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4)
지수의 눈길을 사로잡은 책. 그건 희귀나 영웅 등급의 대단한 책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지수가 보아왔던 고서들과 한 가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엇다. 인증샷으로 올라온 책의 내용에는 글자뿐만 아니라 '그림'이 그려져있었다.
'그림책…?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눈을 가늘게 뜬 지수가 재빨리 책의 제목을 읽어냈다.
<미궁 모험가 디트리히의 괴물 대백과 (일반)>
괴물 대백과.
괴 물대 백 과.
그 다섯 글자를 읽은 순간, 지수의 가슴은 사랑에 빠진 것처럼 미친 듯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지수는 어릴 적부터 이런 쪽 책에는 사족을 못 썼다. 문방구에서 파는 온갖 '세계의 어쩌고 대백과'를 없는 용돈으로 다 사모으던 아이였다.
'이건 진짜다. 무조건이다.'
침을 삼키며 각오를 다진 지수가 글 내용을 읽어보았다.
- 샌드위치(운영자): 척척박사 님 이벤트로 카페가 후끈 달아올랐네요? 저도 가지고 있는 책 한 권 올려볼게요~ 신기하죠! 다른 책은 다 버렸는데 이건 그림이 그려져있어서 무슨 내용인지 나름대로 추측도 해보고 연구해보고 있네요~
인증샷을 올린 사람은 자그마치 고깔 카페의 운영자였다.
'이거 쉽지 않겠는데….’
지수가 침음을 흘렸다. 지금까지 인증샷으로 올라온 장서들을 긁어모을 땐 어차피 장식품에 불과한 잡동사니기에 쉽게 넘겨받을 수 있었지만, 스스로 내용을 추측하고 연구해볼 정도로 애착이 담긴 물건이라면 넘겨받기 힘들지도 몰랐다.
사실 넘겨받기 힘들 것 같으면 넘겨받지 않으면 된다
어차피 일반 등급의 책이었다. 대단한 마법 같은 게 적혀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지수가 매달릴 만한 메리트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지수의 두 눈을 채우고 있는 욕구는 하나 뿐이었다. '꽂혀버린' 책을 향한 순수한 호기심과 독서욕.
지수는 일단 간을 보기 위해 댓글을 달았다.
- 척척박사: 흠흠. 부러운데요.
- 샌드위치(운영자): 선물해드릴까요?
"에에에엥?"
화들짝 놀란 지수가 얼굴을 핸드폰 화면에 박을 듯이 가져다댔다. 답글이 곧바로 달리는 걸 보니 운영자 또한 카페에 접속하고 있는 중이었던 것 같았다. 이렇게 쉽게 승낙해준다고? 이쪽은 다음의 다음의 다음 협상안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 샌드위치(운영자): 척척박사 님 강의글들 덕분에, 카페에 글도 많이 올라오고 회원들 사이에서 토론도 이루어지고, 서로 의견 교환을 하면서 고깔이 큰 활기를 얻고 있어요.
- 샌드위치(운영자): 카페 운영자이자 한 명의 마법사로서 척척박사 님의 뜻깊은 활동에 감사드립니다 (_ _) 앞으로도 저희 고깔에서 많은 활동 부탁드릴게요 *^^*
아. 정말 좋은 분이다.
지수는 양손으로 얼굴을 덮고 감동의 물결에 젖었다. 아직 세상은 따뜻하고 선행은 선행으로 돌아 온다는 것을 체감했다. 이런 사람들이 있으니까 세상이 아직 살아갈 만한 거겠지. 완전히 상쾌해진 지수가 다시 책상 위에 앉아 펜을 들었다.
이런저런 주문들을 룬 체계로 뜯어고치다 보니 깨닫게 되는 요령들이 있었다. 그런 요령들 덕분에 한 주문의 개조를 끝낼 때마다 다음 작업 효율은 점점 올라갔다. 완전히 흐름을 탔다. 지수는 거의 무아지경이 되어 시행착오와 개선을 반복했다. 그런 지수의 집중을 깬 것은 초인종 소리였다.
"뭐야?"
지수가 획 고개를 돌아보며 말했다. 지금 이 시간에 올 사람이 누가 있지. 생각하던 지수가 아 하고 입을 벌렸다. 분명 오늘 불식 길드에서 사람을 보낸다고 했었다. 다른 건 아니고 지수의 연금술 방면에 대한 지원을 맡아줄 사람이었다.
'그 친구가 거래 사이트에서 지수 너를 처음으로 찾아낸 사원이야. 공로를 인정받아서 보너스도 빠방하게 받았지.'
오성화와 통화했을 땐 그런 식으로 말을 들었다. 불식 길드가 지수에게 접근한 첫 계기가 된 사원이라고. 거래 사이트의 매물만을 보고서 새로운 연금술사의 등장을 유추해낸 인간. 겉으로는 맹해보이는데 상당한 눈썰미가 있다나. 이야기만을 듣고 지수가 가진 인상은, 냉철한 실력파 엘리트였다.
"네, 지금 나가요."
지수는 조금 긴장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바깥의 복도에 서있던 것은 정장을 입은 여자였다. 여자는 지수가 보기에도 뻣뻣하게 굳어 있는 게 보일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지수는 위화감에 조금 눈썹을 찌푸렸다. 오성화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받은 인상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불식 사무팀의 윤나연……악!"
불식에서 왔다는 직원은 허리를 말 그대로 90도 까지 굽혀 인사하더니, 무게중심이 엇나갔는지 그대로 앞으로 넘어져버렸다. 현관문 앞에서 우당탕탕 소란이 났다. 사람이 신발장에 멋지게 고꾸라져 있는 모습은 일종의 현대미술 같았다.
"괜찮으세요……?"
지수는 설마 다친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 일어나라고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윤나연은 재빨리 일어나 옷 이곳저곳의 먼지를 털었다.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태도였다.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문제 없습니다!"
"무릎에서 피 나는데요….“
"벼, 별 거 아니예요! 신경 안 쓰셔도 괜찮습니다!"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지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거 아무래도 겉으로 보기에 맹해보이는 게 아니라 그냥 맹하신 것 같은데. 하긴 오성화 그 양반이 혼자 머릿속에서 북 치고 장구 치며 사람 착각하는 데에 특출난 재주가 있긴 했다.
"잠시만 가만히 계세요."
지수의 손가락이 허공에 슥슥 인을 그렸다. 경상 치료의 기초적인 회복 주문. 그것을 룬 마술 기반으로 변형시킨 주문이었다. 각인을 매개로 해 발동 된 주문은 은은한 빛을 띠우며 윤나연의 무릎에 난 상처를 서서히 아물게 했다.
"와, 우와! 마법도 쓰실 줄 아시는 거예요!?"
"그냥 조금요. 잠시만요, 반창고 좀 가지고 올게요."
이내 지수가 서랍을 뒤적여 꺼낸 반창고를 윤나연에게 넘겨주었다. 이미 회복 주문으로 아물게 했으니 흉이 지지는 않겠지만, 설마라는 것이 있으니까. 고개를 꾸벅 숙인 윤나연이 반창고를 받아들고 무릎의 상처가 있던 곳에 붙였다.
"너무 죄송하네요. 폐만 끼치고......"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방금 사용한 마법은 뭔가 대단한 것이 아니라 그냥 기지개 한 번 펴듯이 가볍게 쓸 수 있는 수준이었다. 애초에 지수 본인이 그런 걸 못본 척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기도 하고. 무엇보다 장기적인 거래상대에게 잘 보여서 나쁠 것은 없었다.
"저희 집이 난장판이라 넘어지신 건데요 뭐."
지수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물론 윤나연이 넘어진 것은 전적으로 스스로의 덜렁댐 때문이었지만, 여기선 그렇게 말해주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지수의 집안은 지금 온갖 책들과 종이들로 난잡하게 어질러져있는 채였다.
윤나연은 부끄러운지 양손으로 볼을 가리고 말했다.
"크흠! 그렇게 말씀해주시면 감사합니다. 그러면 일단 저희 길드 쪽에서 드릴 지원을 안내해드릴게요."
두 사람은 작은 테이블에 무릎꿇고 마주앉았다. 지수는 종이컵에 든 인스턴트 커피를 홀짝이며 이야기를 들었다. 보통이라면 손님에게 차나 과자라도 대접하는 게 맞겠지만 자취하는 지수의 집에 그런 변변한 물건 따위 있을 리가 없었다.
윤나연의 안내와 설명은 한동안 이어졌다.
"……라는 걸 정리하면, 완성품의 7할을 불식 길드에 판매해야 하는 조건으로, 길드 창고에 재고가 있는 모든 재료를 도매가보다 5퍼센트 싼 가격에 지원해드린다는 거죠."
윤나연은 가져온 서류에 적힌 글자들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정리해주었다. 빼곡하게 적힌 글자들을 알기 쉽게 술술 요약해주는 걸 보니 집에서 몇 번이나 읽고 연습해온 듯 싶었다. 지수는 불식 길드의 지원 조건을 머릿속으로 검토했다.
'나쁘지 않아.'
분명 나쁘지 않은 이야기였다. 아니, 오히려 지수에게 있어선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사안이었다. 완성품의 7할을 불식에 판매하는 것으로 재료를 값싸고 편리하게 제공해준다. 그러면 재료를 구하러 뛰어다닐 필요도 없고, 굳이 인터넷 사이트에 매물을 올려가며 사줄 사람을 찾을 필요도 없었다.
이 조건의 가장 훌륭한 점은 선택지의 하나일 뿐이지 강제로 묶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불식 길드에 포션을 팔기 싫을 때는 그냥 재료 지원을 안 받기만 하면 됐다.
아마 그런 식의 강제사항, '일정 기간 동안 일정 수량을 지속적으로 공급한다' 같은 조건을 붙이면 더 비싼 가격을 받고포션을 납품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자리가 잡히지도 않은 지금 섣불리 그런 일감을 떠맡을 생각은 없었다.
"좋네요. 불만 없습니다. 확인한 뒤 사인하죠."
지수가 불식의 서류들을 건네받았다. 아득바득 물어뜯으며 협상을 하면 조금 더 좋은 조건으로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한 번 뿐인 거래가 아니라 앞으로도 쭉 연을 이어갈 상대에게 벌써부터 그렇게 털을 세우는 건 좋지 않을 듯했다.
"네, 그러면 다음에 가지러 오도록 하겠습니다! 필요한 재료랑 수량을 신청서에 써서 발주를 넣어 주시면, 확인하고 최대한 빨리 처리해드릴게요. 재고가 없는 물품의 경우에는 원하실 경우 저희 길드 쪽에서 대리 구매도 해드리고요."
편리한 게 이 정도면 거의 도라에몽 수준이었다. 지수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대답했다.
"그건 정말 좋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아, 아뇨! 저희가 당연히 해드려야 하는 일인데요. 그러면 오늘은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계약서를 받는 건… 내일 오늘이랑 같은 시간에 찾아뵈면 될까요?"
"죄송한데 내일은 일정이 있어서. 모레 비슷한 시간쯤에 와주시면 될 것 같아요."
"네, 그러면 모레."
치료랑 반창고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윤나연이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걸음걸이가 쩔뚝이는 게 아마 다리가 저린 듯 싶었다. 사실 지수도 오랜 시간 무릎을 꿇고 있느라 발바닥이 아주 짜릿 했다. 저러다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시는 건 아닐까 몰라. 걱정하던 지수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튼 이제 연금술 레벨 올릴 걱정은 필요 없겠군.*
그리고 내일은, 정식 헌터로서 지수가 데뷔하게 될 날.
대망의 첫 던전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