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무슨 뜻인지 쯤이야 (5)
피를 빨고 있던 서민하와 조우해 싸움이 시작된 지 약 삼십 초 째. 지수는 커다란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으......아아!"
서민하의 커다란 오른손이 공기를 찢어발기며 휘둘러졌다. 온갖 룬을 둘둘 말아 지수의 신체가 강화되어 있다고 해도, 콘크리트를 두부처럼 잘라버리는 힘과 속도를 가진 공격이다. 저런 것을 눈으로 보고 피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첫 번째 공격을 피할 수 있다면 행운, 두 번째 이후부터는 기적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이미 서민하의 공격은 몇 번 째나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지수가 입은 상처는 스치듯이 맞은 어깨의 찰과상 하나 뿐이었다. 지수 자신이 발톱의 궤도를 읽고 잘 피하고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서민하는 공격하면서 울고 있었다.
송곳니가 엿보이는 입가에는 추접스러운 피를 질질 묻힌 채, 새까맣게 물든 눈자위에선 눈물을 줄줄 흘리며, 한쪽 손으론 커다랗게 변이된 오른손을 거칠게 부여잡고 있다. 날뛰는 야생마의 마구를 쥐고 억누르려는 기수 같은 모습이었다.
이내 지수는 움직임을 멈추고 그냥 가만히 섰다.
서민하는 제멋대로 움직이는 괴물의 몸이 지수를 찢어발기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저항하고 있었다. 어설프게 피하려 하다가는 오히려 엇나가있던 조준이 맞아버린다. 그건 지수를 걱정하거나 그래서가 아니라, 단지 인간을 죽이고 싶지 않다는. 사람이라면 너무도 당연한 바람이었다.
쾅! 쾅! 쾅! 콰앙!
채찍처럼 휘둘러진 거대한 발톱이 연이어 땅바닥을 내리 쳤다. 하지만 모든 공격은 아슬아슬하게 지수를 피해갔다.
콘크리트 조각과 흙먼지가 휘날렸다. 지수는 자리에 가만히 서서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그런 서민하의 모습을 바라 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무대에서 부르던 노래는 자신은 괴물이라 절규하는 것 같았지만, 지금 그녀는 필사적으로 자신이 인간이라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조금 다른 의미로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불쾌한 듯 인상을 쓴 지수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가슴팍에서 꺼낸 것은 한 자루의 단검이었다.
마비의 단검. 이전에 던전에서 복면인들에게 빼앗았던 아이템이었다. 서민하의 눈동자가 흠칫 떨렸다. 곧바로 스킬을 발동하는 것으로 칼날이 깨져나가며, 안쪽에서 짙은 가스가 터져나왔다. 완전히 코앞에서 가스에 노출된 서민하의 몸이 덜덜 떨리며 경련했다.
물론 그런 독구름 안에서도 독성은 지수의 몸에 침범하지 못했다. 지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칼자루를 던져버리고, 무릎 꿇은 채 콜록이고 있는 서민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자위가 점점 흰색으로 돌아왔다. 충혈된 눈의 그녀가 말했다.
"너는, 그때 그미역......"
서민하는 이제야 이쪽의 얼굴이 보이는 듯 했다. 그때는 코주부안경을 쓰고 있었지만 같은 사람이라고 알아봐준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미역이라고? 지수가 곱슬로 흐느적거리는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눈썹을 찌푸렸다. 미역이라니. 남이 신경쓰고 있는 곳을 신랄하게 말해버리는 양반이었다.
"미역이 아니라 이지수인데요."
"미행… 하고 있던 거야."
"뭐. 괴물에 대해서 조사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지수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괴물'. 그것이 그녀에게 있어서 금구인 단어였던 것일까. 그 한 마디를 듣자마자 서민하의 몸이 거칠게 흔들렸다. 서민하는 눈물범벅에 피범벅이 된 얼굴로 자신의 어깨를 쥐어뜯었다. 그녀가 소리쳤다.
"내가 이상하다는 것쯤은 알아…! 그래도 이런 몸이 되어 버린 건 내 탓이 아니야! 싫은데도, 미칠 것 같아서. 그래도 사람을 먹어버리면 망가져버릴 것 같아서, 억지로 동물의 피를 빨면서…. 그렇다고 그냥 죽어버리라는 거야?"
서민하는 괴롭게 켈록이면서, 변명하듯이 그런 말을 내뱉었다. 지수는 콧숨을 내쉬었다. 죽인다고는 한 마디도 안 했는데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난리가 나있었다. 그래도 일단 폭주하던 것은 진정이 된 듯 했다. 어깨를 으쓱인 지수는 가방에서 생수가 담긴 페트병을 꺼냈다.
"이보세요, 진정하세요. 일단 물이라도 좀 마시시고."
지수가 페트병 뚜껑을 따 서민하에게 내밀었다. 아까부터 단검에서 뿜어져나온 가스 때문에 계속 콜록대는 게 보고 있기 힘들었다. 어찌 생각해 보면 병 주고 약 주는 꼴이라 조금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서민하는 멍하니 페트병을 바라 보았다.
그리고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덜덜 떨리는 손을 획 휘둘러 내민 페트병을 쳐냈다. 페트병이 데구르르 굴러가고, 안에 있던 생수가 부서진 뒷골목에 졸졸 흘러내렸다.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이쪽이 연상 같은데 반말을 찍찍 해대질 않나, 미역이라고 놀려대지 않나, 기침하길래 물 꺼내줬더니 꺼지라고 쳐내질 않나 상당히 싸가지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걸로 화내지 않는 것이 어른의 역할이었다.
그리고 지수를 빤히 바라보던 서민하가 물었다.
"...나를 죽이러 온 게 아니야?"
"괴물도 아니고,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죽입니까."
지수가 어이가 없다는 듯 반문했다. 너무 당연한 상식이기에 굳이 말로 할 필요도 없었다. 눈앞의 여자가 괴물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 또한 그러했다. 사람을 다치게 하기 싫다고 그렇게 괴로운 표정을 짓는 생물은 오직 사람밖에 없었다.
서민하는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더니, 이내 또 다시 적대적인 태도가 되어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지수를 노려보았다. 사람을 극도로 경계하는 야생동물 같았다.
"나는 괴물이야…. 얽혀서 좋을 거 하나도 없어."
"걱정돼서 그렇죠."
지수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 당연히, 서민하가 걱정된다는 게 아니라 서민하가 또다시 폭주했을 때 다른 사람이 습격당하지 않을까 걱정된다는 말이었다. 오늘만 해도 까딱하다간 지수가 죽을 뻔 했는데, 이런 위험천만한 계집애를 사람들 사이에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서민하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말했다.
"…도와주려는 척 하지 마. 정말로 도움이 필요할 땐 아무도 구해주지 않아놓고 이제 와서. 어차피 너도!"
"저도 뭐요."
지수가 묻자 서민하가 고개를 돌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죽고 싶지 않으면, 다시는 내 앞에 얼굴 내밀지 마…."
그 말만을 남긴 채 서민하가 비틀거리며 저편으로 걸어 나갔다. 흡혈귀 특유의 회복력 같은 것일까. 단검에서 내뿜어진 건 상당히 강력한 마비 가스였을 텐데, 그걸 직격으로 들이마시고도 이미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듯 싶었다.
그리고 남은 지수의 옆에 띠링! 알림창 하나가 떠올랐다.
<조건 2 : 악마종 1체를 제압할 것 (달성)>
지수가 헛웃음을 흘렸다. 납득이 가질 않았다. 저쪽 혼자 헛방질하고 있는 거에 대고 마비가스 한 번 맞춘 걸 제압이라고 쳐준 건가? 거 참 널널한 판정이었다. 보상으로 스킬이 들어와 있었다. 서민하는 뒷골목에서 사라진 채였다.
지수는 전화를 들어 정유현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알려 주려고 하다가, 마지막 번호 두 자리를 누르지 못하고 빤히 핸드폰을 쳐다보았다.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맴돌았다. 그리고 이내 다시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
"그게 어디 있었지......"
집에 돌아온 지수는, 즉시 방 안에 쌓여있는 책더미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분명 다음에 읽으려고 이곳쯤에 얹어놨었는데. 이윽고 지수는 찾고 있었던 책을 찾아냈다. '던전 모험가 이안의 괴물 대백과'. 저번에 고깔 카페에서 운영자에게 선물받았던 책이었다. 지수가 책을 집어들고 책상에 앉았다.
페이지를 펴 목차를 살펴보자, 지수가 원하던 내용이 확실히 존재했다. '뱀파이어'. 1부터 5까지 점수를 매겼을 때 위험도 5. 최고 레벨의 무시무시한 몬스터. 지수는 재빨리 그들의 생태에 대해 적어놓은 서술을 읽어보았다.
낮은 계위의 뱀파이어는 스스로의 흡혈충동 탓에 끊임없이 생물의 피를 섭취하지 않으면 정신이 나갈 듯한 갈증에 시달린다. 그 끝은 폭주해 저열한 괴물이 되는 것뿐이다. 흡혈충동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귀족'으로 거듭나기 위해선, 뱀파이어보다 더 상격(上格)인 생물의 혈액이 필요하다.>
지수가 정색한 채 몬스터 백과의 내용을 읽어갔다. 뱀파이어의 흡혈 충동. 그것은 참기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그대로 내버려두면 이성을 잃고 난폭한 괴물이 되어버리는 장치였다. 그건 다시 말해 서민하가 지금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를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되면 완전한 참극이다.
서민하가 결국 미쳐버려 괴물로 떨어져버리면, 출동한 헌터들의 손에 문답무용으로 죽어버리는 건 물론이요.
그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자가 나올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는 걸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스스로 충동을 억제할 수 있는 상위종이 되는 것이었다. 지수가 몬스터 사전을 덮었다.
'뱀파이어보다 더 상격인 생물의 혈액이라고.'
뱀파이어만 해도 거의 몬스터 생태계의 정점에 위치한 몬스터였다. 그보다 확실히 상위에 위치하고 있다 말할 수 있는 몬스터는 아무래도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떠오른다고 해도, 그런 몬스터의 피를 어떻게 얻을 수가 있단 말인가.
답답함을 느낀 지수가 윤나연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런 문제를 가볍게 상담할 수 있는 건 그녀밖에 없었다.
- 저기. 엄청 센 몬스터라 하면 뭐가 있을까요.
-음......드래곤 같은 거? 아니예요?
드래곤이라. 확실히 그렇지. 드래곤이면 뱀파이어 따위 상대도 안 돼지. 돌아온 대답을 본 지수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지수가 천천히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갔다.
지수의 얼굴에선 웃음이 완전히 멎어 정색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잠깐……잠깐만."
뇌리에 번개처럼 스쳐지나는 것이 있었다. 지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거칠게 서랍을 열어제꼈다. 그리고 윤나연에게 받아두었던 서류를 살펴보았다. 종이에 좌르륵 적혀있는 재료들과 수량들. 그것은 발주 신청을 할 때 참고하라고 알려준, 불식 길드의 창고에 있는 재고 물품들의 리스트였다.
처음에 적혀있는 건 하급 던전에서 대량으로 얻을 수 있는 재료들이었지만, 페이지를 넘기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값비싸고 희귀한 물품들이 있었다. 미믹의 상자, 밴시의 핵, 늪지옥의 정수. 지수의 눈이 목록을 주르륵 읽어내려갔다.
-.......용의 피 X 1
"있다."
지수가 멍하니 읊조렸다. 퍼즐 조각이 모두 갖춰졌다. 지수는 상담을 위해 윤나연의 번호에 전화를 걸었다.
"저기, 늦은 밤에 죄송한데 혹시…"
그리고 자신의 용건을 이야기했다.
* * *
다음 날. 지수는 의자에 앉아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바로 앞의 복도에서는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걷고 이야기하고 있을 텐데, 방음이 철저히 되는 것인지 방 안은 철저히 고요했다. 이미 한 번 들어와봤던 곳이었다. 다시 봐도 감상은 똑같았다. 담백하다. 거대 길드의 수장이 자리하는 사무실 치고는, 별다른 장식품이 없는 깔끔한 인테리어였다.
"......그래서. '용의 피'를 지원받고 싶다고?"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듯이. 자리에서 깍지를 끼고 있는 백묵이 코웃음을 치며 지수를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