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5)
"……사실은 애써서 자리를 찾아보긴 했는데 조금 구석진 곳이라서요. 오늘 벌이는 조금 시원찮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첫 던전행에서 지수의 파트너가 된 남자가 말했다. 지수는 상관 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지수는 오늘 경험을 하러 온 것이지 돈을 벌러 온 것이 아니었다. 최하급의 던전에서 괜찮은 돈벌이를 하는 것 따윈 기대도 안 했다.
"동료가 안 구해져서 곤란해하고 있었는데, 설마 마법사 님이 신청해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하. 로또라도 맞은 기분입니다. 민폐가 되지 않게 열심히 하겠습니다!"
"민폐는요 무슨. 저도 던전은 처음 들어갑니다."
"아, 그거 영광이네요! 마법사님과 데뷔전을 같이 치르게 되다니. 모르시는 게 있으시면 뭐든지 말씀해주십쇼!"
서중철이 가슴을 땅땅 치며 말했다.
남자는 서글서글한 인상의 중년이었다. 클래스는 전사, 이름은 서중철. 사람 좋아보이는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이 퍽 호감이 가는 인간이었다. 훨씬 어린 지수에게 꼬박꼬박 극존칭을 사용해주는 것이 조금 부담스럽긴 했지만, 동업자 사이에 예의를 차리느라 그런 것이라 생각하면 납득할 수 있엇다.
서중철과는 헌터 구인 사이트에서 만난 사이였다.
솔직히 말해서 지수는 누군가와 함께 던전에 들어가는 게 별로 내키지 않았다. 혼자서도 충분하다는 잘난 척이 아니었다. 지수는 워낙 아웃사이더 기질이 있기에 남들과 합을 맞추는 것보다 혼자 마음 내키는대로 싸우는 쪽이 편했다.
하지만 적어도 D급의 헌터가 되기 전까지는 단독으로 던전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게 협회의 룰이었다. 아마도 안전 문제인 것 같았다. 아무 것도 모르는 초심자 혼자서 던전에 들어갔다가 사고가 일어나는 일이 없도록 배려해준 거겠지
"그런데 진짜 5대5로 괜찮으세요? 섭외도 준비도 그쪽이 다 하시고. 뭔가 저는 숟가락만 얻는 느낌 인데."
"아, 그럼요! 오히려 제가 괜찮으시냐고 묻고 싶은 정도인데요. 선생님 정말 5대5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왜요?"
"그야 마법사님이시고……수석 합격 하셨다면서요? 전 시험도 거의 턱걸이로 통과했고 스탯도 낮고 하니까. 일인분도 제대로 못하는 놈인데 준비 같은 건 제가 하는 게 당연하죠."
그건 너무 비하가 심하신 것 같은데. 지수가 머리를 긁적였다. 두 사람이 걷는 동안 서중철은 심심하지 않게 여러 이야기를 해주었다. 각성하기 전에는 택시 운전을 하고 있었다느니, 딸아이가 한 명 있다느니, 이번에 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사진 한 번 보시겠냐느니 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서 다행이네.'
지수는 그렇게 생각했다. 짜증나는 인간이랑 같이 던전에 들어가게 되면 어떡하나 고민했는데, 적어도 서중철은 남에게 시비를 걸거나 허세를 떨어대는 류의 인간이 아니었다. 그것만으로도 파트너를 잘못 선택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약속장소에서 조금 걷자 던전의 게이트가 있는 구역에 다다랐다. 일반인 출입금지 구역이기에 경비가 잠깐 막아섰지만, 헌터 라이센스를 보여주자 바로 통과시켜주었다.
지수는 게이트에 새겨져있는 문양을 읽어보았다.
< 던전명: 고블린의 동굴>
<주요 출현 속성 : 땅>
<주요 등장 패턴 : 없음>
<특이사항: 없음>
'대놓고 별 거 없다고 광고하고 있네.’
하긴 F랭크 던전인데 별 게 있으면 그게 더 큰일 일 것이다. 납득한 지수는 서중철과 함께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한 순간에 풍경이 바뀌며, 주변에 어두운 동굴이 펼쳐졌다. 만화에서 나오는 어디로든 문이 이런 느낌일까.
'근데, 뭔가 이상한데.'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지수가 느낀 것은 위화감이었다. 동굴 안에는 몬스터의 흔적 비슷한 것도 없었다. 몬스터가 흔적을 남기지 않은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깨끗해도 너무 깨끗했다. 놈들이 입구 쪽으론 다가오지 않아서 그런 건가.
"따라와주십쇼.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지수를 뒤로 하고, 서중철이 자신 있는 걸음으로 앞장섰다. 이 던전에 들어 와본 적이 있는 것 같은 태도였다. 아니면 하급 던전의 지형이라는 게 다 비슷한 건가? 어느 쪽이든 초심자인 지수에게는 퍽 의지가 되었다.
"여기입니다, 선생님!"
서중철이 멈춰선 곳에 도착하자, 지수는 눈썹을 크게 찌푸렸다. 그곳은 아무 것도 없는 빈 공터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무 것도 없는 빈 공터에 낡아빠진 의자가 두 개 놓아져 있었다. 그리고 천장에는 그보다 더 괴상한 물건이 하나.
'뭐야 저게. 캠핑용 랜턴?'
어두웠던 지금까지의 동굴 안과 달리, 이 공터에는 밝게 빛나는 랜턴이 암벽 틈에 놓여 주변을 비춰주고 있었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지수가 인상을 쓴 채 혼란해하고 있자 서중철이 공터의 의자에 털썩 앉아서 배낭을 풀었다.
그리고 배낭에서 꺼낸 것은 돌돌 말린 돗자리와 보온병이었다. 무슨 공원에 소풍이라도 나온 것 같 았다. 이윽고 서중철은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보온병의 커피를 컵에 졸졸 따르기 시작했다. 지수는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뭐하세요?"
"네? 아, 저희 집사람이 커피를 타서 보온병에 넣어줬거든요.! 아무래도 여긴 좀 쌀쌀하니까. 종이컵도 같이 가져왔어요. 선생님께도 한 잔 드리겠습니다. 같이 마셔요."
아니,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라요. 인생을 살다 보면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는데 지금이 딱 그짝이었다. 지수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어버버댔다. 몇 초 뒤 지수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 지금부터 탐험하는 거 아닙니까?"
"아. 마법사님은 처음 와본다고 하셨지 참......"
서중철이 까먹고 있었다는 듯 짝 박수를 치더니, 보온병에서 따른 커피를 건네주었다. 지수는 손이 델까 조심하며 천천히 종이컵을 받아들었다. 지수 쪽으로 의자를 끌어당겨 앉은 서중철이 커피를 홀짝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급 던전은 몬스터 리젠 포인트가 다 정해져 있거든요."
"몬스터를 죽이면 일정 시간 뒤 다시 등장하는......"
"네, 그 장소가 이미 다 공개돼있어요. 그래서 그 지점에 대기하고 있다가 새 몬스터가 등장하면 바로 사냥하는 겁니다. 이 던전 안에도 몇 개쯤 있는데, 몬스터가 빨리빨리 리젠되는 자리는 꿀땅이라고 해서 자리를 예약하기가 힘들죠."
"허어……"
지수가 입술을 매만지며 침음을 흘렸다. 헌터 업계에 대해선 전혀 모르고 있었기에 어떻게 돌아가는 구조인지 알게 된 것은 신기했지만, 상당히 김이 빠지는 이야기였다. 계속해서 나타나는 몬스터들을 기계적으로 사냥하길 반복한다. 뭐라고 할까, 그건 몬스터와 싸운다고 하기보단 오히려…….
‘게임에서 작업장 노가다를 하는 것 같은데.’
지수가 손가락으로 볼을 두드리며 생각했다. 그건 상당히 정확한 비유였다. 서중철이 한 말대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빈 공터의 중앙에서 빛줄기가 솟아오르며 무언가의 전조가 엿보였다. 이제 곧 몬스터가 리젠된다는 신호였다.
"나옵니다, 선생님! 준비해주세요!"
"네."
서중철이 장검을 집어들고서 소리쳤다. 생각한 것과는 좀 달라도, 아무튼 하게 된 거 열심히 하자. 마음을 다잡은 지수가 집중할 준비를 하며 앞을 노려보았다.
***
'이건, 진짜로 끝내주는구만…!'
투박한 장검이 바람을 가르며 고블린을 베어냈다. 싸우고 있는 서중철은 처음 느껴보는 강렬한 쾌감에 젖어있었다. 그는 원래 반푼이라고 조롱받으며, 제대로 싸움 앞에 나서지도 못하는 인간이었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무쌍을 찍고 있다.
서중철은 양손 장검을 사용하는 전사였다. 그런 특성 탓에 공격 하나하나의 속도가 너무 느려, 고블린들을 상대하고 있다 보면 빈틈을 노려져 상처를 입는 일이 다반사였다.
네 명 이상으로 구성된 파티에서는 든든한 일격을 담당하는 역할로 채용될 수 있겠지만, 이런 하급 던전에는 아이템 분배 때문에 무조건 두 명이서 입장하는 게 관례가 되어있었다. 세 명이 넘어 가면 돈벌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둔하기만 한 짐덩이 취급만 받던 서중철이, 지금은 혼자서 모든 고블린들을 도륙해내고 있었다.
자리에 리젠된 고블린들은 바닥에 형성된 늪지대에 발이 묶인 채 꾸물댔다. 지수가 발동한 '늪지옥 여왕의 반지’의 고유 스킬이었다. 그리고 그런 고블린들은 '불의 룬'과 '가속의 룬' 등 온갖 강화 효과를 받은 서중철의 장검에 찢겨나갔다.
이건 정말 엄청나다. 고블린이 한 무더기 군세로 덤벼와도 이길 수 있을 것만 같은 감각.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잔상처를 입었을 때 포션을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 최고였다. 포션을 쓰지 않고 주문으로 회복하면 그만큼 돈이 굳는다.
마법사가 귀족 대우를 받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처음으로 싸움의 주역이 된 서중철은, 반쯤 흥분상태가 되어 짜릿한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음 옵니다 선생님!"
"예…."
서중철과 반대로 지수의 표정은 반쯤 썩어있었다. 지수의 역할은 룬 마술을 이용해 인챈트를 걸어준 다음, 서중철이 고블린을 도륙하는 동안 자리에 앉아있기만 하면 되는 편한 일이었다. 다시 말해 진짜 끔찍하게 재미가 없었다.
이것도 몬스터가 나오는 자리에 다 예약이 있어서, 두 시간쯤 뒤에는 나가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꼬박꼬박 몬스터를 잡고 협회에 보고해서 일정 이상의 실적이 쌓여야 E급으로 승급한다. 완전히 개 삽질이군. 지수가 피식 헛웃음을 지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건 백묵이 해주었던 말이었다.
'……F급 던전부터 들어가서 꾸준히 사냥해 등급을 올린다는 건, 시간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이해했다. 이런 짓거리엔 의미도 뭣도 없다. 실력을 연마하고자 한다면 차라리 동네 공터에서 혼자 마법을 연습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는 언제 제대로 된 던전에 입장이 가능할지 상상도 안 갔다.
지수가 쩝 입맛을 다셨다. 설상가상으로 던전 안에서는 스마트폰 데이터도 안 터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읽을 책이라도 가져올 걸 그랬다. 그렇게 한숨을 쉬고 있자, 한 차례 사냥을 끝내 땀범벅이 된 서중철이 생수를 꿀꺽꿀꺽 마셨다.
"힘드시진 않으세요?"
"아뇨! 전혀요! 너무 재밌습니다 진짜!"
좋으시겠어요. 쓴웃음을 지은 지수가 서중철에게 수건을 건네주었다. 이제 다시 몬스터가 등장할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그래도 적어도 리젠을 기다리는 중엔 서중철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됐기에 시간이 잘 갔다.
"그래서 저희 딸내미가 학예회에서 요정 역할을 했는데 진짜 요정 같아서, 아 맞다! 사진 있는테 보여드릴……"
그런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던 도중, 지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가 다가오고 있었다. 몇 명의 발 걸음 소리가 이쪽으로 접근하며 점점 커지고 있었다. 나타난 건 복면의 남자들이었다. 돗자리에 앉아있던 서중철이 입을 열었다.
"저 여긴 자리입니다만."
그 말에 저들끼리 시선을 주고받은 복면인들은 파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저, 저, 저 여긴 좌리윕니다만~ 웃기고 있네! 크하하하! 비웃음당한 서중철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분위기가 이상한데. 지수는 정색하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복면인 중 하나가 턱짓으로 지수 쪽을 까닥였다.
"아까부터 보고 있었는데. 그 반지. 좋아 보이더라?"
아하. 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로 찾아 왔나 했는데 대사 한 줄로 모든 상황이 이해되었다. 그 말에 서중철은 안색이 새파래졌다. 빨개졌다가 새파래졌다가 참 바쁜 사람이었다. 벌덕 일어난 서중철이 장검을 부여잡고서 말했다.
"이러지 마세요, 길드 쪽에 신고할 겁니다!"
우와~ 길드 쪽에 신고한대 어떡해~ 지금 당장 호다닥 도망가야겠다! 당황해하는 기색도 없이, 복면의 남자들은 눈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하고 싶으면 마음껏 해 보시든가. 여기 CCTV가 있어 뭐가 있어? 그냥 반지만 내놓으면 되는 거 입 털다가 죽도록 쥐어터지려고."
"다, 당신들……!"
"저기. 잠깐만요. 그냥 놔둬보세요."
지수가 손을 들고 서중철을 제지했다. 지수의 표정에는 어느새 생기가 돌아와있었다. 지루해 죽을 것 같던 지수에게 이 남자들은 한 줄기 단비와 같은 존재였다. 그래. 이렇게 예상치 못한 재미가 찾아와주는 게 인생의 묘미지. 말 그대로 여기 CCTV 가 있어 뭐가 있어? 게다가 저쪽이 먼저 싸움을 걸어 정당방위 성립까지.
"보니까 저 분들 무기도 좋아보이는데."
하하, 정말 최고다. 지수가 손가락을 들고 허공에서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