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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격외 등급 해석사-15화 (15/176)

15화.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2)

자리에서 일어난 백묵은 지수를 바라보며 턱을 매만졌다.

‘완전히 읽었나.'

백묵쯤 되는 인간이라면 알 수 있었다. 방금 지수가 보여준 반응은 진짜 공격하지는 않을 거라는 추론이나 눈치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눈앞의 꼬맹이는 방금 발동한 마법이 공격용이 아니라는 걸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공격의 유형을 파악할 수 있는 건가. 아니면 위험을 감지하는 종류인가. 어느 쪽이든 활용도는 무궁무진하겠군.'

반응속도나 대응방법을 보고 그릇을 평가해볼 셈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결과가 나왔다. 아무래도 오성화 그 놈이 호들갑을 떨 만한 재능을 가지고 있긴 한 것 같았다. 정확히 어떤 스킬인지는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백묵이 코웃음쳤다.

"이레귤러인가."

"네?"

이레귤러. 들어본 적 있는 단어였다. 각성자 센터에서 안내원이 이야기를 해줬었다. 몬스터 때문에 인생 망친 사람들이 반쯤 미쳐서 각성한다는 그거 아닌가. 다시 말하지만 지수는 몬스터와 얽히기는커녕 평생 몬스터를 직접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레귤러는 무슨 이레귤러야? 지수가 눈썹을 찌푸린 채 눈앞의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백묵은 재미있는 놈이 다 있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시치미를 떼는 건가. 신중한 건 좋지만 거짓말은 상대를 가려가면서 해야지. 만일 이레귤러가 아니라 평범한 클래스의 스킬이라면 내 '간파의 눈'에 걸리지 않을 리가 없어."

"…그래서 왜 부르신 겁니까?"

지수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아닐 거라 말해봐야 어차피 들어먹을 것 같지도 않았다. 살다 보면 종종 대화가 안 통할 것 같은 사람을 만날 때가 있는데 이 아저씨도 딱 그 짝이었다. 백묵은 능구렁이 같은 녀석이라는 듯 입가를 이죽였다.

"이레귤러라면 더 볼 필요도 없겠지. 가져가라."

백묵이 다가와 건네준 것은 한 장의 명함과 불식 길드의 휘장이었다. 명함을 살펴보자 그곳엔 헌터 협회 직원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그것도 그냥 직원이 아니라, 헌터 협회 집행부의 연락처였다. 명함을 살펴보던 지수가 고개를 들었다.

"이게 뭡니까?"

집행부는 한 마디로 말해 헌터 협회의 자경단이었다. 명목상으론 범죄를 저지른 각성자들의 구속과 던전에서 빠져나온 마물들의 처리를 맡고 있다고 하지만, 실상 협회가 처리해야 할 이런저런 더러운 일들을 전부 처리하고 있는 부서였다.

집행부의 구성원들은 전원 헌터 협회의 새하얀 제복과 대비되는 새까만 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런 탓에 붙은 별명이 '저승사자'였다. 도는 소문들도 비슷하게 흉흉했다. 협회에 밉보인 헌터를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린다느니, 사실 각성자로 미등록 된 범죄자들로만 이루어진 처리반이라느니.

대부분은 사람들이 재미로 떠드는 음모론이겠지만, 아무튼 상당히 위험하고 궂은 일을 하는 곳인 건 확실했다. 그런 곳 연락처를 왜 나한테 주지. 지수의 시선에 백묵이 대답했다.

"아르바이트 소개장이다."

"네?"

"시간 낭비가 취미는 아닐 테고. F급 던전부터 들어가서 꾸준히 사냥해 등급을 올린다는 건 시간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거나 마찬가지야. 아무 득도 없고 성장할 기회도 없지."

백묵이 생각만 해도 짜증난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목소리에는 강한 모멸이 담겨 있었다. 던전에 몰려가 사냥하고 있는 헌터들을 어지간히 미련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다시 자리에 앉은 백묵이 쯧 하고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설명할 필요도 없지. 한 번 들어가보면 이해할 거다. 그딴 걸 사냥이라고 부르는 건 헌터에 대한 모욕이나 마찬가지야. 뻥 뚫린 고속도로로 갈 수 있는데 꽉 막힌 길을 빙빙 돌아갈 필요는 없지 않나? 던전은 최소한 B급은 따고서 들어가는 게 나아. 그 이하는 전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쓰레기다."

대충 요약하자면 낙하산 시켜줄 테니 실적 올리고 빨리 빨리 승진하는 이야기쯤 되는 것 같았다. 물론 명함을 사용할지 말지는 어디까지나 지수의 선택이었다. 불식 길드와 지수는 단순한 동맹관계 일 뿐, 한쪽이 한쪽에게 무언가를 강요할 권리 따위는 없었다. 지수가 자리에 앉은 백묵에게 물었다.

"동맹이니까 지원해주겠다는 겁니까?"

"그건 그냥 오성화 놈이 땡깡부린 거고. 자질만 증명됐다면 누구든 상관없다. 최대한의 효율로 키워낼 뿐이야."

"키우면 길드에 이득을 가져다 줄 테니까?"

"하. 그딴 거엔 애초에 관심도 없어.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나 보군. 이 길드는 수단 중의 하나일 뿐이다. 강한 헌터를 한시라도 빨리, 한 명이라도 더 만들어야 하니까."

지수는 처음으로 순수하게 당황했다. 지금 눈앞의 아저씨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전혀 이해가 안 됐다. 그런 지수의 얼굴을 바라본 백묵은 퍽 유쾌하다는 듯 웃음을 띄웠다.

"왜. 이상하게 들리나 보지?"

"그야 당연히……"

백묵은 잠시 책상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협회에서 승급 기준을 명시하고 있는 건 A급 헌터까지지. S급 헌터로 승급하는 방법이 무엇인 지는 아무도 모른다. 협회에서 일방적으로 통보할 뿐이야. 왜 그렇다고 생각하지?"

갑작스러운 물음에 지수가 입술을 매만졌다. 생각해 보니 정말 그랬다. 한 명의 헌터가 견실하게 실적을 세워 에스컬레이터처럼 승급해 올라갈 수 있는 건 최대가 A급까지였다.

'확실히, S급의 조건이라고 딱 알려진 사항은 없어.’

애초에 S급 헌터들은 어딘가 업계에서 동떨어져 있는 면이 있었다. 이질적이라고 표현하는 게 좋을까. 그들은 '잘 나가는 헌터'니 ‘억만장자', '인기인‘ 같은 단어로 수식되지 않았다. 그저 압도적인 강함과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고만 여겨질 뿐.

곰곰이 생각하던 지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S급은 명예의 전당 같은 느낌이라서, 기준으로는 세울 수 없는 커다란 업적을 요구하니까..…아닌가요?"

"틀렸어."

"그러면 뭔데요?"

"이제야 이쪽 얘기에 귀를 곤두세우는군. 건방지게."

확실히 지수는 지금 백묵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독서를 즐기는 부류의 인간들이 늘 그렇듯이, 지수 또한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백묵은 안 가르쳐주겠다고 놀리는 듯 심술궂은 웃음을 짓고선, 손을 획획 내저었다.

"이 다음은 A급이 됐을 때 얘기해주지. 가 봐."

지수는 얼굴을 찌푸린 채 그냥 말해달라 노려보았지만, 자리에 앉아 손깍지를 끼고 있는 백묵은 언제까지고 묵묵부답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무언의 신경전이 흘렀다. 먼저 포기한 것은 지수 쪽이었다. 이 양반이 진짜, 간만에 제대로 덤빌 맘 들게 하네. 주먹을 꽉 쥔 지수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도발했다.

"성격 참 좋으십니다."

"그런 말 많이 듣지."

가볍게 받아넘긴 백묵이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볼 일 끝났으니 나가라는 뜻이었다. 등을 돌린 지수가 방을 나섰다. 쿵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그리고 사장실 안엔 적막이 감돌았다. 이내 가볍게 한숨을 내쉰 백묵은 옆쪽의 빈 공간을 노려보았다.

"나와 봐."

"…답지 않게 신났네? 그런 캐릭터 아니잖아."

백묵이 노려보고 있는 공간. 그곳에는 언제 들어 왔는지 나비 한 마리가 날개를 팔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비는 단숨에 수를 불려, 수십 마리로 늘어나더니 이내 한 명의 인영을 이루었다. 빛나는 나비를 휘날리며 나타난 건, 한복을 입고 뿔 달린 하회탈을 쓰고 있는 여자였다.

"평소에도 그렇게 좀 웃고 그래. 옛날 생각나서 정겹네."

"부럽군. 옛날 같은 걸 생각할 여유도 있어서."

백묵이 코웃음을 쳤다. 여자는 백묵의 전우였다.

대전쟁.

그렇게 불리는 시기가 있었다. 인간이 아닌 몬스터와의 전쟁. 수많은 희생을 내면서도 방위선을 막는 게 고작이었던 절망의 시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는 강대한 마물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뒷세계를 걸어다니던 암흑기.

그 전쟁에 마침표를 찍은 건 최초의 S급 헌터였던 검성 천유성과, 그와 함께한 다섯 명의 동료들이었다.

그 여섯 명의 전설적인 헌터들을 일컫기를, 육영웅.

그들이 힘을 합쳐 사상 최악의 몬스터였던 '여왕‘을 토벌하는 것으로, 혼란기가 끝나고 평화로운 시대가 찾아왔다.

...그것이 교과서에 적혀있는 역사였다.

지금은 던전에서 괴수를 잡는 것이 거의 스포츠나 마찬가지로 전락해버렸다. 몬스터가 도시로 뛰쳐나오는 일은 거의 없고, 아예 토벌을 인터넷 방송으로 실황중계하는 헌터까지 존재할 정도였다. 그리고 아티팩트를 이용한 신기술들. 지금 이 시기를 인류의 최고 황금기라 칭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백묵은 우습다고 생각했다.

대전쟁은 한 번도 끝난 적이 없다. 지금은 억지로 만들어낸 임시 휴전 상태일 뿐. 옛 전우가 스스로를 희생해서 임시로 ’문’을 잠궈놨을 뿐이다. 이 세상이 얼마나 아슬아슬하게 평화를 유지하고 있는 중인지 알고 있는 건, 정말로 극소수의 인간들 뿐이었다.

그리고 그 잠금은 얼마 있지 않아 풀려버린다. 그것이 지금 백묵의 눈앞에 나타난 이 여자, 육영웅 중의 한 명이었던 '무당‘ 허다인이 내린 점괘 였다.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고 있던 백묵이 입을 열었다.

"그 마물은 아직도 못 찾았나?"

"찾고는 있는데- 점괘를 친다고 다 나오는 게 아니라서. 일단 이 나라에 없는 건 확실해."

백묵도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고 물은 건 아니었다. 대전쟁에서 놓쳐버린 대마물 몇몇이 지금도 사람들 사이에 숨어들어있다. 인간으로 의태할 능력도 지능도 가지고 있는 놈들이니.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자식의 행방이 아직도 묘연했다. 절대 쉽게 찾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백묵이 지수가 나간 문을 쳐다보며 허다인에게 물었다.

"저 꼬맹이. 네가 보기엔 어떻지."

"일단 쌓인 마력의 정순함 자체가 장난 아니네.

교감력이 엄청나게 높은 걸까? 아니면 보통 마법사랑은 다른 방식으로 마나를 받아들이고 있는 걸까. 아무튼 대단한 아이야. 잘만 하면 제2의 흑마녀가 탄생하는 거 아니야?"

백묵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많고 많은 각성자 중에서도 A급 너머까지 성장할 수 있는 인재는 극히 드물었다. 지금은 한시가 급한 상황이다. 저런 재능이 이런 타이밍에 나타나준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백묵은 어서 빨리 지수에게 '그것’을 보여줄 수 있을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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