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무슨 뜻인지 쯤이야 (8)
"완성했다......."
[정화된 용의 혈정 - 전설]
마법 생물의 정점인 드래곤의 피의 정수. 피에 깃든 사념이 제거되어 부정한 효과가 사라졌다. 빈사상태의 인간을 죽음에서 돌아오게 하고, 마신 자에게 불굴의 활력을 가져다준다는 전설이 있다. 최상위의 마법 촉매로서 기능한다.
담긴 사념은 전부 제거했다. 언령의 주체 또한 바꿔치는데에 성공했다. 용의 피는 혈액에 담긴 마력과 격 자체가 다르다. 혈정에 인간의 피를 얼마나 섞어본들 새까만 먹에 물 한 방울을 떨어뜨린 듯 집어삼켜질 뿐이겠지만, 혈정의 점유율은 순수한 혈액의 양만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듯 했다.
['연금술의 소양'이 5레벨이 되었습니다. 인내와 손재주가 9% 상승합니다. 2레벨까지의 시약을 만들 수 있습니다.]
['연금술의 소양'이 '연금술의 연찬'으로 변화합니다.]
사실 단순하다면 단순한 작업임에도 전설 급의 재료를 다루는 경험 자체가 큰 의미를 가지는지, 옆의 알림창에서는 연금술의 소양 레벨이 계속해서 올라가고 있었다. 본래 목적을 이루는 과정에서 떨어지는 소소한 떡고물이었다.
조건언령 : 이 혈정을 마신 자, 주인이 죽거나 봉인당하는 것을 방아쇠로 언령에 묶여, 피의 주인의 부활과 해방을 위해 몸과 영혼을 바치는 충실한 하수인이 되리라.
강제주체:이지수
혈정점유율 : 이지수 (51%), 사룡 아그리올라 (49%)
'웬만하면 발동할 일 없을 것 같긴 한데.'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면, 만약 지수 자신이 죽어버릴 경우 언령이 발동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게 최선책이었다. 게다가 지수는 꼬부랑 할배가 될 때까지 창창하게 살 계획이었으니 아마 괜찮을 것이다.
뭐 저쪽도 어쩔 수 없는 것 가지고 째째하게 따지고 굴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이제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러 갈 시간이었다. 혈정을 챙긴 지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서민하는 의자 등받이에 턱을 괸 채 수혈팩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혈팩을 가져다준 참견쟁이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이상한……미역.'
서민하가 괴물이라는 걸 알고서도 그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녀가 반쯤 이성을 놓고 있었을 때에도 그는 도망치지 않고, 혐오의 시선을 보내기는커녕 오히려 이쪽을 믿는다는 듯이 가만히 서있었다. 그건 처음 겪어보는 경험이었다.
누군가가 그렇게, 너는 괜찮다는 눈빛을 보내주는 것은. 이상한 실험장에 끌려가 괴물이 되기 전의 인생에서도, 탈출한 이후의 방랑에서도 서민하는 철저히 혼자였다.
서민하는 수혈팩에 손을 뻗으려다가 또다시 주저했다. 누군가를 믿을 때마다 끊임없이 배신당해온 경험은, 그녀를 남의 호의를 결코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런 내가 싫어.'
서민하가 손을 아래로 축 늘어뜨렸다. 사실은 도와달라고 매달리고 싶었다. 힘들다고 울며 토로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고 온몸에서 거부반응을 보내왔다. 그것은 어쩌면 몸에 괴물이 섞여있는 자 특유의 직감일지도 몰랐다.
서민하의 인생은 저주를 받았다. 깊게 얽히면 얽힐수록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의 인생까지 망가뜨려 버린다. 단순한 느낌이나 직감이 아니라 수많은 경험으로 증명된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지수는 서민하가 숨기고 있던 사정에 너무 깊게 발을 들여놓아버렸다. 이쪽이 선을 넘어버리든, 결국 저쪽이 이쪽을 혼자 남겨두고 떠나버리든. 반드시 나쁜 결말으로 끝날 것이고, 아마 자신은 그 결과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도망치기로 했다.
겁쟁이인 것에도 정도가 있었지만, 이것이 서민하가 알고 있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요 몇 달 신세를 진 라이브 하우스의 마담에게 남길 편지는 이미 써두었다. 전하고 싶은 말을 솔직히 적는 건 서툴렀지만, 어떻게든 완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미역 씨에게도 편지를 한 장 남겼다.
처음엔 당신 진짜 바보 아니냐고 나무라는 내용이었고, 그 다음은 도움 같은 거 필요 없으니 관심 끄라는 거듭된 당부였다. 하지만 결국 무슨 말을 적어도 붕 뜨고 어색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서, 몇 번이나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를 반복했다. 밤을 새다 결국 문면에 남은 건 단 한마디 뿐이었다.
- 고마워.
작별인사쯤은 솔직하게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미 마담에게 그 사람이 또 오면 전해달라고 편지를 맡겨놓았다. 서민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짐이라고는 기타 가방과 옷가지가 들어있는 캐리어 하나. 그리고 선물받은 수혈팩 박스 정도 밖에 없었다. 뭐 하나 가진 게 없다는 것도 이럴 때에는 편리했다.
"이제는, 어디로…."
캐리어 바퀴가 도르르르 돌아갔다. 추억다운 추억도 없는 거리일 텐데 떠나는 발걸음이 지나치게 무거웠다. 그리고 탕! 서민하가 내딛은 발 바로 앞치를 누군가가 사격했다. 놀라 고개를 돌리자, 담장 위에서 무언가가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장난감 병정이 위장색을 걷고 모습을 드러냈다.
지수에게는 숨기고 있던 병정의 능력이었다. 장난감 병정은 육안으로 보이지 않게 위장한 채 배치되어 중요 포인트를 전부 감시하고 있었다.
마을에 숨은 흡혈귀의 특정은 끝 난지 오래였다. 그리고 상황을 지켜보던 집행부는 집행에 나섰다.
"타이밍이 안 맞았군, 괴물."
뒷골목에서 뚜벅뚜벅 다가오고 있는 건, 마른 체형의 남자였다. 본 적 있는 새까만 제복이었다. 하지만 낯익은 제복과 달리 얼굴을 가리고 있는 건 지수의 웃기는 안경과는 전혀 딴판인, 흉흉한 위압감이 느껴지는 늑대 가면이었다.
"미안하지만, 도망치게 내버려둘 수는 없어서."
주머니에서 꺼낸 정유현의 손바닥에, 연보라빚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내뻗은 중력은 철퇴가 되어 서민하를 덮쳤다.
* * *
지수는 초조함에 거리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라이브 하우스에는 서민하가 없었고, 여주인의 말에 따르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일을 그만두려는 것 같다고 했다.
지수는 무언가를 건네주려는 여주인을 돌아보지도 않고, 즉시 밖으로 달려나갔다. 진짜 그 미련한 계집애가. 까딱하다간 지금까지 개고생한 것들이 다 허사가 되어 끔찍한 사건이 터져버릴 판이었다. 그리고 지수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것은 무언가의 흔적이었다. 콘크리트는 반쯤 깨져있었고 박살난 캐리어가 골목에 굴러다녔다. 그리고 그 옆에는 피웅덩이가 있었다. 누군가가 피를 흘린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수가 서민하에게 주었던 수혈팩이 터진 것이었다.
지수가 검지로 툭툭툭 손등을 두드렸다. 잘못 타이밍을 놓쳤다간 모든 게 끝장나버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확 덮쳐들었다. 하지만 어떻게? 이 거리 전체를 무작정 뛰어다니는 것 말고는 서민하와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생각하자. 생각해봐. 분명히 무언가가 방법이 있을 거야. 사고를 멈추지 마. 머리를 계속 굴려. 혼잣말하면서 손가락을 두드리던 지수가 자신의 가슴팍에 손을 가져다댔다.
"파사의 마력."
지수의 체내에서 파사의 마력이 정제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번개가 스치듯이 지나간 발상이었다. 하지만 시도 해볼 만한 가치는 있었다. 말하자면 일종의 숨 죽이기다. 이제는 걸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쓸 수 있는 '예바우드 식 마도 명상'. 지수가 가진 마력량 자체는 그리 크지 않지만, 마력 제어의 섬세함 만큼은 거의 압도적인 수준에 달해있었다.
'그렇다면 분명, 이론상으로는 가능해.'
필요한 것은 숨이 끊어질 듯한 집중력 뿐이다.
자신 체내에서 흐르는 마력의 흐름에, 톱니바퀴를 맞추듯 이 파사의 마력을 짜넣는 것으로 마력의 움직임을 멈춰버린다. 흐르지 않는, 고요한 수면과도 같은 상태. 그것으로 외부에 대한 마력 감지 능력은 비약적인 수준으로 향상되었다.
'명경지수.'
지수는 이 테크닉을 그렇게 이름 붙이기로 했다. 이름에 '지수'가 들어가있어서 자신 고유의 기술인 것 같은 멋도 있었다. 명경지수 상태에서 펼치는 마력 감지는 멀리 떨어져 있는 마력의 발생원과 그 성질, 크기조차 대체로 간파할 수 있었다. 지수가 익숙한 마력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달려나갔다.
* * *
<주변 블록 일반인 출입 통제 끝났습니다.>
"확인했다."
정유현이 김도형의 무전에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눈길을 돌려 바닥에 깔려 꿈틀대고 있는 서민하를 바라보았다. 흡혈귀라고 해봐야, 어차피 이식이 되다 만 협회의 반쪽짜리 실험체. 도망치지 못하게 제압하는 것쯤이야 싱거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상대해보니 그건 커다란 착각이었다.
"애먹게 하지 마라.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정유현은 지금도 상당한 출력으로 서민하를 짓누르고 있었다. 잠깐이라도 힘을 풀면 곧바로 도망쳐버릴 것만 같았다. 여유있게 힘조절을 하면서 생포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평소의 정유현이었다면 그냥 전력으로 짓눌러 죽여버렸겠지만, 서민하에게는 반드시 들어야만 할 이야기들이 있었다.
"미안하지만 난 어르고 달래는 데엔 재능이 없어. 아니면 팔다리를 다 으스러뜨린 다음에야 말을 들을 건가?"
서민하는 이미 중상이었다. 커다랗게 변이한 한쪽 팔도 반쯤 비틀린 채 땅에 짓눌려 움직일 수 없었다. 흡혈귀 특유의 회복력으로도 커버가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서민하와 정유현의 사이에는 압도적인 전투 경험의 차이가 있었다
서민하는 체념이 빠른 인간이었다. 그런데도 정유현에게 그토록 막무가내로 달려든 건, 이상할 만큼 화가 났기 때문이었다. 정유현이 날린 첫 일격에, 서민하의 캐리어가 박살 났다.
그 안에 들어있던 수혈팩도 전부 터져버렸다. 그 광경을 보자 서민하는 전에 없을 정도로 분노가 치미는 걸 느꼈다.
"끅......."
내장이 뒤틀린다. 숨을 제대로 쉴 수조차 없었다. 참을 수 없이 아프고 괴로운데, 어딘가에서는 그것을 납득하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괴물의 말로로는 어울리는 광경이었다. 흐려진 시야에는 커다랗게 변이한 괴물의 오른팔이 보였다.
"일단은 발목부터 짓뭉개지."
…구해달라는 말을 내뱉지는 않았다.
누군가 민하를 발견한다고 해도 구해주러 오진 않을 것이다. 그런 바보가 있을 리가 없다. 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 이런 괴물딱지를 보고서, 도망치지 않고 남아있는 멍청이가 어디 있겠는가. 정말로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할 때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그것이 그녀가 배워온 세상의 이치였다.
상관하지 마. 어디로든 가버려.
만약 그 때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면, 지금 그 사람은 나를 도와주러 와줬을까. 부질없는 상상을 했다. 어차피 이제 와선 의미없는 이야기였다. 각오한 서민하가 눈을 꽉 감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서민하는 무언가 이상하다 생각하며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먼저 보인 것은, 미역 같은 곱슬머리였다.
그리고 쉬지도 않고 달려온 듯, 숨을 가쁘게 쉬며 위아래로 흔들리고 있는 등.
"...상관 말라고."
서민하가 울먹이면서 입을 열었다.
"상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바보냐."
그대로 등을 돌리지 않고, 지수의 손가락이 회복의 룬을 그었다. 은은한 빛이 민하의 몸에 스며들어 상처를 조금씩 치료해갔다. 심드렁하게 머리를 긁적인 지수는 한 번 한숨을 쉬고, 곤란하다는 듯한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이래 봬도 해석사야. 무슨 뜻인지 쯤이야 척 들으면 척 이지. 그 정도도 못 알아들을 만큼 바보는 아니야."
"뭐..."
"도와달라고 하고 있었잖아."
해석 스킬 따위 필요도 없었다. 그러니까. 그런 표정을 하고 있으니까, 어떻게든 양쪽 다 원만하게 끝날 수 있는 방도를 찾아나섰던 것이다. 지수를 올려다보는 서민하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리고 지수는 더 이상 말없이 고개를 돌려, 정유현과 마주섰다. 미안하지만 일이 이렇게 됐다는 듯이, 늑대 가면이 어깨를 으쓱였다.
"안녕, 박사."
가면 안에서 새어나온 목소리는 더없이 냉랭했다.
"...일 중인데, 비키지."
그것은 지수가 처음으로 만나는, 압도적인 강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