하우스의 여주인이 서민하를 껴안고 볼을 비비고 있었다.
김도형에게서 걸려온 전화는 중재로서 사과와 몇 가지 당부, 지수에게 서민하의 상태를 살펴봐달라는 부탁, 그리고 부서져버린 기타와 캐리어, 안에 있던 짐들을 포함해 서민하의 생활 면에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지수의 얼굴을 보자 무언가 생각났는지, 여주인이 손뼉을 짝 치고 카운터로 달려갔다.
"맞다 이거, 민하가 너한테 전해달라던 편진데…!"
여주인이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서랍에서 편지봉투 하나를 꺼내었다. 그 말에 눈을 번뜩 뜬 서민하가, 번개같은 몸놀림으로 여주인의 손에 들린 편지봉투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하지만 여주인은 능숙하게 손을 머리 위로 들어올려 편지를 지켜냈다. 그리고 서 있는 지수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이왕 쓴 편진데 안 읽히면 아깝잖니? 자, 혼자 있을 때 읽어야 돼 ! "
지수가 여주인에게서 편지봉투를 받아들었다. 서민하는 옆에서 안절부절 못하며 눈만 번뜩 뜬 채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장 덮쳐들어 빼앗고 싶은데 각이 안 보여 기회만 노리고 있다는 얼굴이었다. 지수가 인상을 쓰고서 말했다.
"무슨 내용인지는 몰라도 읽히는 게 싫으면 안 봐도 상관은 없는데. 돌려줘? 아니면 그냥 버릴까."
"...일단. 읽지 마."
"그러면 이건 어떡하는데."
"그냥 읽지 말고… 갖고만 있어."
그건 또 상당히 특이한 요구였다. 편지는 보냈지만 갖고만 있고 읽지는 말아달라니. 안에 뭐라고 써있는지는 몰라도 상당히 부끄러운 말이 적혀있는 듯 싶었다. 지수는 편지봉투를 고이 가방에 넣어두었다. 늑대 씨와의 관계도 그렇고 여러 생각으로 복잡했지만, 지금 가장 급한 건 한 가지 걱정이었다.
몬스터 백과에서는 귀족이 된 뱀파이어가 계약이란 능력을 가진다는 것까지는 쓰여있었지만, 그 계약이라는 것이 정확히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지는 건지는 나와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기우로 밝혀졌다. 라이브 하우스에 들어오자 마자 알림창을 확인해보니 이미 계약이 완료되어있었다.
[뱀파이어 프린세스의 계약자]
〈조건 1. 상위 이상의 격을 지닌 뱀파이어가, 계약자가 될 대상의 피를 흡혈한 상태일 것. (달성)》
〈조건 2. 해당 뱀파이어가 계약자가 될 대상에게 독점욕을 느껴, 곁에 두고 싶다고 강하게 바랄 것. (달성)>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해, 반영구적인 축복 '뱀파이어 프린세스의 계약자'가 활성화되었습니다.
계약자는 계약한 뱀파이어의 능력에 비례하는 추가 스탯을 얻으며, 피를 빨리는 것으로 처음 활성화되고, 장기간 피를 빨리지 않을 시 일시적인 계약 비활성화 상태로 전환됩니다.
'피를 빨려야 켜진다고…'
오랫동안 흡혈당하지 않은 채로 지내면, 계약 자체가 해제되는 건 아니지만 효과가 일시적으로 사라지는 듯 싶었다. 그리고 지금 지수는 서민하에게 직접 흡혈당한 적이 없는 탓에 계약의 효과를 하나도 못 보고 있었다. 온갖 개고생을 했는데 이대로라면 죽 쒀서 개 주는 꼴이었다.
'대체 피 빨아달라는 말을 어떻게 꺼내야 돼…. '
까딱 말을 잘못 꺼냈다간 변태로 몰릴 지경이었다. 테이블에 앉은 지수는 난생 처음 해보는 기묘한 고민에 코끝을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