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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격외 등급 해석사-25화 (25/176)

25화.  여기 알바생인데요 (5)

"누가 이미 한 번 들쑤시고 간 모양이군."

공사가 덜 되어 철골이 여기저기 드러나있는 아파트. 정유현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지수는 옆의 벽에 손을 가져다대보았다. 외벽 이곳저곳엔 커다란 발톱자국이 패여있었다. 검에 의한 흔적이라기보단…오히려 몬스터의 그것 같았다.

싸움의 흔적은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더 심해졌다. 핏자국과 깨진 돌덩이들. 집행부 이외에도 이 조직을 한 발 먼저 습격한 존재가 있었던 것이다. 폐공장 터에서 아이들을 가둬두고 있던 컨테이너의 위치를 바꾼 것도 그 때문이겠지.

그리고 그런 전투의 흔적은 어느 층을 기점으로 뚝 끊겨있었다. 정유현을 바라보자, 그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말했다.

"혼자서 싸우다 진이 빠져서 도망친 모양이군. 그 덕에 경비도 뭣도 없이 텅텅 비어있긴 한데. 위험한 녀석이네."

"위험하다고요?"

"상대가 범죄자고 뭐고, 자격 없는 각성자가 마음대로 사람을 패면 중죄거든. 그쪽도 집행부 집행 대상이다."

늑대탈이 담담히 말했다. 나쁜 놈들이랑 싸웠건 뭐건 예외 같은 건 없다는 말투였다. 각성자에 대한 취급은 그만큼 예민한 문제라는 거겠지. 지수와 정유현이 계단을 올라갔다. 바로 위가 아파트의 최상층. 추적의 룬이 가리키고 있는 장소였다.

아파트의 맨 윗층은 지금까지의 난장판과 달리, 상당히 잘 정비되어 있었다. 복도의 벽 또한 멀쩡하고 문들이 제대로 달려있다. 반쯤 부서진 폐허가 아니라,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경비들이 서있었다.

"저, 저 녀석! 저 녀석이야! 저 녀석이라고!"

최상층에 발을 디민 순간. 응급처치라고 할까, 몸에 거즈와 붕대를 둘둘 말고 있는 남자가 노발대발하며 이쪽을 삿대질했다. 아까 폐공장 터에서 도망친 사내였다. 그 말에 앉아있던 남자들이 다들 벌떡 일어나 이쪽을 노려보았다.

"너희들 뭐야, 여긴 어떻게…!"

그리고 그것보다 늑대탈을 쓴 정유현의 대응이 빨랐다.

정유현이 한쪽 손을 드는 것과 동시에, 연보라색의 힘이 복도에 깔렸다. 그때와 똑같은 압착 공격. 이미 한 번 당해본 적이 있는 남자의 얼굴이 직전 공포로 일그러졌다. 이내 복도가 통째로 흔들리며 우드득 소름끼치는 소리가 났다.

"가지."

그걸로 끝이었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남자들을 내버려두고, 정유현이 앞쪽의 문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피를 토한 남자들이 어떻게 됐는지는 정말 아무 관심이 없다는 투였다. 소름끼치도록 강하지만 그와 동시에 소름끼치도록 잔혹했다.

문을 열자마자 정유현은 안쪽을 제압하기 위해 손에 힘을 실었고, 그 순간 무언가를 눈치챘다. 판단의 순간은 찰나였다. 눈을 휘동그레 뜬 정유현은 곧바로 공격하려던 것을 멈추고, 옆으로 뛰쳐들어 지수 앞을 막아섰다.

날아오고 있는 건 마력으로 되어있는 포탄들이었다. 정유현은 급히 중력의 방벽을 형성해 포탄의 궤도를 일그러뜨렸지만, 한 박자 빨리 발사된 포탄들을 전부 땅에 내리꽂히게 만들지는 못했다. 누구도 이런 사태를 상정해둘 수는 없다. 방심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아주 약간의 빈틈. 하지만 돌아온 대가는 참혹했다.

".......큭!"

방벽을 뚫고 지나온 맨 앞의 포탄이 비스듬한 정유현의 다리에 작렬했다. 뼈가 깨지는 섬뜩한 파열음이 울렸지만 정유현은 비명 하나 흘리지 않았다. 한쪽 발이 뭉개진 정유현이 털썩 쓰러졌다. 지수가 황급히 회복의 룬을 발동하려 했다.

"늑대 씨!"

"안 돼! 스킬 쓰지 마!"

하지만 그런 지수를 정유현이 고함치며 제지했다. 무언가 깨달은 바가 있는 것 같았다. 지수가 우뚝 움직임을 멈추고 앞을 쳐다보았다. 방 안에 있는 건 의자에 앉아있는 한 남자와, 십수 명의 무장 한 사내들. 척 봐도 전부가 각성자였다.

"응? 뭐야. 그 괴물년이 아니잖아!"

"괴물 년……?"

"하. 옷 꼬라지를 보니 협회 놈들인가. 언제 냄새를 또 맡아선, 지긋지긋한 놈들이야. 일단 얼굴이나 한 번 보지?"

의자에 앉아있는 남자는 옆에 우뚝 서있는 거대한 로봇 청소기 비슷한 것을 사랑스럽다는 듯 매만지고 있었다. 저것이 아마도 방금 포탄을 쏘아낸 물건일 것이다. 기묘한 장치를 보며 지수가 눈썹을 찌푸리자, 쓰러져있는 정유현이 말했다.

"포탑이다. 미리 입력된 조건에 따라 자동으로 움직이고, 지정된 횟수 만큼 공격할 때까지 사라지지 않는 구조물."

"포탑이요……?"

"아마 트리거는 범위 안의 누군가가 스킬을 사용하는 순간일 테지. 분위기를 보니 아군 적군 따위는 가리지 않나보군."

그 말대로 무장한 남자들은 무턱대고 공격을 시도하지 않고, 실실대며 이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미 상황이 종료됐다 판단해서 여유를 부리고 있는 거라 생각했지만, 그것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의자에 앉은 남자가 말했다.

"잘도 아는군. 보통 첫 공격을 막는답시고 스킬을 몇 개나 더 발동하다 포탄세례를 맞고 죽는데 말이야. 그 찰나에 판단을 끝내고 최소한의 피해로 끝내다니. 여간내기가 아니야."

"그거 주인이랑 한 번 싸워본 적이 있어서."

상황이 안 좋아. 혀를 찬 정유현이 주변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에게 이 상황을 타파할 방법이 있기는 했다. 문제는 그 기술을 썼다간 주변까지 말려들어 이 건물이 통째로 무너질 테고, 자신이라면 몰라도 신입인 박사는 확실히 죽어버릴 거라는 사실이었다. 주먹을 꽉 쥔 정유현이 신음했다.

"황마녀 그 씨발새끼……사람 좀 가려가면서 팔라니까."

상황은 간단했다. 이 안에서 누군가 하나라도 스킬을 발동한 순간, 그 즉시 저 포탑이 사격한다. 문제는 스킬 사용을 감지한 뒤 조준하고 발사하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웬만한 스킬로는 대응할 타이밍을 못 맞춘다. 다시 말해 포탑을 부숴버리기 전까진 단순한 육탄전으로만 싸워야한다는 뜻.

"정말 멋진 물건이야. 제 아무리 날고 기는 각성자라도, 스킬만 사용 못하면 무서울 게 없지. 숫자로 밟아버리면 그뿐."

의자에서 일어난 남자가 메스를 할짝이며 말했다.

"별 미친년한테 습격당해서 스트레스 쌓이고 있었는데. 잘 만났다, 집행부 개새끼야. 우리 업계 사람들이 너희 버러지들을 얼마나 미워하는진 잘 알고 있지? 눈알에 꼬챙이를 박고, 이름을 샅샅이 뒤져서 일가친척까지 싹 담가버릴 거다. 아무도 우리한테 대항할 생각 못하게."

늑대탈을 쓴 정유현이 식은땀을 흘리며 계산기를 두드렸다. 이쪽은 개인이 아니라 조직이다. 시간만 끌면 증원을 기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버티지? 순간 정유현의 발을 감싸는 빛이 있었다. 그리고 상처가 아물어가기 시작했다.

".......응?"

"뭐야, 저거 뭔데!?"

방 안의 남자들이 입을 쩍 벌리며, 콧수염 안경으로 얼굴을 가린 지수를 삿대질했다. 지수는 포탑에게 공격당하는 일 없이 자연스럽게 회복의 룬을 발동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스킬을 사용 하는 것'이 표적이 되는 조건이라면, 지수는 얼마나 마법을 사용하든 그 조건에 해당사항 없었다.

지수가 사용하는 룬 마술은 퀘스트로 얻은 것이 아니다. 레벨 업이나 스킬 포인트로 얻은 것도 아니다. 지수 자신이 원리를 읽고 이해해, 머리를 쥐어뜯으며 스스로 개조해서 만들어낸 마법이었다. 시스템의 도움을 받지 않고 마법을 쓸 수 있는 지수는, 애초부터 '스킬 발동' 따위 하지도 않았다.

"이건…. 너 대체?"

늑대탈을 쓴 정유현이 경악한 눈으로 지수를 바라보았다.

"왜 포탑이 공격을 안하는 거냐! 너는 대체 뭐냐!"

"여기 알바생인데요."

대답한 지수가 허공에 손가락을 휘저었다. 주황 색 불의 룬은 이윽고 격렬한 화염이 되어 연장을 들고 있는 사내들을 덮쳤다. 하지만 역시 지수보다 강한 각성자이기 때문인지, 룬마술에 직격당해도 고통스러워 할뿐 곧바로 쓰러지진 않았다.

"이런 씨발! 불량품을 쳐 넘겨주고……!"

포탑이 고장나버린 거라고 생각한 사내들 중 한 명이 스킬을 발동했다. 하지만 그 즉시 포탑은 고개를 돌려 정확한 조준으로 흉탄을 쏘아보냈다. 포탄에 직격당한 남자가 벽까지 날아가 부딪혀 쓰러 졌다. 지수가 정유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걸을 수 있어요?"

"충분하다. 견학생한테 도움을 받다니 체면이 말이 아닌데."

늑대탈이 쓴웃음을 지으며 일어섰다. 그리고 안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컴팩트한 디자인의 송곳이었다. 딱 봐도 단순한 송곳이 아니라 상당한 힘이 깃든 무기였다.

"일단 버프 걸어드릴게요." 지수가 형형색색의 룬들을 정유현에게 깃들게 했다.

"제 아무리 날고 기는 능력자라도, 스킬만 사용 하지 못하게 하면 숫자로 밟아버릴 수 있다고 했었나."

늑대탈이 웃으며 사내들을 향해 걸어나갔다. 서로 스킬을 사용할 수 없다면 무기와 능력치가 좋은 쪽이 이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이쪽은 룬마술의 보정까지. 이렇게까지 차려진 밥상이라는 게 어울리는 상황도 없었다. 수로 짓밟으면 그만이라고? 고문을 해서 일가친척들까지 다 죽여 버리겠다고? 정유현이 차갑게 웃었다.

"주제파악 좀 해라, 양아치 놈들아."

사내들 또한 나름대로 강한 각성자일 텐데, 둘러 싸고 연장을 아무리 휘둘러도 늑대탈의 남자에게는 닿지조차 못했다. 단순한 능력치 차이 때문이 아니었다. 경험해온 싸움의 숫자가 달랐다. 그 동안 지수는 포탑을 파괴하기 위해 달려갔다.

"그냥 부수면 되나……어?"

지수가 포탑에 접근하자, 스킬 사용자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문자들이 허공에 주르륵 떠올랐다. 수많은 안내창들. 엔지니어들의 전문적인 기계처럼 극도로 복잡한 인터페이스였다. 하지만 지수의 눈에는 그 문자들이 전부 해석되었다.

"뭐야. 이거…."

지수가 신기하다는 듯 손가락을 누르며 화면을 조작했다.

<사용자 등록을 완료했습니다. 1레벨 사용자의 권한이 부여됩니다. 주요 권한은 세부 명령의 변경입니다.>

포탑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에, 싸우던 남자들이 지수 쪽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서있던 포탑은 사내들을 향해 포구를 돌리고 있는 채였다. 최악의 적이 지금, 가장 든든한 아군으로 돌변했다. 있을 수 없는 일에 남자가 지수에게 소리쳤다.

"너, 너, 대체 뭐하는 놈이냐!"

"그러니까, 여기 알바라니까요."

지수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걸 이렇게 하면 되나. 지수는 신기하다는 듯 포탑에 뜬 제어창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변경한 명령은 <얼굴에 가면을 쓰고 있지 않은 인간을 향한 무차별 제압 사격>. 이런 식의 명령으로는 금세 허용된 공격횟수를 다 써버리고 사라지겠지만, 어차피 자신 물건도 아닌데 그런 것 따위 알 바 아니었다. 마음껏 쏴 제끼고 사라지든 말든 방치해두면 그만이다.

"자. 잘 피하시고. 집행 시작합니다~!"

포탑 뒤에 선 지수가 한 손을 들고 익살스레 말했다. 철커덩, 철커덩, 철커덩. 처형 대상들을 확인 한 포탑이 소름끼치는 장전음을 흘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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