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1)
실기시험이 끝난 뒤 결과 발표까지의 대기시간. 주최 측의 안내사항에 응시자들은 한바탕 뒤집어졌다.
포인트는 평가 요소의 하나일 뿐, 포인트만으로 순위를 매기는 게 아니라 알려주지 않은 다른 심사기준 또한 복합적으로 적용해서 총점수를 계산한다는 이야기였다. 극단적으로 말해 포인트가 0점이라도 합격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 게 어딨냐고 심사측에 문제제기를 할 여지가 있는 사안이었으나, 예상 외로 응시자들 사이에서는 웅성거림만 일어날 뿐 불만이 겉으로 표출되지는 않았다. 이미 포인트 경쟁에서 밀린 이들에게 는 구원의 밧줄 같은 소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 기수의 수석과 차석은 미리 발표되었다.
-수석 이지수
-차석 전승민
"괴물 새끼들....."
라이센스 시험 응시자들이 전광판에 띄워진 결과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건 경쟁자에 대한 시기나 질투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별세계의 인간을 보는 눈이었다. 혼자서 시험장 전체를 휩쓸다시피 한 미 친놈과 수수한 얼굴을 하고서 그런 미친놈을 일 대 일로 완벽하게 제압한 또 다른 미친놈.
도저히 따라갈 엄두가 안 난다. 그게 본심이었다.
"한 건 올렸네, 축하해."
다가온 오성화가 자리에 앉아있는 지수에게 음료수 병을 획 던져주었다. 고개를 떨구고 있던 지수는 반사적으로 손을 올려 페트병을 받아냈다. 나이스 캐치라고 할 수 있을 만한 반응이었다. 고개를 들자 앞에 선 오성화가 씨익 웃었다.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는 얼굴인데?"
그 말에 지수는 대답하지 않고 두 눈만 끔뻑였다. 와 음료수 못 받았으면 좀 쪽팔릴 뻔했네, 그런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무슨 복잡한 생각. 그러자 오성화는 그 반응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대단한 포커페이스군, 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은 혜성이도 같이 왔었는데. 그 때 카페에서 봤었지? 우리 팀 부팀장. 같은 마법사로서 조언이나 해주라니까 자기 제자인지 뭔지한테 잔소리 좀 해줘야겠다고 가버리더라?
내가 보기에 그거 그냥 내기 진 거 화풀이하려는 거라니까. 오성화가 툴툴댔다. 그는 동맹을 맺은 다음날부터 쭉 이렇게 지수에게 말을 놓고 있었다. 동맹이란 대등한 입장이니, 긍정적인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도 친근한 표현을 쓰는 게 좋다나.
물론 지수 쪽에서 오성화에게 말을 놓는 일은 없었다. 공과 사는 철저히 구분하는 성격이기에 연장자, 그것도 비즈니스 상대에게 말을 놓는 것이 아무래도 꺼려졌다.
"어쨌든, 이걸로 지수 너도 완전히 이쪽 업계 사람이군."
"그런가요. 자격증만 딴 건데."
"끝내주게 화려한 데뷔를 했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주목받겠지. 그만큼 이용하려 접근하는 놈들도 많아질 테고."
빙그레 웃고 있던 오성화의 얼굴이 한 순간 변모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볼 때 그는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살기등등한 시선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수에게 말을 걸 기회를 엿보고 있던 스카우터들을 훑고 지나갔다.
앤 이미 우리 쪽 식구니까 꼬리칠 생각 하지도 마. 다른 길드의 스카우터들에게는 그런 뜻으로 비쳤을 것이다. 자그마치 불식의 오성화가 노려보는 데 계속 그 자리에 서있을 만큼 배짱있는 스카우터는 없었다. 지수 주변에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던 사람들이 우물쭈물하며 천천히 흩어져갔다.
'혹시 날 배려해줘서 일부러 여기까지 온 건가.'
솔직히 좀 다시 봤다. 오성화가 아니었다면 저 양반들한테 길드 같은 데에 들어갈 생각 없다고 납득시킬 때까지 한참을 시달려야 했을 것이다. 그건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흩어져가는 기자와 스카우터들을 보며 오성화가 말을 이었다.
"이 업계는 원래 그래. 누가 조금만 두각을 보이면, 어떻게든 발목을 끌어잡고 함정에 빠뜨리려고 다들 눈을 번득이고 있지. 재능 있는 헌터라는 건 이용가치가 엄청나니까. 그렇게 제대로 꽃피지도 못하고 망가져버 린 사람들도 많아."
가볍게 내뱉는 목소리에서는 숨길 수 없는 씁쓸함이 느껴졌다. 마치 그런 경우를 직접 본 적이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지수는 왠지 모를 숙연함을 느꼈다. 분위기가 가라앉아버린 걸 감지했는지, 오성화가 재빨리 웃음을 띄우면서 말했다.
"하지만 이용당하는 게 나쁘기만 한 건 아니야.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증명이니까. 상대가 뭘 원하고 있는지, 미끼로 뭘 던지면 될지 계산기를 잘 두드려보고 대응하면 돼. 이쪽을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 만큼 이용하기 쉬운 건 없지. 하긴 너 한테 말해봐야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긴가?"
그 말에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이 인간은 나를 대체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오성화의 머릿속에서 자신의 인상은 한 악의 조직 간부쯤 되는 것 같았다. 과대평가에도 정도라는 게 있었다.
"뭐, 이렇게 말하는 우리 쪽에서도 나중에 떨어질 떡고물을 주워먹겠다고 잘 보이고 있는 거란 말씀이지."
그리고 오성화는 안주머니에서 한 장의 스크롤을 꺼냈다.
"혹시 이 다음에 예정은 있나?"
"딱히 없긴 한데요."
"빙고. 지금 너를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거든."
스크롤은 불식의 길드장이 오성화에게 맡겨두었던 물건이었다. 만일 녀석이 라이센스 시험을 '압도적으로’ 통과한다면 이걸 넘겨주라고. 그리고 지수가 시험에서 보여준 퍼포먼스는 오성화가 보기에 충분히 압도적이라고 평할 만했다.
"우리 보스한테 가는 텔레포트 스크롤이야. 좀 무서운 사람이긴 한데, 해코지는 안할 테니 걱정 말고. 쓸지 말지는 네 마음이니까 필요 없으면 그냥 변기에 내려 버리고."
오성화가 지수의 가슴에 스크롤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손을 흔들며 떠나갔다. 하긴 생각해보면 저 사람도 24시간이 스케줄로 꽉 차있을 것이다. 이렇게 느긋하게 풋내기들 라이센스 시험을 구경하러 온 쪽이 이상한 일이었다.
지수는 바로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정말로 변기에 내려 버리려고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저만큼 이나 이쪽을 신경써줬으니, 이쪽도 최소한의 정성은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원래 딱 받은 만큼은 돌려줘야 마음이 편해지는 성격이었다. 정이 많다기보다는 괜히 빚진 기분이 드는 것이 싫었다.
어차피 오성화에 대한 신뢰와는 별개로,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쯤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스크롤에 적힌 문자는 불식 길드 건물로 텔레포트되는 효과라고 ‘해석'되고 있었으니까. 지수가 망설임 없이 스크롤을 찢었다.
환한 빛이 터지는가 싶더니, 눈을 뜨자 사무실 안이었다.
"어……안녕하세요?"
뻘쭘한 지수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책상에 앉은 한 명의 남자가 턱을 괸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겉보기엔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장년의 남자였다. 책상 위에 올려져있는 명패에는 정갈한 붓글씨로 이렇게 쓰여있었다.
- 불식 길드장 백묵.
아무리 동맹이라고 해도 길드 식구도 아닌데, 길드장이랑 일 대 일로 대면할 수 있는 스크롤을 선 뜻 건네주다니. 경호원을 세워둔 것도 아니고 너무 안일한 거 아닌가? 위험할 거라는 걱정은 하지도 않는 건가. 명패에 적힌 두 글자의 이름은 그런 모든 기우들을 우습다고 비웃고 있었다.
백묵. 헌터로서의 별명은 '불가살이(不可殺-)’.
전세계가 그들의 동향을 지켜보고 있다는'S급
헌터' 중의 한 명. 각성자 사회 초기, 몬스터의 위협에 인류가 전혀 대처하지 못하던 대전쟁 시대에 홀로 불식 길드를 세워 대한민국 최고의 위치까지 끌어올린 영웅. 결코 녹슬지 않는 강철. 애초에 그를 위협할 수 있는 암살자 따위는 없는 것이다.
교과서에 적혀있는 사람이 눈앞에 있다. 침을 삼킨 지수의 앞에서, 자리에 앉아있는 백묵이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러자 순간 백묵의 앞에 거대한 마법진이 나타났다. 사무실 안에 피부로 느껴질 수준의 마력이 회오리쳤다. 이게 지금 갑자기 뭐하는 플레이지? 지수가 놀라서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백묵은 극히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마법도 쓸 수 있다지? 막아 봐라."
그건 결코 평범한 헌터가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주변에 소용돌이치는 마력의 격류를 생각하면, 누구나 저딴 걸 어떻게 막아 하고 절규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수는 눈썹을 찌푸릴 뿐이었다. 막아보라니? 대체 뭘 막아보라는 건가. 지금 저 마법진의 문자를 해석한 결과..…저건 공격 주문조차 아닌 단순한 페이크 용 마법이었다. 지수가 쏴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거대한 마법진에서 광선이 터져 나갔고, 광선은 그대로 지수를 스쳐지나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뭔데요?"
지수가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사무실에 몇 초 간의 고요가 이어졌다. 그리고 짝, 짝, 짝. 단조로운 박수소리가 조용히 울려퍼졌다. 백묵은 정말로 재미있다는 듯 살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훌륭하군."
그냥 서있기만 했는데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시네. 지수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