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무슨 뜻인지 쯤이야 (1)
협회 건물의 회의실에 두 명의 남자가 들어왔다.
두 사내가 입은 제복의 색깔은 대조적이었다. 때 하나 묻지 않은 흰색과 늪처럼 가라앉은 검정. 하얀 제복을 입은 쪽은 얼굴에 호인이라고 써붙여놓은 듯한 쾌남이었다 관리부의 간부인 그 남자는 상기된 얼굴로 양팔을 쳐들었다.
"...대단한 청년입니다! 컨테이너가 가스에 노출된 뒤 몇 초 만에 보여준 재빠른 대응은 저희 대원들한테 보고 배우라 하고 싶을 정도였어요. 처치 과정에서도 그 청년이 건네준 아이템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 반지가 없었더라면 아마 몇 명의 아이들이 심각한 중태에 빠졌을지도 모르죠."
그리고 고개를 돌린 관리부가 맞은편에 팔짱을 끼고 서있는 흑색 제복의 남자, 정유현에게 눈길을 주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친구는 회복 마법도 사용할 수 있다던데, 가능하다면 저희 관리부에 꼭 데려오고 싶네요."
"그렇군. 집행부 쪽의 평가는 어떻지?"
회의실 중앙에 앉아있는 협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옆에서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는 건 정보부장이었다. 협회장의 시선을 받은 정유현이 한 번 콧숨을 내쉬었다.
"이쪽도 마찬가지. 사실상 유리해골 일파는 그 아이 혼자서 쓸어버린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능력이 해킹이라는 소문이 돌던데, 진짜인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던데요."
정유현은 그 날 밤 황마녀의 포탑을 잠깐 주물러 제어하던 지수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건 명백하게 평범한 마법사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넘어서있었다. 어떤 스킬을 쓴 것인지 짐작도 안 갔다. 정유현의 말에 앉아있던 정보부장이 말했다.
"...정말이라면 정보부에 절실히 필요한 인재군요."
회의실 안의 사람들에게 작은 놀람이 일었다. 과묵하기로 소문난 그가 회의 도중에 말을 꺼내는 건 별로 없는 일이었다. 말 그대로 슈퍼 루키. 집행부의 견학 목적으로 하루 동안 일한 것 뿐인데, 정보부와 관리부 양쪽에서 러브콜을 받았다.
"인기가 많군. 집행부에서는 어필할 생각이 없나?"
"뭐, 3D업종이잖습니까. 집행부란 게."
협회장의 말에 정유현이 코웃음을 치며 흘려넘겼다.
분명히 탐난다면 탐나는 인재였다. 집행부의 구성원으로서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냥 탐나는 수준이 아니라 다리를 붙잡고 매달리고 싶은 수준의 신인이었다. 하지만 집행부라는 곳은 아무래도 남한테 들어오라 권할 만한 직장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애의 입장은 지금이 딱 좋아.'
정유현이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했다. 비정규직의 동원인력, 다시 말해 반은 외부인인 위치. 유사시에는 집행부로서 일할 수 있으면서도 협회에 묶이는 일은 없다. 굳이 백묵에게 인재 소개를 부탁한 이유도 바로 그 부분에 있었다.
'아직은 의심일 뿐이다. 하지만 만약 협회를 적대할 일이 생겼을 때…움직일 수 있는 말은 최대한 많이 필요해.'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정유현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협회가 지금 뭔가 뒤가 구린 일을 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정유현은 집행부로서 결벽증을 가지고 있었고, 윗선인 협회라고 해도 선을 넘는 순간 집행할 각오가 되어있었다.
그런 정유현의 심중을 아는지 모르는지, 협회장이 말했다.
"좋아. 명백하게 F급 헌터를 넘어서는 역량을 보여줬고, 그 역량에 걸맞는 공식적인 실적 또한 세웠다. 이지수의 헌터 라이센스 랭크를 D로 격상하도록 하지."
E랭크를 통째로 건너뛴 2단계 승급. 이례적이라면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놀라거나 이견을 말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아예 C랭크를 줘버리는 건 어떠냐고 제안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빠르겠지만.
회의는 몇 가지 사안이 더 지나간 뒤에야 일단락되었다. 정보부장과 관리부의 남자가 빠져나가고, 회의실에는 협회장과 정유현 둘만이 남아있었다. 벽에 등을 기댄 정유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팔짱을 낀 채 침묵을 고수하고 있었다.
"뭐지?"
뭐 아직 물어볼 게 남아있냐는 듯 협회장이 고개를 들자, 그제야 가만히 서있던 정유현이 입을 열었다.
"…요즘 던전도 없던 곳에서 뜬금없이 괴수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협회장님께선 짐작 가는 부분이 없으신가 해서요.."
"이상한 사람이군. 왜 그걸 나한테 묻지?"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긴장이 뚝뚝 흘렀다. 먼저 시선을 거둔 것은 정유현이었다.
"그냥 답답해서요. "
어깨를 으쓱인 정유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등을 돌렸다. 회의실의 문을 열고 나오자, 정유현은 흉흉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배때기에 뱀만 들어차가지고.'
정유현이 초조함에 주먹을 쥐었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다. 절대 나타날 리 없는 장소에서의 괴수 발생, 이상할 정도로 강해진 집행부의 몇몇 놈들, 꽁꽁 잠겨있는 협회의 기밀 시설. 수상한 징조들이 몇 개나 엿보이고 있다.
이 건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연관되어있는지도 모른다. 집행부의 동료도 믿을 수 없다. 퍼즐은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맞춰나가야 했다. 건물에서 빠져나온 정유현이 전화기를 들었다. 번호를 눌러 연결된 건 불식의 길드장, 백묵이었다.
"늑대입니다. 통화 가능하십니까."
<그래, 네가 보기에 어땠지? 우리 풋내기 동맹은.>
"여러 모로 규격외더군요. 성격도 신뢰할 수 있는 쪽인 것 같고. 당장 전력이 되어달라는 건 무리겠지만 조커를 한 장 패에 쥔 느낌입니다. 역시 백묵 씨한테 부탁하길 잘 했네요."
전화 저편에서 백묵이 웃기는 일이라는 듯 코웃음을 쳤다.
백묵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사실은 그런 부탁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협회가 무언가 위험한 짓을 해서라도 강한 헌터만 만들어주면 그걸로 오케이라 생각하는 부류였으니까.
하지만 이지수라고 하는 최상급의 원석. 굴러다니는 진주를 발견했으니, 집행부는 적당한 무대가 될 거라고 생각해 보내준 것뿐이었다. 협회가 만들어낼 ‘무언가'에 기대하는 것보다, 이지수를 확실하게 성장시키는 편이 낫다는 계산이었다.
<...그쪽으로 간 건 그놈 선택이다. 그 꼬맹이 나름대로 궁리를 한 결과일 테니, 나한테 감사할 일은 아니지.>
"그렇습니까. 그 녀석은 요즘 어떻습니까?"
지수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오성하. 그와는 잠깐 동안의 인연이었지만, 집행부에서 콤비를 이루고 활동한 적도 있었다. 그때의 오성화는 복수에 미쳐서 위험한 현장만 찾아다니며 강함을 추구하고 있었다. 저런 식으로 하다간 얼마 안 있어 망가질 거었다. 저런 식으로 하다간 얼마 안 있어 망가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흥. 티비만 틀어도 소식은 들려올 거 아니냐. 온갖 곳에서 폭검이니, 대한민국의 차기 영웅이니 떠들어대고 있으니.>
"그게 아니라… 아직도 그 놈만 쫓고 있습니까?"
정유현이 그답지 않게 조금쯤 걱정된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성화의 원수. 인형사(人形使)라고 불리는 괴인.
워낙 수많은 각성자들을 희생시킨 탓에, 집행부에서도 중요 수배범으로 지목되어 있는 악질이었다. 티비나 뉴스에서 보이는 오성화는 불식 1팀이라는 동료도 만들었고, 상당히 성격이 밝아졌기에 집착에서 벗어났나 생각하고 있었지만....
<당연하지. 예전부터 지금까지 쭉, 그놈 말고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거다. 숫총각 첫사랑도 그것보단 안 심할걸.>
"그렇습니까."
사실 정유현 또한 알고 있었다. 오성화는 의리가 깊은 남자였다. 동료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 이상으로, 지금도 인형사의 도구가 되어 이용당하고 있는 동료의 시체를 박살내주는 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추모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저희 쪽에서도 인형사의 정보가 잡힌다면 연락하도록 하겠습니다. 솔직히 저희 힘으론 조금 까다로운 상대니까요."
<솔직히 말해. 새치기하면 오성화 놈이 화낼 것 같다고.>
"뭐. 옛 후배에 대한 정이라는 것도 있고요."
정유현이 비즈니스 스마일을 지으며 대답했다. 이내 백묵과의 통화를 끊고서 한숨을 내뱉자, 표정은 원래의 무감정한 그것으로 돌아왔다. 협회를 향한 견제에 원래 집행부로서의 업무까지. 신경써야 할 문제가 산더미 같아 심경이 복잡했다.
"당분간 그 애 뒷바라지는 못해주겠군."
늑대탈을 쓴 정유현이 건물 복도를 뚜벅뚜벅 걸어갔다.
***
"여기, 집행부의 제복과 그때 빌려주셨던 반지입니다!"
새하얀 제복을 입고 있는 청년이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말했다. 초롱초롱한 눈동자엔 이쪽을 향한 선망이 담겨있었다. 협회 안에서 집행부는 불길하다 기피받는 분위기라고 설명을 들었었는데, 이 청년의 반응을 보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아, 감사합니다......"
지수는 부담스러운 시선에 쓴웃음을 지으며 옷과 반지를 받아들었다. 집행부 근무 중이라 콧수염이 달린 땡글이 안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게 다행이었다. 지수는 저 반짝이는 눈동자와 똑바로 눈을 마주치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집행부에 엄청난 사람이 왔다고 관리부에서 난리도 아니었거든요! 역대 최초로 필기시험 만점을 받은 천재에다, 가스 테러 상황을 가볍게 뒤집어버리고, 해독 아티팩트를 상비하고 있는 철저함과 회복 마법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냉철하고 스마트한 마법사시라고! 이거 갖다드리러 심부름하는 역할도 가위바위보 다섯 번 이겨서 따낸 거거든요!"
마치 기관총처럼 온갖 찬사들이 쏟아져나왔다.
"네, 일단 진정하시고."
"이건 저기 자판기에서 뽑아온 건데! 꼭 마셔주세요! 저희 선배님들도 고맙다는 말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청년이 지수에게 음료수 캔을 넘겨주었다. 이렇게 빨리 윤나연 씨보다 더 방방 뛰는 사람을 만날 줄은 몰랐는데. 지수가 식은땀을 흘렸다. 대체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지수에 관해서 관리부에 상당히 과장된 소문이 퍼져있는 것 같았다.
지수가 건네받은 새까만 제복 코트를 대충 걸치자, 한 발짝 더 다가온 청년이 지수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
"그 이상한 안경도 처음엔 뭔가 싶어서, 패션 센스가 좀 이상하신 건가 싶었는데. 마법사들 사이에선 그게 와따라면서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네요!"
"..…"네?"
지수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그냥 멋있지 않나…? 그보다 이게 마법사들 사이에서 와따라는 말이 대체 무슨 뜻이지. 어느 새 자기도 몰래 유행을 따라가고 있는 트렌드의 선두 주자가 되어 있었던 건가? 지수가 눈썹을 찌푸리자 환하게 웃은 청년이 양쪽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저희 선배한테 들었거든요! 땡글이 안경과 척-멘이라는 구호는 '한 마법사를 따르는 학구열 넘치는 마법사들의 증표'고, '척척박사'라는 건 비공식적으로 모든 각성자가 인정하는, 세계 최고의 마법사의 이름이라고!"
웃은 청년이 복도를 지나가고 있는 한 남자 쪽을 가리켰다. 그곳을 걷고 있는 땡글이 안경을 쓴 한 남자는 잠시 이쪽을 보더니 동료를 바라보는 듯한 유대감 넘치는 얼굴을 하고,
"척-멘."
그런 의미불명의 구호를 속삭이며 엄지를 척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