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무슨 뜻인지 쯤이야 (7)
라이브 하우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대걸레질을 하고 있는 서민하가 있었다. 지수의 얼굴을 기억한 듯 카운터에 앉아 손톱을 손질하고 있던 여주인이 손을 흔들었다.
"민하야~ 네 친구 왔다."
그 말에 바닥을 닦고 있던 서민하가 고개를 돌렸다. 자긴 친구 같은 거 없는데 무슨 소리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내 지수의 얼굴을 확인한 서민하는 움찔 하고 어깨를 떨었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니 엄청나게 동요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수는 텅텅 빈 라운지의 테이블 하나를 잡아 앉았다.
라이브가 시작하기 전엔 라운지에서 간단한 식사와 음료를 마실 수 있었다. 지수가 메뉴판을 바라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레모네이드인가, 애플 사이다인가. 이것은 오랜만에 겪어보는 상당한 난제였다. 그리고 서민하가 성큼성큼 다가 왔다.
"어, 여기 주문......"
지수가 말을 꺼낼 새도 없이, 서민하는 지수의 멱살을 잡고 가게 밖으로 질질 끌고 갔다. 그걸 보고 있던 여주인은 어머머, 쟤 좀 봐. 하고 입가에 손을 가져다대며 웃었다. 그녀가 지수를 끌고 간 건 매장 뒷편의 골목길이었다.
쥐고 있던 멱살을 내팽개치고, 서민하가 말했다.
"...이봐, 미역 씨. 말했지. 내 앞에 얼굴 내밀지 말라고."
서민하는 이글대는 눈동자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곳은 서민하에게 있어 몇 없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장소 일 것이다. 그런 장소에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지수가 침입해왔다. 그녀로서는 초조하고 불안한 것도 당연했다.
"아니면… 지뢰는 밟아봐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이야?"
서민하의 주변에서 흉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지금 '비밀을 들키고 싶지 않다면' 따위의 인질을 내세워서 무언가 협박을 가하려고 하는 거라면. 그건 정말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라고. 지수가 항복이라는 듯 어깨 위로 양손을 올렸다.
"뭐 노래 들으러 오는 것도 안 됩니까."
"농담 아니야. 웃기지도 않는 핑계 대지 마. 그리고 존댓말도 쓰지 마. 다 큰 인간이 그러는 거 징그러우니까."
"무슨 존대를 해줘도 뭐라고 하냐."
한숨을 내쉰 지수가 올리고 있던 양손을 내렸다. 일단 만나는 사람한텐 누구에게든 존대를 하는 성격이었지만, 자기가 존대받기 싫다는 사람한테까지 꾸역꾸역 존댓말을 쓸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바닥에 내려놓았던 박스를 집어들었다.
"그쪽 얼굴 보려고 온 게 아니라 이거 전해주려고 온 거 거든. 역시 그냥 방치해두긴 아무래도 걱정이 돼서."
물론 서민하가 아니라 동네 사람들 쪽이 걱정된다는 뜻이었다. 턱짓을 한 지수가 건네받으라고 박스를 건네주었다. 서민하는 무슨 속셈인가 이쪽을 경계하면서도 조심스레 박스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내용물을 확인한 서민하의 눈이 번쩍 뜨였다. 안에 들어있는 건 불식에 부탁해서 얻은 수혈팩이었다.
"이런 걸 어떻게…."
"진짜 바보냐?"
지수가 답답해 죽겠다는 듯 팔짱을 꼈다. 대충 봐도 견적이 나오기는 했다. 주변에 상담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테니까, 그냥 무조건 혼자 참을 때까지 참다 결국 반쯤 미쳐서 동물을 덮쳐버린 거겠지. 미련한 것에도 정도라는 게 있었다.
그리고 수혈팩을 빤히 바라보던 서민하가 시선을 올렸다.
"…그쪽을 어떻게 믿고 이걸 먹어?"
지수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진짜 꿀밤 한 대만 쥐어박고 싶다. 다만 서민하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반발이 약해져 있었다. 그녀 또한 살아있는 동물의 피를 빠는 걸 혐오하니 수혈팩에 매달리고 싶을 것이다. 지수가 박스를 툭 밀었다.
"그냥 놔두고 갈 테니까 쓰든지 버리든지 네 마음대로 하시고. 또 동물 피 빨다 걸려서 사냥당해도 난 모른다."
"......."
결국 서민하는 갈팡질팡 수혈팩이 담긴 박스와 지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볼지언정, 그걸 땅바닥에 버리거나 다시 가져가라고 돌려주지는 않았다. 그만큼 절박한 상황이었다. 지수 또한 조마조마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또 날뛰다가 들켜서 집행부가 출동하기라도 했다간 모든 게 틀어져 버린다.
'일단 시간은 벌었나?'
하지만 수혈팩 같은 건 응급처치는 되어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어주지는 못했다. 서민하의 흡혈충동은 날이 갈수록 점점 강해질 테고, 아무리 피를 빨아도 가라앉지 않는 때가 언젠가 온다. 그때가 바로 최후였다. 서민하는 완전히 미쳐 괴물이 되어버릴 테고, 그런 상황까지 가면 되돌릴 수 없다.
반드시 그 전에 용의 혈정의 정제를 끝내야 했다. 팔짱을 낀 지수는 검지로 자기 팔을 툭툭 두드렸다. 여러 가지 생각을 동시에 할 때의 버릇이었다. 그런 지수를 의뭉스럽게 쳐다보고 있던 서민하가 경계심 섞인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미역 씨. 당신, 남한테 참견하는 게 취미야?"
"미역이 아니라 이지수다."
"봉사활동을 하고 싶으면 봉사활동 센터에 가면 되잖아."
지수는 잠깐 눈썹을 찌푸리며 호칭을 정정했지만, 서민하는 들은 척도 안 하고 자기 할 말만 이어나갔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나는 괴물이야. 저주를 받았다고. 섣불리 끼어들었다간 당신 인생도 배배 꼬여버릴걸. 남 도움 같은 건 필요도 없고 받을 자격도 없어. 알아들어?"
지수가 그게 무슨 웃기는 말이냐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그냥 남 참견하고 싶어서 이 고생을 하는 멍청한 놈이 어딨어? 다 이쪽에도 이득이 있으니까 그러는 거지."
"뭔데 그게."
서민하가 추궁하는 시선으로 지수를 노려보았다. 나 같은 거랑 얽혀서 하나라도 좋은 점이 있다면 제발 좀 말해달라는 듯이. 대답하려던 지수가 순간 숨을 삼키고 입을 다물었다.
'이걸 지금 말하는 게 맞나?'
확실히 여기서 서민하에게 모든 사정을 밝히는 건 간단했다. 내가 책을 좀 찾아봤는데 이러저러해서 너를 구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다음에 떨어질 떡고물 때문에 이러고 있는 것이다. 서로 간에 납득할 수 있는 이해관계가 존재한다면, 저절로 의심은 걷히고 신뢰가 만들어진다.
문제는 지수에게 아직 확신이 없다는 점이었다.
흡혈충동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제 사람들한테 들켜서 괴물 취급 받을까봐 전전긍긍하던 날들과도 작별할 수 있다…그건 서민하에게 있어서 바라마지 않았던 일일 것이다. 과장이 아니라 그 말 한 마디는 그녀의 삶에 있어 희망의 빛이라 해도 좋았다.
하지만 그래놓고 만약 실패한다면? 완전히 사람 마음을 후벼파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지수는 조심스럽게 입술을 닫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직은 이야기를 꺼낼 단계가 아니었다. 이런 쪽의 문제에 있어서 지수는 과하게 걱정이 많았다.
"봐. 결국 못 말하지."
서민하가 지수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 몸짓에 서운해하는 기색 같은 건 없었다. 애초에 당연한 일이니 실망 같은 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린 서민하가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서 말했다.
"다시 한 번 말하는데, 나한테 상관하지 마."
그것은 흡혈귀로서 폭주하고 있었을 때 내뱉은 말과 달리, 그녀가 고민하고 체념한 끝에 내놓은 대답이었다. 그리고 서민하는 분홍색 머리를 찰랑이며 뚜벅뚜벅 라이브 하우스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지수가 중얼거렸다.
"저거 그래놓고 수혈팩은 가져가네."
* * *
방 안에 돌아온 지수가 곧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재료 아이템의 상태를 변화시키기 위해선, 연금술의 소양과 마법 재료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이 필요했다. 다행히 지수는 두 가지 조건 모두 만족하고 있었다. 지수는 몬스터 사전을 살펴보며 조심스레 혈정의 상태를 확인해갔다.
<용혈 자체가 무엇보다 귀한 보물이긴 하지만, 더욱 까다로운 건 그걸 사용하는 방법이다. 용의 피에는 사념과 함께 용의 언령이 깃들어있는 경우 또한 존재한다. 이러한 경우 당연히 용혈 자체가 가지는 공능은 더욱 강해지지만, 용혈에 깃든 언령의 저주에 묶여버릴 가능성 또한 커진다… >
'언령은 또 뭐야?'
백과를 쓴 사람의 저술에 따르면, 용혈을 정제하기 위해선 단지 사념을 제거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닌 듯 싶었다. 던전의 모험가라서 그런가 이런 부분에선 자세했다. 지수는 용의 생태에 대해 써있는 부분의 다음 페이지를 넘겨보았다.
<결론부터 말해, 언령의 내용을 확인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용언 마법이 용 이외의 생명체에게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하는 건, 그것이 인간으로서는 해명할 수 없는 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사념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용의 피에 언령이 걸려있는지 아닌지 자체는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언령이 걸려있다면 즉시 용혈을 파기… >
요는 일단 사념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피에 언령이 걸려 있는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지수는 곧바로 실행에 들어갔다. 지수의 손이 혈정의 양옆을 감쌌다.
"파사의 마력."
지수가 시동어를 속삭였다. 보상으로 얻은 스킬을 발동하자, 체내에서 만들어진 새하얀 마력이 스파크를 일으키며 손에 흘렀다. 아직 구조를 제대로 해명하지 못한 탓에 지금은 스킬에 의지해서밖에 쓸 수 없는 실정이었다. 하지만 급박한 전투 상황도 아닌 지금 그것은 별로 문제되지 않았다.
'이것도 빨리 내 걸로 만들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파사의 마력을 혈정에 흘려보냈다. 그러자 파사의 마력이 무언가와 상쇄되며, 혈정 안에 남아있던 사이한 기운이 몰아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급격한 변화는 바로 그 다음이었다.
어느 정도 파사의 마력을 흘려보내며 피에 담긴 사념을 거의 다 정화한 순간, 마치 DNA의 사슬처럼, 용의 혈정 주변에 마력의 문자가 촤르륵 이중의 나선으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문자라기보단 극히 복잡한 문양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이게, 용의 언령...."
지수가 눈을 크게 뜨고, 촤르륵 돌아가고 있는 마력의 문자열들을 바라보았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이중의 나선. 그것은 그 자체로 미술작품이나 예술적인 건축물처럼 아름다운 형태를 하고 있었다. 세상엔 이런 문자도 존재한다는 말인가?
<해석 스킬이 발동됩니다.>
조건언령 :「이 혈정을 마신 자」, 「주인이 죽거나 봉인당하는 것」으로 언령에 묶여, 「피의 주인」의 부활과 해방을 위해 몸과 영혼을 바치는 충실한 하수인이 되리라.
강제주체 : 사룡 아그리올라
혈정점유율 : 사룡 아그리올라 (100%)
".......어?"
하지만 얼마나 고위의 격을 가진 체계라고 해도, 그것이 문자인 이상 해석 스킬의 풀이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용혈에 걸려있는 언령의 내용을 확인한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즉 이 피를 마시면 용의 노예가 되어, 이 용이 죽거나 봉인당했을 때 재래를 위해 뛰어다니는 노예가 되어버린다는 의미였다.
'그냥 줬다간 큰일날 뻔했네.'
완전히 함정 아이템이었다. 던전 모험가가 쓴 몬스터 백과에서도 이런 저주를 두려워해 용의 피가 얼마나 아깝든 언령이 걸려있으면 그냥 폐기하는 게 답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귀한 용의 혈정을 그리 가볍게 파기해버릴 수는 없었다. 이게 없으면 끔찍한 참극이 일어나버릴 것이다. 게다가 지수는 언령의 내용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었다. 어떻게든 조건을 우회해서 사용할 수 있게 만들 수는 없을까.
지수가 이중 나선으로 돌아가고 있는 용언을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지수가 보기에 언령은 하나의 계약서 비스무리한 것이었다. 그리고 계약서의 조항들을 면밀히 살펴보다 보면 반드시 슬쩍 빠져나갈 수 있는 빈틈을 찾을 수가 있다.
'혹시 어쩌면.'
그리고 지수가 무언가를 깨닫고 눈썹을 찌푸렸다. 그것은 하나의 가설이었다. 언령에 쓰여있는 '강제주체'라는 건 아마도 언령의 힘이 가리키고 있는 일종의 '갑'이다. 그 밑에 혈정점유율이라는 게 따로 쓰여있는 걸 보면, 이 계약의 주체는 혈정이 머금은 피의 점유율에 따라 변화하는 듯 싶었다.
'그런 거라면, 이렇게 해서 언령을 뒤집을 수 있다.'
지수가 바늘로 자신의 손가락을 콕 찔러 혈정에 핏방울을 떨어뜨렸다. 그러자 나선으로 돌아가던 문자열이 미로처럼 변화하기 시작했다. 지수는 변화한 문자열을 다시 읽어 보았다.
강제주체: 사룡 아그리올라
혈정점유율 : 사룡 아그리올라(99%), 이지수 (1%)
"좋았어."
지수가 휘유 휘파람을 불었다. 혈정에 지수의 피를 머금게 하는 것으로 점유율을 확보할 수 있었다. 신중히 쌓은 가설이 맞아떨어졌을 때의 쾌감은 언제나 짜릿했다.
다만 한 가지 사소한 문제가 있다면, 언제 지수의 점유율이 50% 이상이 될 때까지 피를 뽑냐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