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6)
허공에 그려진 것은 화염의 룬. 빛나는 각인은 한 순간 불타는 구체가 되어, 복면인 중 한 명의 몸에 작렬했다.
'......좀 세진 것 같은데.’
지수가 자신의 손가락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기분 탓이 아니라 정말로 헌터 시험 때와는 확 다른 위력이었다. 사실 강해지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 하긴 했다. 마도 명상을 계속한 결과 유연하고 정확해진 마나 감응력. 룬 마술 체계를 죽어라 파고 들며 얻은 이해도와 익숙함. 그것은 모두 지수의 든든한 양분이 되었다.
"인챈터가 아니었다고?"
복면인들이 당황했다. 아까부터 계속 보조나 강화 마법만 쓰고 있길래 전투능력은 없는 줄 알았는데, 공격 마법까지 쓸 줄 알았다니? 이건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게다가 놈이 차고 있는 반지에는 그 정도 위험요소 쯤이야 충분히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악세서리에 고유 스킬이 달려있다는 건 아마 희귀 등급… 암시장에 팔아치워서 인원수로 나눠도 배 터지고 남는 장사다.'
복면인이 욕망이 넘실거리는 눈동자로 침을 꿀꺽 삼켰다. 물론 사실 지수의 반지는 희귀 등급 수준이 아니라 영웅 등급의 히든 드랍 아이템이었지만, 상식적으로 F급 헌터가 그런 걸 들고 있으리란 생각을 떠올릴 수 있을 리 없었다.
"서, 선생님! 지금이라도 길드에…!"
앞에 서서 덜덜 떨고 있는 서중철이 말했다.
이곳처럼 이른바 '작업장‘이라고 불리는 하급 던전들. 아무리 등급이 낮다지만 던전을 클리어하지 않고 내버려두는 것은 위험한 일이고, 만에 하나의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작업장들엔 보통 중소 길드가 하나씩 붙어서 관리하고 있었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지, 멋대로 똬리를 틀고 앉아 자리를 예약하러 온 F급 헌터들을 상대로 돈을 뜯어내며 장사질을 하고 있는 게 놈들의 실태 였다. 일종의 자기 구역 업자들에게 자릿세와 상납금을 요구하는 깡패 같은 놈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깡패 같은 놈들이기에야말로, 자신들의 작업장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 나서서 단속해줄 것이다. 자리를 잡을 때 예약비도 제대로 지불했다. 지켜주지 않을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 말에 지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말하러 가봐야 모른 체만 당할걸요."
던전 안의 생태계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지수라도 추론할 수 있었다. 놈들은 이 던전을 관리하고 있는 길드와 모종의 합의를 끝낸 상태일 것이다. 어쩌면 그런 수준이 아니라, 아예 길드원 본인들이 이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 정도 믿는 구석도 없는 놈들이 이렇게 대담한 방식의 삥뜯기를 시전할 리가 없다. 아이템 뺏겼다고 울고 불며 달려가봐야 모른 체만 해주면 다행이지, 오히려 얻어 맞고 입막음을 당하지는 않을까 걱정해야 할 것이다. 해석 스킬 같은 게 없어도 이 정도 상황 해석은 누구나 할 수 있었다.
지수의 말에 서중철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그 추리가 정답이라고 증명하는 듯, 복면인들은 자기들끼리 흐흐흐 기분 나쁜 웃음을 지어보였다. 서중철이 쓰라린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저 때문에…."
"네?"
지수가 순간 이해를 못하고 눈썹을 찌푸렸다. 어딜 어떻게 봐도 저 놈들이 노리고 있는 건 지수의 반지다. 괜히 민폐를 끼쳤다고 사과해야 하는 건 지수 쪽이었다. 사람이 좋으신 것도 이 정도면 병인데. 지수가 답답함을 느끼며 대답했다.
"아니 그게 왜… 일단 저놈들부터 해치우죠."
"해치워? 푸하하하! 얘들아 들었냐? 해치운댄다!"
복면인들이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듯이 낄낄대며 다가왔다. F급 헌터 두 명 정도야 요깃거리도 안 된다는 거겠지. 서중철이 무슨 수가 있어도 지수를 지키겠다는 듯이 앞으로 나섰다. 양손으로 쥔 장검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괜찮아요. 잘만 막아주세요."
뒤에 서있는 지수가 서중철을 격려했다. 지수는 결코 싸움을 즐기는 성격이 아니었다. 척 봐서 이길 수 없을 것 같으면 곧바로 도망칠 궁리부터 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여기서 이렇게 떠들고 있다는 건, 이길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다.
"마법사는 주문을 쓰는 사이에 반드시 빈틈이 생겨! 저 전사 놈만 패대기치면 되니까 다같이 달려들라고!"
'안 생기는데.'
그게 싫어서 뜯어 고치느라 얼마나 생고생을 했는데. 지수가 반지를 사용해 복면인들이 서있는 발 밑을 늪지대로 만들었다. 단순히 걸리적거리게 하는 수준일 뿐이었지만 효과는 그걸로 충분했다. 무장을 살펴본 결과 저쪽엔 원거리 무기가 없다. 지수는 멀찍이서 일방적으로 주문을 난사했다.
"이런 씨발, 고작 F급의 마법이야! 어떻게든 버 텨!"
그걸 버티고 늪에서 빠져나온 적은 버프를 둘둘 말고 있는 서중철의 장검으로 요격한다. 전투는 일방적이었다. 원래대로라면 A급 헌터쯤이나 되어야 들고 다닐 반지를 낀 채 싸우고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그 때 지수가 신음을 흘렸다.
"아야!"
지수가 잠시 무릎을 꿇은 채 팔을 부여잡았다. 지수의 팔에 꽂혀있는 건 한 장의 뻣뻣한 깃털이었다. 다트를 던지듯 획 깃털을 던진 복면인들 중 하나가 흐흐 웃음을 흘렸다.
"뽑으려 해도 뽑을 수 없을 거다! 몇십 만원이나 하는 아이템이니까! 효력을 잃고서 사라질 때까지 꽂힌 놈 몸 안의 마력을 어지럽히는 맹독의 깃털이지! 전세 역전이다! 이제 섣불리 마법을 썼다간 주문이 엉켜서 내상을 입게 될걸!"
지수는 인상을 확 찌푸렸다.
'뭐지 대체.’
대체 뭐하는 놈인데 상대한테 그런 걸 다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는 거지? 상식적으로 그런 사실은 몰래 감춰두고 이쪽이 마법 쓰다 자멸하는 걸 노려야 되는 거 아닌가. 아니 애초에 그런 걸 쓸 거면 진작에 던지지 뭐하러 지금까지 아껴두고 있었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납득이 안 갔다.
그런 지수의 표정이 고통 때문에 일그러진 거라 착각했는지, 남은 복면인 둘이 광소하며 늪지대를 달려왔다. 이제 허수아비인 서중철만 쓰러뜨리면 다 이긴 싸움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마력을 엉키게 하는 독이라. 지수는 시험 삼아 몸 안의 마력을 운용해보았다. 몸 안 구석구석까지 한 번 쏵 순환시켜봐도 아무 문제 없었다.
'반지에 달린 독저항이 막아준 모양이네.'
기세를 타고 달려오고 있는 두 명을 보고, 서중철은 당황한 채 허둥지둥댔다. 언제나 뒤에서 든든하게 보조해주던 지수가 쓰러져, 순간 패닉 상태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잡았다! 섬뜩하게 웃은 복면인의 칼날이 서중철을 향해 쇄도했다.
그리고 펑! 불꽃의 폭발이 복면인을 날려보냈다.
"마, 말도 안 돼. 마법은 쓸 수 없을 텐데…!?"
데구르르 구른 복면인이 기절했다. 나머지 한 남자는 눈을 휘동그레 뜬 채 지수를 쳐다보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경악하고 있는 것은 순간 당했다, 라고 생각한 서중철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지수가 신음을 흘리며 쓰러졌다.
"지수 씨!"
"그래! 역시! 괜찮을 리가 없지, 속이 엉망이 되었나 보군!"
지수가 팔을 움켜쥐며 신음을 흘렸다.
"큭......"
아, 진짜 아프다. 독이니 뭐니 하는 효과랑은 별 개로, 그냥 팔이 뾰족한 깃털에 찔려있으니까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주사 맞을 때의 아픔이 계속 느껴지는 기분이라고 할까. 책벌레인 지수는 고통을 잘 참을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물론 마력이 엉켜서 꼬였다느니 뭐니 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냥 찔린 게 너무 따끔해서 잠깐 쭈그리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지수의 모습이 서중철의 눈에 어떤 식으로 비쳐보였는지,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확고한 적의가 감돌았다.
"푸하하하하! 아저씨 표정 굳은 것종 봐 아주 쌩쇼를 하세요! "
"...아직 어린애인데. 나 같은 걸 지키느라."
"아이고, 지가 무능한 건 잘 아는 모양이네?"
"지켜야 하는 건 내 쪽인데."
"아니 진짜 고마워 아저씨. 저 괴물 새끼 파트너가 아저씨 같은 반푼이만 아니었어도 거꾸로 이쪽이 박살날 뻔했잖아!"
"얼마나 아플까."
"그래, 마력이 역류하면 내장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이라더라! 그러게 내놓으랄 때 순순히 내놓았으면 이런 일 없었잖아, 다 그쪽 미련한 게 잘못......"
"그만 말해."
고개를 돌린 서중철의 얼굴은 말 그대로 악귀의 형상이었다. 언제나 얼굴에 걸려있던 사람 좋아보이는 미소나 조금 비굴하고 소심한 표정 따윈 완전히 증발해있었다. 망설임 없이 쾅 휘둘러진 장검이 복면인을 멀찍이 뒤로 밀어냈다.
"뭐야, 아저씨! 한 번 해보자고? 느려터진 게 주제도 모르고, 마법사가 없으면 너 같은 건……!"
말은 이어지지 못하고 도중에 끊어졌다. 단검을 쥔 복면인이 입을 쩍 벌렸다. 다음 공격에 대비하기도 전에, 힘의 기류에 휩싸인 서중철이 몸을 탄환 삼아 날아오고 있었다.
'돌진 스킬!?'
쇄도한 서중철의 중량은 그대로 충격이 되어, 마지막 복면인을 동굴의 벽까지 날려보냈다. 피가래를 토하며 자세를 잡은 복면인이 갈비뼈를 쓰다듬으며 서중철을 노려보았다.
"지금까지 숨기고 있었던 거냐!"
"숨긴 적 없어."
정색한 서중철이 즉답했다. 그에게도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하루 종일 지수와 함께 고블린을 도륙하며 쓸어담은 경험치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남한테 제대로 싸움을 걸지도 못하는 소극적인 성격이 폭발해버린 게 계기가 된 것일까. 서중철은 바로 지금 이 타이밍에, 새로운 스킬에 각성하고 있었다. 어쨌든.
"마법사 선생님한텐, 절대 손 못댄다."
귀신이 들린 것 같은 서중철이 과시하듯 부웅 장검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