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여기 알바생인데요 (1)
요 일주일 간 지수는 거의 방 안에 박혀만 있었다.
사실 방에 박혀있었다고는 해도 하는 일 없이 노닥거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전 끝내놔야 할 것들이 산더미같이 쌓여있었다. 익힌 주문들을 룬 마술 방식으로 완전히 정립하는 것, 불식 길드에 발주한 재료로 비약을 만드는 것, 틈틈이 카페에 마법 강의글을 작성해 올리는 것.
[댓글 (141)]
골드메테오 : 척-멘.
왼팔의흑염통 : 척-멘.
척척박사팬1호 : 좋은 글 감사합니다. 다른 부분은 다 이해됐는데 원소 변환할 때 상극 속성은 대칭으로 대입한 다음 뒤집기만 하면 된다는 것 말 인데요. 마나를 발현시킬 때 균형이 맞게 하려면 좌우 뿐만이 아니라 앞뒤로도……(더 보기)
검은탑: 척-멘.
샌드위치:척척박사님 좋은 글 감사드려요
"이건 또 언제 다 답해주지…."
지수가 골머리를 앓으며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반응이 뜨거워도 너무 뜨거웠다. 이론이나 요령의 기초부터 시작해서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진도를 풀어나가다보니, 벌써 카페에 올린 강의글만 수십 개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런 탓에 요즈음 카페의 화제는 거의 척척박사의 강의글에 대한 이야기 뿐이었다. 추천수로 게시글을 정렬하면, 한 페이지 통째로 지수가 올린 글 밖에 보이지 않았다. 고깔 카페의 멤버들은 거의 찬양 일색의 광신도 집단이 되어있었다. 이쯤 되면 그냥 척척박사 팬카페로 개명해도 될 정도였다.
'하기야, 워낙 희귀 직종이니까.'
이른바 마이너의 서러움이라고 할까. 전사나 레인저처럼 절대수가 많은 직종의 경우엔 초심자들의 입문체계가 이론적으로 잘 정립되어있는 편이고, 커뮤니티에 공략이나 팁 같은 것도 활발하게 올라왔다. 하지만 마법사의 경우는 달랐다.
완전히 고인물인 데다가 숫자도 훨씬 적다. 교류가 활발히 이뤄질 수 있는 구성원의 절대수 자체가 부족했다. 고깔 카페를 만든 운영자 또한 그것을 염려하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들도 서로 뭉치고 도우며 살아야 입지를 확고히 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척척박사'라는 닉네임을 한 지수의 등장은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을 것이다. 회원 혼자서 체계화된 팁과 지식을 카페에 마구마구 올려주니 그것을 양분으로 카페가 활성화되는 건 당연했다. 지금은 입소문을 타 마법사 각성자 중 고깔 카페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 였다.
'상생 관계라고 할 수 있으려나.'
카페 운영자와 지수 둘 모두, 순수한 호의라기보다는 근저에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고 있었다. '척척박사'의 활동들은 일견 봉사활동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단순히 책을 모으겠다는 일차원적인 의도 뿐만 아니라 지수의 인지도, '척척박사'라는 브랜드 자체의 가치를 높이려는 계산 또한 들어가있었다.
마법사끼리 정보공유를 해야 한다는 건 명분일 뿐,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운영자 또한 뒤에서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을 것이다. 자그마치 모든 마법사가 이용하고 있는 커뮤니티의 운영직이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활용할 방안은 무궁무진했다.
결국에는 기브 앤 테이크. 지수는 자신의 컨텐츠를 올릴 플랫폼이 필요했고, 운영자는 자신의 플랫폼을 채울 컨텐츠가 필요했다. 그것뿐인 이야기였다. 그것이 불쾌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바람직한 관계라고까지 생각했다.
‘호의를 가지고 손해를 보는 인간은 단순한 호구. 호의와 이익을 양립시키는 것이야말로 호인…… 이라는 거지.’
지수는 자리에 앉아 마우스를 딸깍였다. 고깔 카페는 또 나중에 확인하는 걸로 하고. 뉴스 란에서 눈에 띈 것은 어젯밤 일어난 한 사건의 속보 기사였다. 어떤 길드의 하우스에 있던 20명 정도의 인원이 전부 골절 등 중상을 입고, 건물은 통째로 폭삭 내려앉아버렸다는 내용이었다.
"되게 무섭네......"
헌터들끼리 패싸움이라도 한 걸까. 얼마나 격렬하게 싸웠길래 건물이 무너지냐. 기사를 본 지수는 저런 데 얽히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휘저었다. 길드라고 하니 저번에 지수와 얽혔던 복면인들이 떠 올랐다. 그건 어떻게 잘 처리됐을까.
저번에 굳이 이쪽에서 오성화를 불러, 던전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준 이유는 그것이었다. 일종의 중재 요청이었다. 자신뿐이라면야 아무래도 상관 없지만 서중철까지 트러블에 말려들게 하는 건 피하고 싶었다. 오성화는 그리 난폭한 사람으론 안 보이니 아마 어른스럽게 잘 말해두었을 것이다.
지수가 그런 생각에 잠겨있을 즈음, 현관에서 초인종이 울렸다.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지수는 불식 길드의 손님을 맞이하러 나갔다. 현관문을 열자, 손에 들고 높이 쌓은 박스들 때문에 방문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지, 지수 씨! 이것 좀 들어주세요~!"
윤나연이 앞이 안 보인다고 허둥지둥대며 말했다. 지수는 웃기다는 건지 유감스럽다는 건지 알 수 없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볼 때마다 이런 반응을 하게 만드는 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었다. 지수가 박스를 받아 바닥에 내려놓았다.
"연락 주셨으면 먼저 나가있었을 텐데."
"걱정하지 마세요! 헌터 라이센스는 못 땄지만
저도 어엿한 각성자라고요. 이 정도 무게쯤이야 그냥 가뿐하죠!"
"그런가요……"
지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시약에 쓸 잡동사니 재료들인 탓에 박스는 전혀 무겁지 않았다. 지수가 걱정하는 건 완력 쪽이 아니라 또 덜렁대시다 뭐 흘리거나 깨뜨리지는 않을까 하는 쪽의 문제였지만… 그건 말하지 않기로 했다.
"일단 앉아 계세요. 차 끓여올게요."
"아, 안 그러셔도 되는데."
"아니에요. 별 수고가 드는 것도 아닌데."
그럼 감사합니다. 윤나연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주방에 선 지수가 포트의 물을 끓였다. 요 일주일 간 지수는 집안에 나름대로의 찻잎과 찻잔 세트를 구비해놓고 있었다. 저번 한 번뿐이라면 몰라도, 지속적으로 방문하는 손님이 있는데 종이컵에 인스턴트 커피를 졸졸 따라서 대접한다 내미는 건 집주인으로서의 예의에 어긋난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괜찮은 찻잎을 끓여마시다 보니 이게 또 지수의 취향에 딱 맞았다. 지금까지 차 같은 데에 관심을 가진 적은 없었는데, 생각지도 않은 데서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뭣보다 책을 읽을 때 끓여마시기 딱 좋아.'
지수가 찻잔에 물을 졸졸 따르며 생각했다. 게다가 다도와 연금술은 어딘가 통하는 데가 있었다. 뭐라고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재료 준비와 과정은 귀찮은데 나오는 결과물은 달랑 한 잔 뿐이라는 허무함과 여운이 비슷했다.
아마 혼자 있었다면 이런 취미를 가지게 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잠깐 흥미를 가졌다한들 몰두할 이유가 없어 금방 그만두었을 테고. 그렇게 생각해 보면 사람이랑 부대끼는 게 귀찮아서 싫다는 것도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한 일이었다.
"여기, 드세요."
"아, 감사합니다."
윤나연이 공손하게 찻잔을 받아들었다. 의자에 앉은 지수는 모르는 척 눈짓으로 윤나연의 기색을 살펴보았다. 이번 찻잎은 솔직히 말해서 조금 자신 작이었다. 한 번 홀짝인 윤나연의 눈동자에 맛있다는 듯 이채가 돌았다. 역시. 지수의 입가가 약간 올라갔다. 사실 룬 마술로 조금 수작을 부려놓았다.
활기의 룬. 그 룬의 주문에 노출된 대상은 생기가 활성화되고 회복이 촉진된다. 찻잎에 걸어놨으니 아마 품질이 한 단계쯤 올라갔겠지. 녹차에 피로 회복 효과도 부여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지수 오리지널 마법 다도였다.
'이 활용력이 스스로도 무섭다.'
지수가 팔짱을 낀 채 찻잔을 홀짝였다.
그 뒤 이어진 것은 그냥 지나가면서 하는 잡담들이었다. 사생활 이야기라기보단 요즘 세상 돌아가는 일이나 날씨에 대한 화제 같은, 비즈니스 상대와의 친분을 위한 회화였지만 윤나연이 워낙 쾌활한 탓에 어색함을 느낄 일은 없었다.
"일단은 이게 이번 치 분량입니다."
이후 잠깐 방에 들어간 지수가 플라스틱 박스에 담아둔 유리병들을 꺼내왔다. 불식 길드에서 지원 해준 재료로 만든 하급 비약들. 딱 봐도 잘못하다 도중에 깨먹을 것 같아서 뽁뽁이로 꼼꼼히 싸둔 채였다. 윤나연이 물건들을 세어보았다.
"네. 전부 확인했습니다. 다음 발주 재료들은 똑같은 종류를 똑같은 수량으로 드리면 될까요?"
"아, 다음에는 이거랑, 이거랑……그리고 이거도요."
지수가 미리 작성해둔 목록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펜을 든 윤나연이 지수의 발주 신청을 열심히 받아적었다. 하급 비약의 연성은 가장 기초적인 레시피일 뿐, 이제부터는 여러 가지 변수를 주면서 실험을 해볼 요량이었다.
이내 발주서 작성을 끝낸 윤나연이 차 잘 마셨다고 꾸벅 인사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오실 필요 없어요! 진짜 괜찮다니까요!"
"정말요? 떨어뜨리면 깨질 텐데……"
"이걸 뭐 회사까지 들고가는 것도 아니고!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가서 트렁크에 싣기만 할 건데! 절대 나오지 마세요! 집에 딱 계세요! 제가 그렇게 못미더워보여요?"
네. 라고 곧바로 튀어나올 뻔한 걸 가까스로 참았다. 지수는 대답하지 않고 쓴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윤나연이 인상을 팍 찡그렸다. 대금 입금된 거 꼭 확인하시구요! 입술을 삐죽대며 툴툴거리는 윤나연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져갔다.
손님이 떠난 뒤 찻잔을 정리하던 지수가 방 안을 둘러보았다. 집 꼴이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바닥에서 산을 이루고 있는 책들에 휘갈기다 적당히 내버려둔 종이들. 비약을 만들다 아직 안 치운 재료들과 새로 불식 길드에서 가지고 와준 박스들까지. 과장 좀 섞어서 누울 자리가 없는 수준이었다.
뭐 정리 좀 안 한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어깨를 으쓱인 지수가 의자에 등을 눕혔다.
'그러고 보니 돈 꽤나 쌓여있겠네.'
지금까지 불식에 납품한 비약 값만 해도 한 병에 이십 만원 꼴이니, 다 합치면 상당한 목돈이 되어있을 것이다. 그 대금은 지수의 연금술 실력이 늘어날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날 테고. 안정적인 벌이수단도 있겠다, 이 기회에 자취방에서 벗어나 깔끔한 곳으로 이사를 가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그러면 이제…."
제대로 일을 시작하기 전에 정리해야 했던 것들은 전부 일단락 되었다. 지수가 책상의 연필꽂이에서 한 장의 명함을 꺼내들었다. 이름도 사진도 신상명세도 뭣도 없이, 헌터 협회 집행부의 마크와 전화번호만이 적혀있는 새까만 명함.
'아르바이트 소개장이다.'
불식의 길드장, 백묵이 주었던 명함이었다. 던전의 허수아비를 툭툭 때리는 것보다는 훨씬 힘든 일이지만, 그만큼 확실하고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지수는 조용히 상태창을 열어, 스킬 목록의 구석을 바라보았다.
<해주의 비술 : 해금 조건을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
아직도 열리지 않은 전설 급 마도서의 스킬. 이걸 열기 위해선 무언가 하나의 계기로 한꺼풀 벗어던질 필요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제발 제대로 성장시켜 달라고."
한숨을 쉰 지수가 명함의 연락처에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