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무슨 뜻인지 쯤이야 (3)
우우우우웅-
핸드폰이 끊임없이 울려댔다. 발신인을 확인해 보자 화면에 표시된 이름은 정유현이었다. 놀란 지수의 눈동자에 이채가 어렸다. 업무 바깥의 일로 전화할 사람은 아니라는 인상이었는데. 지수는 손에 든 빵봉지를 뜯으며 전화를 받았다.
"전화 받았습니다."
<그래 박사, 늑대다. 급한 용무가 있어서 전화를 걸었다.>
"급한 용무라고요?"
<우선은 한 가지 질문을 하지.>
지수가 빵봉지를 뜯자 고양이들이 하나둘씩 지수에게 다가왔다. 먹을 것에 금방 경계를 푸는 걸 보아하니 평소 누가 사료나 먹이를 가져다주는 모양이었다. 지수가 식빵을 조금씩 뜯어 고양이들한테 던져주었다. 이내 정유현이 말했다.
<네 상사가 남들 몰래 반인륜적인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심증이 있을 때, 규율을 어기는 한이 있어도 그걸 파헤칠 의사가 있나? 그런 의사가 없거나 조금이라도 망설여진다면, 이 통화 자체를 없었던 일로 하고 지금 전화를 끊어라.>
고양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갑자기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지? 하지만 어조로 보아할 때 시답잖은 성격 테스트나 농담 같은 것은 아닌 듯했다. 애초에 정유현은 갑자기 전화를 걸어서 그런 농담을 할 만한 인간이 아니었다. 오성화도 아니고. 지수가 대답했다.
"반인륜적인 무언가라는 게, 예를 들면 뭡니까?"
<네가 견학 때 본 아이들이 당한 일 같은 것 말이다.>
지수의 머릿속에 그때의 광경이 떠올랐다. 컨테이너 안에 갇혀있던 아이들. 팔다리의 무수한 흉터. 무기력하게 쳐져있는 눈동자. 떠올리기만 해도 불쾌해지는 기억이었다.
지수가 눈동자를 가늘게 떴다. 상사가 반인륜적인 어쩌고 하길래 횡령이나 비리 같은 걸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지금 정유현이 말하고 있는 건 그것보다 훨씬 더 끔찍한 무언가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물어볼 것도 없었다. 당연히, 그딴 짓을 하고 있는 놈을 못본 척 넘길 수 있을 리가 없다.
"물증만 없을 뿐 심증이 확실하다면, 어떻게든 조질 방법을 찾아봐야죠. 아는데 그냥 내버려둘 수 는 없잖아요."
<네가 그런 인간이라서 다행이군.>
저편에서 정유현이 대답했다. 적잖은 안도감이 섞인 목소리였다. 그리고 다시 높낮이 없는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런 말을 하게 되는 건 훨씬 나중일 거라 생각했는데. 가능하다면 조금 더 신뢰관계를 쌓고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런데 벌써 결정적인 단서까지 도달한 모양이야.>
"……결정적인 단서라고요?"
<지금 네 앞에 있는, 거대한 발톱으로 할퀸 것 같은 흔적들. 너도 본 적이 있는 자국이겠지. 나랑 같이 봤었으니까.>
그 말에 지수가 눈을 부릅떴다. 머릿속에 정확한 퍼즐조각이 딱 맞춰 끼워지는 느낌이었다. 분명 그러했다. 처음 집행부의 견학을 하던 날, 정유현과 함께 습격한 조직의 아지트. 그 건물에 이것과 똑같은 발톱자국이 수도 없이 박혀있었다.
하지만…어떻게?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정유현한테 무슨 독심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쪽이 방금 단서를 찾아냈다는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그리고 흠칫한 지수가 자신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장난감 병정을 쳐다보았다. 장난감 병정은 주인과 시야를 공유할 수 있다.
"병정 씨도 엮여있는 겁니까. 이 일에."
<역시 박사답다고 해야 하나, 머리 회전이 빠르군.>
아마도 정유현을 필두로 한 어느 파벌은 협회가 숨기고 있는 무언가를 캐내고 있고, 지수는 생각지도 못하게 그것과 깊이 연관된 단서를 발견해버렸다. 장난감 병정을 통해 그걸 확인한 김도형이 급히 정유현을 호출했고, 그 결과 정유현이 지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강 그러한 이야기인 듯 했다.
<부탁하고 싶은 건 한 가지다. 그 발톱자국에 대해서 조사해보고 싶은 게 있다. 협회에는 말하지 말아다오.>
즉 고의로 보고를 누락시키라는 뜻이었다. 집행부로서는 반쯤 배신행위나 마찬가지인 행동이다. 하지만 그것은 집행부가 하는 일의 범위를 어디까지라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뒤집힐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지수가 한숨을 쉬었다.
"'골목에 이상한 흔적이 있는 걸 보긴 했지만 딱히 위화감을 느끼진 못했다'. '조사와는 별 상관없는 문제라고 생각했기에 보고하지 않았다'……그 정도로 괜찮겠죠?"
< 완벽하군.>
"빚 하나 진 겁니다, 늑대 씨."
통화를 끝낸 지수가 전화를 집어넣었다. 전화하면서 식빵을 툭툭 던져주고 있자, 어느새 거의 열 마리쯤 되는 고양이들이 모여들어있었다. 지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흔적의 보고에 대한 건 제쳐두고서라도 조사는 계속해나갈 요량이었다.
그리고, 뒤에서부터 누군가가 노려보는 시선을 느꼈다.
지수가 고개를 획 돌아보았다. 깊숙한 뒷골목의 전봇대 옆. 그곳에는 대체 언제부터 서있었던 건지, 한 인영이 고양이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 지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커다란 기타 가방을 맨 채, 야구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는 여자였다. 머리색깔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은 정성들여 염색했는지 밝은 분홍색을 띠고 있었다.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건 남은 음식 그릇이었다.
"아하."
땡글이 안경을 쓴 지수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왜 저렇게 이쪽을 노려보고 있나 했더니, 원래 이 고양이들한테 먹이를 챙겨주던 사람인 것 같았다. 그런데 먼저 온 지수가 마음대로 새치기를 하고 있으니 그야 화날 만도 하겠지.
"아, 죄송합니다. 따로 먹이 챙겨주시는 분이 있는지는 몰라서. 이 아이들 돌봐주고 계시는 분입니까?"
지수가 기타를 맨 여자에게 다가가서 인사했다. 그 행동엔 몇 가지의 계산이 깔려 있었다. 고양이들에게 먹이를 챙겨주는 사람이라면, 아마 고양이들이 곧잘 모이는 다른 장소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이 뒷골목에 오는 거라면 여기 나있는 발톱자국에 대해서도 한 번 물어보고 싶었다.
지수가 말을 걸자 서있던 여자는 획 고개를 돌리고 골목의 구석바닥을 쳐다보았다. 낯을 가린다기보단 눈앞의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이내 허리를 숙인 여자가 전봇대 옆쪽 바닥에 음식과 물이 담긴 접시를 내려놓았다.
"…난 그냥 심부름하러 온 거야. 보고 있었던 건, 고양이들이 잘 따르는 게 신기해서.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일 텐데."
척 봐도 이쪽이 연상인데 자연스레 반말을 하는 군. 물론 그런 불만을 꺼내 시비를 걸었다간 조사에 협조해달라 부탁하는 일은 물 건너가므로 지수는 친절한 웃음을 지었다.
"고양이 참 좋아하시나 보네요."
"좋아해봤자 어차피 나한테는 안 다가와. 그리고."
말을 멈춘 여자가 잠깐 고개를 들더니, 저 멀리 바닥에 모여 식빵 조각을 먹고 있는 고양이들을 바라보았다. 이내 여자는 푹 고개를 떨구더니 기타 가방의 끈을 꽉 쥐며 말했다.
"...나는 좋아할 자격 같은 거 없으니까."
그 말에 지수가 인상을 확 찌푸렸다. 무슨 헛소리야. 고양이 좋아하는데 자격 같은 게 어딨어? 다행히 코주부 안경을 쓰고 있는 탓에 그런 표정이 밖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지수가 큼큼 헛기침을 했다.
만난 지 5분도 안 됐지만 눈앞의 여자가 상당히 비관적인 인간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아무튼 심부름이라고 하셨나, 매일 여기 골목에 오시는 거면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요. 괜찮으세요?"
여자는 싫다고도 괜찮다고도 대답하는 일 없이, 눈길만 슬쩍 돌려 지수를 쳐다보았다. 날카로운 인상 탓에 쳐다보기만 해도 화를 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수는 여자가 이쪽을 바라본 것이 긍정적인 의미라 해석하고 질문을 던졌다.
먼저 물어본 것은 제일 중요한 사항부터였다.
"여기 골목 이곳저곳에 파여있는 커다란 발톱자국 같은 것들 말인데. 혹시 뭔가 아시는 거 있으십니까?"
"뭐……"
여자의 변화는 극명했다. 깜짝 놀란 것처럼 순간 어깨가 들썩이고, 눈동자가 지진이 난 듯 흔들렸다. 짚이는 게 없는 사람한테서 저런 반응이 나올 리가 없다 여자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지수가 한 걸음을 내딛은 순간.
"몰라……내가 한 게 아니야!"
거세게 등을 돌린 여자가 도망치듯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지수는 곧장 붙잡으려고 손을 내뻗어봤지만, 여자는 곧장 담장 위로 뛰어올라 넘어지지도 않고 그 좁은 길을 달려나갔다. 파쿠르라고 해야 하나, 체조선수 뺨치는 균형감각이었다.
이윽고 뒷골목에서는 기타를 맨 여자의 자취가 완전히 사라졌다. 지수가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추적의 룬도 붙여놓지 않은 탓에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서있는 지수 쪽으로 길고양이들이 하나둘씩 다가왔다.
"저거 분명 뭔가 있는데…."
지수가 안경을 벗고 안경타올로 렌즈를 닦았다. 길고양이들은 전봇대 옆에 모여, 여자가 놓고 간 접시의 음식들을 와그작와그작 먹기 시작했다. 그걸 바라보던 지수의 눈동자에 이채가 어렸다. 단서는 바로 그곳에 있었다.
여자가 고양이들의 먹이로 가지고 온 접시엔 가게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있었다. 라이브 하우스 '라드'. 분명히 그녀는 자신이 심부름을 받고 왔다고 말했다. 심부름이라는 건 아마도 가게의 남는 잔반 같은 것을 고양이들의 먹이로 가져다주는 일 일 것이다.
지수는 핸드폰을 꺼내들고 지도 앱을 실행했다. 놀랍게도 21세기에는 인터넷이라는 훌륭한 물건이 있다. 가게의 이름만 안다면 어디에 있는지쯤은 5분만에 찾아낼 수가 있었다. 라이브 하우스는 여기서 5분 거리의 골목에 있는 가게였다.
***
"여긴가."
지수가 신기하다는 듯 눈앞의 입구를 쳐다보았다. 다른 건물과 건물 사이에 반쯤 낑겨있는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 작은 간판에는 라는 글자가 멋들어지게 적허있었다. 미리 알고서 찾아오는 게 아니라면 웬만해서는 찾아낼 수 없는 입지였다. 그냥 돈벌이에 미련이 없는 건지, 아니면 단골 수요층만 확실히 노리는 전략인 건지.
지수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옆쪽의 벽에는 너바나와 커트 코베인, 레드 재플린의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그 밑을 장식하고 있는 건 우드스톡 페스티벌의 사진이었다. 라이브 하우스 같은 가게에 방문하는 건 처음이지만, 척 보기에도 대충 통기타 치는 사람 한 명 불러두고 술 마시는 곳이 아니라 상당히 본격적으로 음악을 취급하는 곳임을 알 수 있었다.
"어머, 아직 영업 시작 안했......"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카운터에 앉아있던 여자가 느긋하게 고개를 돌려 지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말하는 도중에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지수가 쓰고 있는 코주부 안경 때문이었다. 지수는 아랑곳 않고 카운터에 다가가서 여주인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아뇨. 손님으로 온 게 아니고 사람을 찾고 있는 데요. 야구모자 푹 눌러쓰고 머리는 분홍색인 애인 데. 꼭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응? 아~ 민하?"
카운터의 여자가 당연히 알고 있다는 듯이 웃었다. 찾았다. 지수가 카운터에 성큼 손을 올리고 질문했다. 알바생입니까? 여기서 기다리면 만날 수 있을까요. 그러자 턱을 괸 여주인은, 이 사람 아마추어 같이 왜 이러냐는 듯 티켓 두 장을 흔들었다.
"오늘 밤 입장권이랑 드링크바 이용권인데. 손님이 없어서 걱정하느라 뭐 아무 것도 생각이 안 나네? 이게 팔리면 떠오를지도 모르겠고~"
간단한 이야기였다. 세상 만사는 기브 앤 테이크. 헛웃음을 지은 지수가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