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7)
분노한 서중철의 기세는 대단했다. 이미 한 번 공격을 먹인 것이 좋게 작용했는지, 마지막 남은 복면인은 서중철의 장검에 맥을 못추고 당하고 있었다. 지수가 돕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서중철은 스스로 마지막 남은 복면인을 쓰러뜨렸다.
'화내면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지수가 헛웃음을 지었다. 쾅! 내리쳐진 서중철의 검이 동굴 바닥에 찍혔다. 서중철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숨을 거칠게 들이내쉬고 있었다. 아마도 이쪽이 당했다고 생각해서 저렇게 화가 난 것 같은데, 이제 와서 사실 처음부터 멀쩡했다고 고백하면 양쪽 다 되게 뻘쭘해질 것 같았다.
'이 비밀은 무덤까지 가지고 가는 걸로.'
혼자 착각해서 난리 피우다 나중에 전부 오해였던 거라 깨달았을 때의 쪽팔림은 지수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여기서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어른스러운 대응일 것이다. 지수가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기절한 복면인들에게 다가갔다.
찰칵, 찰칵! 셔터 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퍼졌다.
뭘 하시는 겁니까?”
"아, 얘네들 얼굴 사진 찍어 두려고요."
쭈그려 앉은 지수가 스마트폰으로 복면을 벗긴 남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찍었다. 딱히 신상을 파고 들어 뭘 어쩔 생각은 없었지만, 찍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이런 협박거리 하나쯤은 쥐어놔야 귀찮게 보복하러 오는 일도 없어질 테고.
그리고 다음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장비 약탈 시간이었다.
지수는 서중철의 도움을 받아 복면인들이 착용하고 있던 장비들을 싹 벗겨냈다. F급 헌터인 서중철의 무장에 비하면 훨씬 양질의 장비들이긴 했지만, 높아봐야 C급이나 D급 헌터라 그런지 입 쩍 벌어지게 훌륭한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그 중에 유난히 지수의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마비의 단검(고급)]
상대에게 공격을 적중시킬 때마다, 낮은 확률로 하급 마비 효과를 부여한다. 스킬을 사용할 시 칼날을 깨뜨려 주변 일정 범위에 중급의 마비 독안개를 전개할 수 있다. (마력은 필요로 하지 않으며, 이 스킬을 사용할 시 무기가 파괴된다.)
'이거 보조 무기로 괜찮을 것 같은데.'
지수가 휘유 휘파람을 불며 생각했다. 슬슬 근거리 무장도 하나쯤 있는 게 좋겠다 생각하던 시점이었다.
무엇보다 달려있는 스킬의 상성이 지수와 딱 맞았다. 무기 파괴를 대가로 한 무차별 마비 가스 전개. 어차피 지수는 '늪지옥 여왕의 반지’의 효과로 웬만한 독에는 전부 면역이었다. 물론 한 번 쓰면 끝이지만, 위급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수단은 몇 개를 쟁여두고 있든 나쁠 것이 없었다.
"이거 제가 가져도 돼요?"
지수가 마비의 단검을 흔들면서 말했다. 솔직히 나머지 물건에는 별로 관심도 없었다. 대부분이 흉갑이나 무거운 검인 탓에 애초에 지수는 쓸 수도 없었다. 그러자 서중철이 씁쓸한 표정으로 지수를 바라보았다. 그가 주먹을 꽉 쥐었다.
'참고 계신 건가. 괜찮다 안심시켜주려고.’
좋은 단검을 얻어서 들떠있는 지수의 모습이, 서중철의 눈에는 다르게 비쳐보였다. 마법사 선생님. 아마 지금도 몸 안은 만신창이일 텐데 필사적으로 아픈 걸 참고서 웃고 있다. 분명 이쪽에 괜한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씀씀이겠지.
"당신이란 사람은 대체…"
"네?"
"아니요.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서중철이 미소지었다. 저렇게 어린 청년이 이런 아저씨 하나 때문에 억지로 아픈 걸 참으며, 걱정 하지 말라 배려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쪽도 모른 척하고 웃어주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그런 서중철을 보고 지수가 식은땀을 흘렸다.
'...뭔가 점점 대단한 착각을 하고 계신 것 같은데?'
생각해봤자 해명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서중철과 지수는 재빨리 복면인들의 장비를 챙겨서 던전을 나왔다. 사실 서중철은 자고 있는 사람 것을 훔쳐가는 것 같아 거북하다고 거부하고 있었으나, 지수가 반쯤 억지로 장비를 떠맡겼다.
'새로운 스킬도 얻었고, D급 상당의 장비. 이걸로 더 이상 파트너를 못 찾아 곤란해하실 일은 없겠지.’
던전에서 나온 지수가 서중철과 둘이서 걸으며 생각했다. 솔직히 말해서 조금은 경계하고 있었다. 맨 처음 서중철이 부인이 타준 커피라며 한 잔을 권유할 때. 무언가를 섞어둔 게 아닐까 의심하며 반지가 발동하는지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 결과 서중철은 단순한 호인이었다. 사람에게 까탈스러운 지수가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지수가 서중철에게 장비들을 억지로 떠맡긴 건, 그런 의심에 대한 사과이자 지수 나름대로의 매듭짓기였다. 아마 이제 다시 지수가 서중철과 파티를 맺을 일은 없을 테니까.
서중철 뿐만이 아니라 당분간은 던전 자체에 들어갈 일이 없을 것이다. 복면인들에게 습격까지 당하고서 확실히 알았다. 수준이 맞지 않았다. 백묵의 말이 옳았다. 지수 정도의 실력이 지금 이런 곳에서 고여있어봤자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저 던전은 다시 들어가지 않는 게 좋겠네요, 선생님. 아무래도 다시 습격받을 가능성도 있고. 조금 멀리…."
"저 던전만이 아니라, 당분간은 던전에 들어갈 일 없을 것 같아요. 제가 생각했던 거랑은 너무 달라서."
"네?"
깜짝 놀란 서중철이 이내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 그렇죠. 역시. 저 같은 거랑은......"
서중철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선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소처럼 똘망똘망한 눈이었다. 지수는 그것에 괜시리 짜증이 났다. 왜 다 내 말뜻을 제 멋대로 해석하는 거야? 이쪽은 더할 나위가 없을 정도로 좋은 사람 만나서 다행이었다 생각하고 있는데, 어째서 그렇게 자기비하를 하는 것인지.
지수가 서중철을 내버려두고 몇 걸음 더 앞서간 뒤 말했다.
"아마, B급이 된 다음 돌아올 것 같거든요. 던전 쪽엔."
"……네?"
"그때도, 같이 팀 짤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고개를 떨구고 있던 서중철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지수는 계속해서 걸어나갔다. 뒤에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지만, 뒤돌아보는 일 없이 계속해서 걸어갔다. 잠깐 감전된 듯이 그 자리에 서있던 서중철은, 평소와 똑같이 만면에 미소를 띠고.
"하하하! 알겠습니다, 선생님!"
무거운 갑옷을 철커덕거리며 지수 옆에 따라붙었다.
***
"......그렇게 얻은 단검이거든요. 이게."
지수가 첫 던전행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했다. 테이블의 맞은편에선 양복을 입은 오성화가 단검을 구경하며 호오 탄성을 흘리고 있었다. 단검을 지수에게 돌려준 오성화가 말했다.
"데뷔전을 아주 화려하게 치렀군. 좋은 무기야. 언제라도 빼서 쓸 수 있게 홀스터 케이스 같은 걸 하나 차는 게 좋을 텐데. 괜찮으면 내가 쓰던 거 줄까?"
"아뇨. 그런 건 직접 보고 맞는 걸 고르고 싶어서."
"확실히 장비는 자기한테 딱 맞는 걸 찾는 게 중요하지. 그래도 돈은 아끼지 말고 팍팍 써서 비싼 걸로 사는 게 좋아. 아예 손맛이 다르다니까. 아, 먼저 일어나볼게. 지수야."
선글라스를 쓴 오성화가 의자를 드르륵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부터 휴대폰을 계속 힐끔힐끔 바라보는 걸 보니 아마 없는 일정을 쪼개고 쪼개서 만나준 것 같았다.
"바쁜 몸이라서. 모처럼 먼저 불러줬는데 미안해."
"아뇨. 조언 감사합니다."
쓴웃음짓는 오성화에게 지수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카페 문을 열고 오성화가 빠져나왔다. 주차 되어있던 코브라를 타고, 시동을 걸어 도로로 빠져 나왔다. 선글라스를 접고 카라에 꽂은 오성화의 눈빛엔 전에 없던 날카로움이 배여있었다.
잘도 해줬구만. 차갑게 웃음을 터뜨린 오성화가 아까부터 스마트폰으로 메시지를 보내던 상대에게 전화를 걸었다.
"혜성아. 할 일 생겼다."
***
"그놈들 따라가서 죽여버릴 거야!"
"병신 같이, F급 좇밥한테 방심하다 얻어터지고선. 한심하다 야! 너 애지중지하던 그 단검까지 뺏겼다매?"
이야기를 듣고 있던 길드의 동료가 웃겨 죽겠다는 듯 조롱했다. 그들에게는 익숙하다면 익숙한 일 이었다. 자신들이 관리하는 던전에 들어온 놈들 중에 조금 좋은 아이템이 가진 녀석이 있으면 복면을 쓰고 슬슬 다가가서 린치한 뒤 빼앗는 것. 딱 깡패들이나 생각할 법한 방식이었다.
이게 또 상당히 짭짤한 부업이었다. F급. 잘해봐야 E급 헌터 주제에 한 길드에 정면으로 맞서려는 놈들이 있을 리도 없고, 던전 안이기에 이렇다 할 증거도 없고. 죽도록 맞고 장비를 뺏겼다 엉엉 울어도 길드 쪽에서는 시치미를 떼며 발뺌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이번 만큼은 상황이 좀 달랐다.
획 골프채를 휘두른 길드장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절하고서 얼굴까지 찍혔다고 했지. 병신같은 놈. 이렇게 되면 반쯤 죽여놔서라도 확실히 입막음을 해둬야 돼. 어차피 F급 헌터다. 적당히 팬 다음 겁주면 알아서 길 거야."
"적당히라는 게 어느 수준일까."
"팔다리 하나씩만 분질러 놔"
"좋아. 그러면 딱 그 정도로 멈춰주지."
응? 위화감을 느낀 길드장이 고개를 돌아보았다. 방금 대답한 게 누구지? 길드 아지트의 소파에
앉아있는 건 고깔모자를 쓰고 있는 남자였다. 다른 길드원들도 깜짝 놀라서 남자를 바라보았다. 대체 언제 들어온 거야? 그런 의문을 입에 담을 새도 없이, 김혜성의 주변에 커다란 얼음기둥이 퍼져나갔다. 누구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고맙다 인마. 내가 우리 대장이랑 내기를 하나 했는데, 어이 없이 져버려서 내 영웅 급 아이템을 뺏길 뻔했거든."
여차, 자리에서 일어선 김혜성이 웃었다.
"근데 우리 대장이 뭐라고 한 줄 알아, 너희들 조져주면 그거 안 줘도 된다고 하잖아. 이게 무슨 횡재야? 이런 찌질이들 청소 한 번 해주는 걸로 영웅 급 아이템이 굳다니."
"너, 너너, 는 대체……"
길드장이 반쯤 얼어붙은 입술을 움직여가며 말했다. 김혜성이 어깨를 으쓱였다.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헌터 업계에 종사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불식은 건드리지 마라'. 아군이 당했을 때는 누가 잘했고 잘못했고를 떠나서, 무조건 배 이상으로 보복한다. 그것이 불식의 창설 시기부터 이어진 녹슬지 않는 철칙이다. 우리 대장이 말하 길, 잘도 지수 데뷔전을 망쳐줬다더라. 아주 정색을 하고서는, 그 인간도 참 주책이야. 고깔을 푹 눌러쓴 김혜성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불식의 동맹에 손을 대고서 무사하리란 생각은 말았어야지."
길드장이 덜덜 떨며 이빨을 딱딱 부딪쳤다.
몸을 굳힌 얼음의 차가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불식. 그 두 글자의 무게가 길드장을 짓눌렀다. 우리 부하가 건드린 게 그렇게 엄청난 놈이었단 말인 가? 그런 놈이 뭐하러 우리 던전에? 하지만 이미 몰라서 그랬다, 따위의 변명이 통할 영역은 훨씬 지나있었다. 얼음판 사이를 유유히 걷던 김혜성이 한 길드원을 삿대질했다.
"그럼, 너부터."
소용돌이치는 마력이 절망을 선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