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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격외 등급 해석사-23화 (23/176)

23화.  여기 알바생인데요 (3)

밤의 폐공장터는 끔찍하게 어두웠다. 요즈음의 길거리는 항상 켜져있는 가로등 덕분에 밤에도 그리 어둡지 않지만, 이곳에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진짜 밤이 늪처럼 깔려있었다. 한 치 앞도 제대로 분간할 수 없는 어둠에 지수가 불평했다.

"불빛 켜고 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안 돼."

늑대탈의 남자가 한 마디로 일축했다. 한숨을 쉰 지수가 고개를 돌려 저편의 길거리를 바라보았다. 바로 저쪽은 저렇게 불빛이 반짝이는데 여긴 어떻게 가로등 하나가 없냐. 지수가 어둠에 익숙해지려 눈을 끔뻑이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철제 컨테이너가 몇 개고 늘어서있는 공터. 한쪽에는 크레인 같은 기계가 녹슨 채로 방치되어있었다. 인기척 또한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곳에 무언 가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물론 정보가 있으니까 이렇게 찾아온 거겠지만.

"2번 컨테이너, 맞군. 여기다."

이내 우뚝 멈춘 정유현이 한 대형 컨테이너의 문을 열어젖혔다. 조심스럽게 불을 켜자, 안쪽은 엉망진창으로 어질러져있는 빈 공간이었다. 중앙의 바닥에는 새빨간 스프레이로 뭐라뭐라 낙서가 되어있었다. 정유현이 안쪽으로 걸어갔다.

"한 발 늦은 건가…?"

늑대 탈을 쓴 정유현은 엉망진창으로 어질러져 있는 내부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이거 어디서 한 번 쏘여갖고 급히 날른 것 같은데. 우리 조사부가 뒷덜미를 잡혔을 리는 없고. 다른 놈들이랑 항쟁이라도 있었나? 타이밍이 나빠. 혼잣말하던 늑대탈이 쯧 하고 혀를 찼다. 그 동안 지수는 바닥의 낙서에만 주목하고 있었다.

<해석 스킬이 발동됩니다.>

바닥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지수가 정유현을 불렀다.

"저기요, 늑대 씨."

"왜. 박사."

"오늘은 견학이라고 하셨잖아요. 적성 맞나 보는 거니까,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그냥 보고만 있으면 된다고."

"그래. 아무 것도 안 하는 게 오늘 네 일이야."

"단서 찾아냈는데. 그것도 말하면 안 되는 건가요?"

그 말에 현장을 확인하던 정유현이 덜컥 멈추었다. 무슨 소리지 그게? 늑대탈이 획 고개를 돌아보았다.

"말해 봐."

"이 그래피티요. 보니까 B03의 4번으로 이동했다는데요."

바닥에 스프레이로 찍찍 그려져있는 낙서는 단순한 낙서가 아니라, 암호를 알고 있는 동료에게 공유하는 하나의 메세지였다. 물론 체계를 갖춘 문자인 이상 해석 스킬을 가진 지수는 암호 따위 몰라도 해석할 수 있었다. 늑대가 침을 삼켰다.

"너 능력… 진짜 해킹 아니냐?"

"해킹으로 이런 걸 어떻게 알아내요."

"…어쩌면 넌 집행부보다 조사부가 어울릴지도 모르겠군."

진지한 목소리로 말한 정유현이 스마트폰을 꺼내 컨테이너 안의 사진을 찍었다. 이내 불을 끄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컨테이너에서 나온 두 사람은 재빨리 걸음을 돌렸다. 몇 개의 구획과 단지로 나누어진 폐공장 터는 끔찍하게 넓었다. 하나하나 조사하려면 끝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목적지가 있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B구획 3단지의 4번 컨테이너.

"여긴가."

정유현이 망설임 없이 컨테이너에 다가갔다. 녹슨 미닫이문을 옆으로 치우자, 안쪽에는 도어락이 걸려있는 철제 잠금장치가 있었다. 아무 것도 없는 컨테이너에 이런 장치를 해두었을 리가 없다. 당첨이었다. 늑대탈을 쓴 정유현이 놀랐다는 듯 말했다.

"솔직히 기대도 안 하고 있었는데. 진짜 척척박사군."

"그런데 이제 어떡하죠?"

지수가 코쟁이안경의 매부리코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도어락의 비밀번호 같은 걸 알고 있을 리가 없다. 지수의 해석 스킬도 만능은 아니다. 자물쇠를 슥 쳐다본다고 비밀번호를 알아낼 수는 없었다. 그러자 정유현이 코웃음을 쳤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늑대탈을 쓴 정유현이 문 앞에 한쪽 손을 올려 놓았다. 그러자 뿌드득, 무언가가 비틀리는 소리가 났다.

"열어보지 말라고 써있으면, 찌그러뜨려서 열어 봐야지."

정유현의 손에서 터져나온 건, 연보라색 힘의 소용돌이였다. 그것이 작렬한 순간, 철제의 도어락이 통째로 찌그러진 채 무너졌다. 그냥 부숴버리고 들어갈 준비가 된 인간에게, 잠금장치 따위의 소극적인 저항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자물쇠가 달린 문이 쿵, 하고 쓰러지며 먼지를 일으켰다.

'무슨 힘이야 대체?'

뒤에서 지수가 경악에 침을 삼켰다. 대체 뭘 어떻게 한 건지는 몰라도, 철문을 꽈배기처럼 비틀어 버리다니. 완전히 괴물이다. 적어도 지금의 지수로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위력이었다. 집행부 사람들은 다 이만큼 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먼지가 걷히고 있는 앞에서 정유현의 손이 지수를 제지했다.

"잠깐 멈춰."

"네?"

"일단 거기 서서, 심호흡 몇 번 하고 들어와."

정유현이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늑대탈 안에서 흘러나온 것은, 지금까지의 대화 중에서 가장 진중한 목소리였다. 안에 대체 뭐가 있길래 저러는 거야. 어깨를 으쓱인 지수는 몇 번 건성으로 심호흡을 한 뒤, 컨테이너 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컨테이너 안에 있던 것을 바라보았다.

"……어."

안에 있던 '그들‘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목구멍과 코끝이 타오르듯이 뜨거워졌다. 지수는 자신 스스로가 웬만한 일엔 당황하지 않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몇 번을 구부러질지언정 꺾이지는 않는 유연함이 있다고. 어지간한 상황은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받아넘길 수 있었다. 실제로 던전에서 복면인들에게 습격당했을 때도 지수는 전혀 패닉에 빠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세상에는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라는 게 존재하는 법이었다.

"뭐야."

그곳에는 몇 명의 아이들이 앉아있었다. 하나같이 빼빼 마른 몸을 하고서, 팔다리에는 아직 다 아물지도 않은 상처가 몇 개나 나있다. 어떤 아이는 손톱으로 끊임없이 목을 긁적이고 있었고, 어떤 아이는 무릎을 껴안은 채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들은 갑자기 문을 부수고 나타난 지수와 정유현을 보고서도 자신들을 도와주거나 구해주러 온 사람이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듯, 그저 철저히 구석으로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쪽이 움직일 때마다 조금씩 몸을 떨었다. 완전히 폭력에 절여져서 마음이 꺾여있다. 정색한 채 굳어버린 지수가 정유현에게 물었다.

"뭐예요. 이거."

"각성자들이다. 아마 버프나 회복 스킬에 각성한 거겠지. 생각보다 흔한 일이야. 이렇게 가둬두고 사육하는 거."

지수의 상식을 뛰어넘은 광경이었다. 말 그대로 버프를 짜내는 가축 취급이다.그야 그런 스킬을 가진 각성자라면, 던전 안이 아니라 밖에서도 활용 여지나 상품가치는 충분히 많았다. 그리고 상품가치와 수요가 있으면 그걸 이용하려는 놈들도 반드시 나타난다. 지수도 조금쯤 경솔하게 움직였다면, 뒤가 구린 인간들에게 잘못 걸렸다면, 이런 처지가 되어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게 아니라."

정말로,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지수가 가까스로 한 마디를 내뱉었다.

"……애들이잖아요."

"애들이지 그럼. 맨정신으로 이런 짓거리를 하는 놈들이 그런 걸 일일이 신경써가면서 납치하겠어."

늑대탈 안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무감정했다.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지수가 뛰쳐나가려는 순간, 늑대탈을 쓴 정유현이 지수의 손목을 잡았다. 뒤돌아본 지수에게 정유현이 말했다.

"내버려둬라. 저 애들 구하려고 온 거 아니야."

"...뭐라고요?"

눈앞의 인간이 방금 뭐라고 지껄인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버려두라고? 이 애들을 그냥 여기 버려두고 간다.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지수가 정유현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눈앞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해주의 비술'의 해금 조건이 달성되었습니다! >

1. '마도의 이해' 스킬에 도달했으며 지력 100 이상일 것

2. 마력 제어 보정(추가 캐스팅 속도)이 30% 이상일 것

3. 용납할 수 없는 것에 대해 격한 분노를 느낄 것

해주의 비술을 발동하기 위해선 특수한 종류의 마력이 필요합니다. '해주의 비술 : 첫 번째 시련'을 진행하기 위해서, 마력에 감정을 담는 과정을 성공시켜 주십시오..

해주의 비술의 발동에는 특수한 마력이 필요하다. 그것이 지수 혼자서 이론을 통해 해주의 비술을 재현해보려고 해도 제대로 되지 않았던 이유였다. 애초에 준비물이 갖춰지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고대하던 순간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지수에게 알림창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이거 놔!'

지수가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는 정유현의 손을 강하게 떨쳐냈다. 달려가는 지수의 눈에 온갖 흉터로 뒤덮인 아이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저런 꼴을

보고도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가라고? 그런 것이 '집행부의 적성'이라는 거라면, 엿이나 먹으라고 해라. 그딴 곳에서 일하는 건 이쪽에서 사양이었다.

"상사 명령이다. 가만히 있어."

늑대탈을 쓴 정유현이 한 손을 지수 쪽으로 들어올렸다. 순간, 연보라색 힘이 달려가던 지수를 바닥에 내리꽂았다. 무릎꿇은 지수는 온 힘을 다해 일어나려고 했지만, 위에서 내리찍히고 있는 압력을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상사 명령은 무슨…. 지수가 마력을 뿜어내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뭔가 착각하고 계신데…. 저 아직 계약서에 사인 안 했거든요."

"그래서."

"이거 풀라고요."

"잘도 까부는군. 아주 구제불능이야."

살기등등한 두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혔다. 몇 초 뒤. 정유현이 피식 코웃음을 치는 것과 함께, 지수를 묶고 있던 압력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 정유현이 지수에게서 등을 돌렸다. 조사부가 더 어울릴 거라던 말은 철회하지. 그가 웃었다.

"집행부에서 일할 거면 그래야지. 합격이다."

"...어?"

어안이 벙벙해진 지수가 눈을 끔뻑였다.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따라갈 수가 없었다. 주머니에 손을 넘은 정유현은 부서진 컨테이너 문 앞에 서서, 폐 공장터를 바라보며 말했다. 한 손으로 흔들고 있는 스마트폰은 협회와 연결되어있는 채였다.

"말을 조금 오해했나 본데. 구출이니 그 후의 처리니 하는 건 집행부의 일이 아니야. 그런 ‘제대로 된 일'은 담당하는 녀석들이 따로 있거든. 우리가 하는 일은 그런 게 아니라."

제대로 돼먹지 못한 일 쪽이지. 구제불능들 모임이라서 그런 것 말고는 할 줄도 몰라. 어두운 저편에서 달려오는 발소리들이 들려왔다. 하나가 아니라 수많은 발소리였다. 그래. 잠금장치를 힘으로 박살내버렸는데, 당연히 경보도 울렸겠지. 그러면 당연히 원흉들도 알아서 제 발로 찾아와줄 테고. 집행부가 할 일은 바로 거기에 있는 거야.

저 멀리서 불빛을 켜고 다가오고 있는 자들. 폐 공장터에 수많은 남자들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애들 다 데려와! 연장 챙겨서! 아무도 못 나가게 출입구 다 틀어막아! 그 발소리와 목소리들 전부가 너무 사랑스럽다는 듯 늑대탈이 웃었다.

"너는 견학이니까, 거기서 보고 있어라."

늑대탈을 쓴 정유현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집행부의 일처리 방식은 지극히 단순했다. 후폭풍 같은 건 신경쓰지 않는다. 방해물은 전부 치워버리고, 현행범은 그 자리에서 다 밟아버린다. 목표는 철저한 과잉진압으로 공포를 심어주는 것. 과정과 절차를 무시했다는 비난은 전부 협회장 혼자서 떠맡는다.

그들이 상대하는 건 단순한 범죄자가 아니라 각성자 집단이다. 그 정도의 초강수를 두지 않으면 억제할 수가 없었다. 늑대 탈을 쓴 정유현이 다가 오는 남자들에게 천천히 손바닥을 들었다. 정유현의 손 위에서 연보라색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쥐포나 돼라."

달려오던 사내들과 함께, 컨테이너 하나가 통째로 우직 짓밟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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