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무슨 뜻인지 쯤이야 (6)
"용의 혈정."
의자에 앉아있는 백묵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찬란한 시절을 추억하는 눈빛과, 떠올리기도 싫다는 듯한 얼굴이 반반씩 섞여있는 기묘한 표정이었다.
"분명히 있기야 있지. 지금에 와서야 얻을 수 없겠다만, 대전쟁 시절에는 용종도 떡하니 돌아다녔으니까."
그 말에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지금은 던전에서 용종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는 건 용의 피는 대전쟁의 영웅인 백묵이 아니라면 얻을 수조차 없는 아이템이라는 뜻이었다. 아무리 돈을 얹어준다고 해도 매물 자체가 없는 것이다.
의자에 앉은 백묵이 천천히 다리를 꼬았다.
"꼬맹이. 무슨 일에 쓰려는 건지는 몰라도, 저건 가벼운 생각으로 하나 살 테니까 줘보라 할 만한 물건이 아니야."
그쯤이야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리스트의 가장 아래에 적혀있다는 건, 지금 불식의 창고에 있는 물건 중에서 가장 귀한 품목이라는 뜻이었다. 말 그대로 보물이라는 표현이 적당하겠지. 만약 이 남자에게 이번 사건에 대한 전후사정을 다 설명해준다 해도 멍청한 놈이라며 코웃음이나 칠 것이다.
하지만 지수는 어떻게든 용의 피를 손에 넣어야만 했다. 단지 서민하의 노래를 듣고 느낀 것이 있다거나, 괴물이 되는 걸 내버려둘 수 없다거나, 희생자가 나오는 게 싫어서라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었다. 물론 그런 이유도 있기야 할 것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친구도 아닌 남의 사정이다. 지수가 몇 천만원쯤이야 코 파면서 결제할 수 있는 부자인 것도 아니고, 남이 곤란해하는 것 때문에 자기 분수에 맞지도 않는 물건을 얻어 선뜻 기부할 만큼 정신병자는 아니었다.
언제나 말했듯 지수의 모토는 합리적인 수준에서 남을 돕는 것이었다. 호의에 묶여 손해를 보는 인간은 단순한 호구. 호의와 자신의 이익을 양립시키는 것이야말로 호인이다. 그리고 이것은 지수에게 있어서도 꼭 필요한 일이었다.
'설계는 끝났다.'
지수가 요 며칠 간의 경험에서 뼈저리게 느낀 것은, 자신의 몸이 너무나 허약하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것은 마법사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원래 동료들에게 철저하게 보호받으면서 뒤에서 주문을 쏴제끼는 게 마법사의 역할이니까.
하지만 지수는 그것이 짜증난다고 생각했다. 이길 수 있는 방법을 머리로 떠올려도 몸이 따라가 주질 못한다. 그것은 참을 수 없이 답답한 일이었다. 주문을 얼마나 빠르게 발동할 수 있든, 그걸 전투 도중에 제대로 사용할 반사신경이 갖춰지지 않으면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나 마찬가지였다.
오성화와도 같이, 정유현과도 같이, 서민하와도 같이.
신체능력 또한 초인의 영역에 반쯤 발을 걸치지 못하면, 어느 수준 이상의 싸움에는 따라갈 수가 없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 바로 그것에 대한 해답이 몬스터 백과에 쓰여있었다.
'귀족과의 계약.'
상위종의 피를 착취해 '귀족'의 위계에 올라선 뱀파이어에겐 두 부류가 있었다. 장엄한 군주와 고귀한 왕족. '로드'라고 불리는, 권속을 만드는 타입의 흡혈귀와 '프린스' 혹은 '프린세스'라고 불리는 전투에 특화된 타입의 흡혈귀.
권속을 만드는 부류의 흡혈귀는 육체가 크게 손상돼도 권속을 희생시켜 끊임없이 살아날 수가 있고, 몸을 수많은 박쥐로 바꿔 물리 공격을 무시하거나, 수많은 권속의 군세를 만들어 자신의 영토를 점점 확장시킬 수도 있었다.
그에 반해 전투에 특화된 흡혈귀는 오로지 순도 높은 마력과 피에 대한 지배력, 신체능력으로 성에 침입한 자들을 학살하는 공포의 악마였다. 그리고 이 부류의 경우, 군주가 권속을 만드는 것과는 다른 한 가지 특수능력을 가진다.
그것이 바로 '계약'이었다.
권속을 만드는 것과 달리 단 한 명에게만 쓸 수 있는 능력. 흡혈귀의 계약자가 된 존재는 힘을 각성하여 신체능력과 모든 감각, 마력이 비약적으로 올라간다. 일종의 영구적인 강화라고 해도 좋았다. 바로 그것이 지수의 계산이었다.
'이게 바로 윈윈이라는 거지.'
사실 뱀파이어의 상위종으로 거듭났을 때 어느 타입의 귀족으로 각성하느냐는 철저히 개체의 성향에 달려있기에 반쯤 도박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지수는 서민하가 후자일 것이라고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그냥 딱 봐도 아웃사이더였기 때문이다. 지수 또한 그런 성향이었기에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사정과, 지수가 설계하고 있는 그림을 백묵에게 하나하나 설명해줄 생각은 없었다. 지금 내가 그게 필요하다. 그 한 마디로 설명은 충분했다. 상대로부터 원하는 물건을 얻기 위해선, 단지 그만한 이득을 제시하면 그뿐이다.
"던전."
그리고, 지수에게는 상대가 물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만들 만한 미끼가 있었다. 그것을 백묵에게 던졌다.
"저는 들어가기 전에 던전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백묵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이 놈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곧바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지수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이 카드는 트럼프로 따지자면 조커였다. 내는 순간 이길 수 있는 필살의 패. 지수가 말을 이어갔다.
"던전의 게이트만 봐도 그 던전의 이름, 주요 속성, 등장하는 패턴, 숙지해야 할 특이사항. 전부 읽어낼 수 있습니다. 이미 한 번 이 능력으로 늪지옥 던전에 들어간 1팀을 구해준 적이 있죠. 오성화 씨에게 확인해보셔도 좋습니다."
불식의 길드장 앞에서 교섭하자는 배짱을 부리고 있으면서도, 지수는 전혀 주눅들지 않았다. 백묵은 그 어떤 표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고, 검지로 책상을 툭툭 두드렸다. 머릿속에서는 떠오르는 여러 가지 정황을 짜맞추고 있는 중이었다.
거미여왕의 늪지옥. 확실히 그때는 백묵 또한 위화감을 느꼈었다. 결코 오성화의 팀을 저평가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평소 불식 1팀의 방식과 그 던전에 대한 보고를 대조해봤을 때, 적어도 중상을 입고 공략에 실패하는 게 정상이었다.
눈앞의 꼬맹이가 하고 있는 말에는 모순이 없다. 그건 불가능하다고 반박할 수 있는 근거가 없었다. 거기에 오성화의 이름까지 꺼낸 것을 보니, 이 청년이 불식 1팀을 구해주었다는 건 아마도 사실이리라.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사실은.
"드디어, 동맹으로서의 비즈니스를 시작하자는 건가?"
이 사업은 성공한다. 반드시라고 말해도 좋았다. 만약 이지수가 하고 있는 말이 사실이라면, 실패할 가능성 따윈 1%도 존재하지 않았다.
단순히 돈이 무더기로 들어오는 수준이 아니라, 헌터 업계 자체에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만큼 리스크 컷팅이라는 측면에 있어 던전 안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능력은 절대적이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길드라는 불식이, 부디 사업에 동참 시켜 달라고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할 만한 제안이다. 이걸로 지수는 입장상이 아니라 능력상으로도, 불식과 동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지수가 용의 혈액을 얻는 데에만 급급해서 불식 길드에 이러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니었다.
'합리적으로 생각해도, 불식은 최고의 파트너다.'
원래대로라면 능력이 진짜라는 걸 증명하고, 입소문을 태우고, 그 과정에서 시정잡배들에게 귀중한 정보를 퍼주고. 끌어올 인맥과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고. 지수의 정보가 노출되지 않게 관리해줄 믿을 수 있는 브로커를 섭외하고.
그러한 수많은 절차들. 지수의 능력을 서비스할 토대를 세우려면 반드시 거쳐가야 할 통과점이었다. 그 과정엔 상당한 위험 부담이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불식의 감정표가 붙어있다면, 모든 절차를 건너뛰고 곧바로 일에 착수할 수 있다.
가장 훌륭한 것은 지수가 이 커다란 비즈니스를 위해 따로 무언가를 준비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저 의뢰가 들어온 게이트의 글자를 읽어주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크게 나왔군."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백묵이 피식 웃었다. 자신의 능력을 누구에게 들킬세랴 꽁꽁 숨기고 있는 의뭉스러운 꼬맹이지만, 오히려 그렇게 신중한 태도가 백묵에게 믿음을 주었다. 그리고 지수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는 입지를 다질 때까진 비장의 수단으로서 패에 쥐어두고 싶었다. 하지만 필요할 때에는 패를 내보이길 주저하지 않는다. 지수가 판단하기에 지금은 비장의 수단을 써서라도 얻어내야 할 걸 얻어내야 할 국면이었다.
"...그래서 대답은요."
"뭐, 좋아. 중개료는 1할 정도면 납득하겠지."
지수가 놀라서 작게 입을 벌렸다. 그건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다. 백묵이 상당한 개새끼라는 걸 감안하면 5할, 상식적이라면 3할, 마음을 써주면 2할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업의 모든 기반을 제공하는 데에 고작 1할은 너무 적었다.
"진짜요? 후회 안 하십니까?"
지수가 눈썹을 찌푸리고 묻자 백묵이 대답했다.
"흥. 돈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대체 몇 번을 말하게 하는 거냐. 이쪽은 정보를 인질로 다른 애새끼들 쥐고 흔드는 것만 해도 거스름돈이 남지. 그리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제야 너의 능력에 대해서도 윤곽이 잡히는 느낌이군."
백묵이 눈을 가늘게 뜨며 지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선 마치 거대한 뱀에게 노려봐지는 듯한 꺼림직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백묵이 서랍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펜으로 뭐라뭐라 적더니 도장을 쾅 찍었다. 지수가 서류를 받아들었다. 그것은 길드장 직인이 찍혀있는 물품 반출 승인서였다.
"용의 혈정은…그래. 계약금이란 걸로 하지."
눈을 감은 백묵이 손을 획획 내저었다.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어서 빨리 나가보라는 뜻이었다. 꾸벅 고개를 숙인 지수는 종이를 한 손에 들고 백묵에게서 등을 돌렸다. 지수가 문을 닫기 직전에 백묵에게서 마지막 한 마디 당부가 들려왔다.
"일단 말해두는데, 마실 생각이면 그만두는 게 좋을 거다."
그냥 마셔버린 놈을 본 적이 있다는 듯한 어조였다. 지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쾅 문이 닫히고, 서류를 든 지수가 담당인 윤나연을 향해 복도를 뚜벅뚜벅 걸어갔다.
***
길드 창고에 윤나연과 함께 따라온 것은 김혜성이었다. 불식 1팀의 부팀장이자 불식 길드의 실력파 마법사.
"허, 이거 참. 이걸 어떻게 따냈냐."
길드 창고를 안내해주고 있는 그는 계속해서 놀랍다는 듯 감탄했다. 사실 예전부터 이럴 것 같기는 했어. 다른 놈들 다 속여도 내 눈은 못 속이지. 너 회귀자지. 회귀자 맞지. 김혜성은 아까부터 했던 말을 계속 반복하며 지수를 추궁했다.
"소설 읽다 오셨어요?"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헌터 시험에서 보여줬던 그건. 뭐 마법진만 봐도 마법 종류가 읽히는 것도 아니고."
바로 그게 정답이었다. 지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음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전환할 화제가 필요했다.
"그런데 원래 안경 끼셨었어요?"
"하. 너도 마법사라면 척 하면 척 보고 척척 알아 채야지."
김혜성이 자랑스럽다는 듯 동그란 뿔테 안경을 치켜세웠다. 그 또한 고깔 카페의 척척박사 학파 중 한 명인듯 싶었다. 지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여기까지 따라온 이유는 하나였다. 용의 혈정에 걸려있는 보호 주문들을 해제하기 위해.
용의 혈정은 불식 길드가 보유하고 있는 아이템들 중에서도 대단한 보물이기에, 온갖 보존 및 알람 주문들로 몇 겹에 걸쳐 감싸여있었다. 김혜성이 직접 와서 주문들을 해제하지 않으면 혈정을 건드리는 순간 경보가 울리는 구조였다.
혈정 앞에 다가선 김혜성이 주문을 하나씩 벗겨 내기 시작했다. 조금 지루한 작업인지 김혜성이 지수에게 말을 걸었다.
집행부 들어갔다며, 우리 대장이 걱정된다고 연락 좀 해달라고 징징대더라. 지수는 네, 네 하고 대충 대답하며 김혜성의 손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김혜성 만한 마법사의 주문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건 커다란 공부가 되었다.
"아 맞다. 전승민 말이야. 너랑 싸웠던 그 놈 알지? 지금 장난이 아니게 성장하고 있다고. 널 뛰어 넘겠다고 이를 아득바득 갈면서 말이야. 다시 싸우게 되면 상당히 재밌을걸."
그리고 김혜성이 모든 잠금 주문들이 해제된 용의 혈정을 지수에게 넘겨주었다. 지수가 손에 든 아이템의 정보를 확인해보았다.
아이템의 정보를 확인해보았다.
[용의 혈정(血精) - 전설]
마법 생물의 정점인 드래곤의 피의 정수. 빈사상태의 인간을 죽음에서 돌아오게 하고, 마신 자를 불굴의 용사로 만들어준다는 전설이 있다. 용의 사념이 깃들어있기에, 적절한 절차를 통해 제거하지 않으면 마신 자는 견디지 못하고 죽어버린다. 마법 재료를 취급할 수 있는 소양이 필요하다.
'역시 그냥은 사용할 수 없나.'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사념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 몬스터 백과에서는 교단에 세례를 맡기거나 전문적인 네크로맨시를 사용하는 마법사를 찾아가면 된다고 했었지만, 책이 쓰여진 세계와 달리 현대에서 그런 이들을 찾는 건 극히 어려웠다. 하지만 지수는 그리 염려하지 않았다.
사념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 그것에 대해선 짚이는 바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