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아니 다 보인다니까 (5)
응시자들은 한데 모여 실기 시험장의 입구에 서 있었다. 각 구획에 배치되어있는 확성기에서 안내 음성이 울려퍼졌다.
<시험의 룰은 간단합니다. 시험장 부지 안에 골렘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들을 처치할 때마다 점수를 얻죠. 종류마다 패턴이 달라서 그걸 빨리 파악하는 게 포인트입니다.>
이른바 점수 쟁탈전이었다. 그 말에 자신이 없던 응시자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무슨 천하제일 무술대회처럼 일 대 일 토너먼트를 시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이런 방식이라면 상황이 흘러가는 것에 따라 그들에게도 가능성이 있었다.
'그것 뿐일리가 없지.'
지수가 심드렁하게 팔짱을 끼고서 생각했다. 이 만큼 넓은 곳에서 사냥감의 막타를 치는 것으로만 점수를 평가한다? 그렇게 되면 단순한 기동력 싸움이 되어버린다. 헌터 협회쯤 되는 곳이 그 정도 허점도 파악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지금 착용하신 조끼는 일정 이상의 데미지를 인식하면 색깔이 바뀝니다. 그렇게 '무력화 상태가 되면 다시 싸울 수 있을 때까지 10분 간 그 자리에서 대기해야 합니다.>
즉 경쟁자를 무력화시키는 것도 전략의 하나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다른 응시자를 무력화시켰을 시, 제압 한 사람은 제압당한 사람이 가지고 있던 포인트를 전부 얻습니다. 자신이 무력화시킨 응시자가 포인트를 하나도 갖고 있지 않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사냥 점수 5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게 어딨어....!
"좋았어!"
그 말에 싸움에 자신 없는 이들은 울상을 지었고, 반면 실력에 자신 있는 응시자들은 환호했다.
그럴 만도 했다. 운 좋게 강한 응시자들을 피해 골렘을 사냥해가며 버틴다고 해도, 마지막에 한 번 제압당하면 모든 점수를 잃고서 끝장인 것이다. 즉 중요한 건 후반의 양상. 진정으로 실력 있는 이들 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식이었다.
<그러면 실기 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응시자들은 각각 넓은 부지의 지정된 위치에 배치되었다. 서로 눈에 보일 만큼 가깝지도, 마주치지 못할 만큼 멀지도 않은 절묘한 거리였다. 배급 받은 장비는 조끼 형태의 경갑과 목검 한 자루가 전부. 준비 시간은 3분이 주어졌다.
'흉갑 가슴팍에 표시된 숫자가 포인트인가.'
현재 지수의 포인트는 0이었다. 시험이 시작된 직후니 당연한 일이다. 지수의 손가락이 허공에 슥슥 문자를 그렸다.
'기민함의 룬', '탐지의 룬', '집중의 룬'. 은은한 빛을 띤 룬 문자들이 지수의 몸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배급받은 목검과 경갑에도 하나씩 룬 문자를 새겨 인챈트했다. 인챈트 스크롤 같은 소모품은 가지고 들어올 수 없었지만, 지수의 룬 마법은 어디까지나 소모품이 아니라 개인 능력이었다.
골렘의 수는 한정되어있고, 몇 마리가 어디에 배치되어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 달려나가서 먼저 골렘을 사냥해야 한다! 아마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수는 오히려 반대라고 생각했다.
'골렘 같은 거 찾자고 여기저기 들쑤실 필요는 없어.'
쫓아다녀야 할 것은 골렘이 아니라 다른 응시자였다. 다른 사람에게 골렘을 잡으면 잡게 할수록, 체력을 떨어뜨리고 뒤통수를 쳐 점수를 홀랑 빼앗아가는 어부지리가 가능하니까. 즉 골렘과 싸우면 싸울 수록 손해를 보는 구조였다.
아마 이걸 깨닫고 아무도 골렘에 손대지 않는 상황이 되는 걸 염려해서 무력화 점수 5점을 설정한 거겠지. 그러면 사람끼리만 싸워도 점수가 모이니까. 다시 말해 이번 시험의 본질은 점수 쟁탈전이 아니라 배틀로얄 서바이벌이었다.
'그리고 서바이벌 게임의 정석은, 존버 또 존버다.’
지수가 주변 바닥에 은신의 룬과 함정의 룬을 설치했다. 지수는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자리를 잡고, 난전 상황이 될 때까지 철저히 숨을 죽인 채 상태를 정비하고 있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후반에 전장에 난입해 점수를 따낸다.
그리고 그 때,
지수와는 정반대의 행동을 취하고 있는 응시자가 있었다.
***
"괜찮아. 골렘이든 다른 놈이든 만나자마자 사냥하면서 상황을 굳혀가면 우리가 이겨. 누가 배신만 안 하면 된다고."
"우리 말고도 팀 짠 애들이 있으면 어떡해?"
"그 놈들도 굳이 우리랑 충돌하려 하지는 않으려 할걸."
"그래. 우린 아무 생각 말고 점수만 쌓으면 돼."
언덕의 중턱을 걷고 있는 네 사람. 그들은 서로 면식이 있다는 점을 이용해서 재빨리 모여 파티를 이루고 있었다. 확실히 그건 좋은 전략이었다. 서로 협력해서 골렘을 잡으면 체력의 부담 또한 적어진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다른 응시자들에게 습격당할 가능성이 거의 사라진다는 점이었다.
"허허. 또나왔네요, 저러는 놈들."
"저것도 하나의 방법이지. 똑똑한 거야."
관전실에서 상황을 지켜보는 길드의 스카우터들이 말했다. 확실히 헌터 라이센스를 따내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조금 치사해도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다만 저런 식으로 시험을 통과해봤자 길드의 평가는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근데 혜성이 넌 왜 저거 보면서 실실 웃고 있냐? 너 저렇게 뭉치는 거 거의 험오하잖아. 졸렬한 술수 쓴다고."
"그러니까 웃는 거라고요."
오성화의 물음에 김혜성이 코웃음치며 대답했다.
"......이제 곧 박살날 모습이 기대되니까."
주최 측에선 합격 기준이 몇 점인지 말해주지 않았다. 절대평가인지 상대평가인지도 모른다. 그런 정보부족 상황에서 드러나는 건, 초조해하지 않고 최선의 선택지를 택할 전략 입안능력. 적의 급습을 대비하는 정찰 및 경계능력.
그리고 그 모든 걸 코웃음치는 압도적인 전투능력.
"저 녀석, 뭐지?"
시험번호 2번. 그 남자는 너무나 당당하게 뭉쳐 있는 네 명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어찌나 망설임 없는 발걸음인지 한 순간 적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떠올리지도 못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 잠깐의 빈틈은 치명적인 실책이 되었다.
남자가 손을 앞쪽으로 뻗었다. 그리고 그의 손바닥 앞에서 펼쳐지는 건, 돌풍을 휘감으며 빛나는 마법진이었다. 그 광경에 목검을 들고서 응전태세를 취하려던 네 명은 눈을 의식했다. 이거 반칙이잖아! 라는 항의가 목아래까지 차올랐다.
"꺼져."
남자의 말과 함께 주문이 작렬했다. 불꽃의 격류는 그대로 네 사람을 전투불능으로 만들어 이탈시켰다. 네 사람이 차곡차곡 골렘을 사냥해가며 모아 온 포인트가 전부 한 순간에 남자의 것이 되었다. 남자는 쓰러진 네 사람에게 눈길 한 번 주는 일 없이 계속 가던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저 2번이 네가 봐뒀다는 루키인가?"
"네. 전승민. 클래스는 마법사에 계열은 원소 마법. 각성한 지 두 달 째인데 벌써 4대속성을 전부 다 쓸 줄 안다고요. 저 놈 천재예요. 일단 타고난 마나통부터가 괴물 같으니."
남자의 학살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숨죽이고서 기회를 엿보거나 은신처를 만들거나 하는 일 없이, 당당하게 걸어가며 눈에 보이는 적 전부를 상대한다. 그런 방식으로 지금까지 전승민은 거의 모든 적들을 일격에 쓰러뜨리고 있었다.
깍지를 낀 오성화는 끄응 침음을 흘렸다. 저 자존심 덩어리인 김혜성이 솔직하게 칭찬할 정도의 놈이니 상당히 대단할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더 압도적인 놈이었다. 뭐야, 이거 내기 질지도 모르겠는데. 오성화가 식은땀을 흘리며 무언가 이변이 일어나주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상당히 시간이 지난 뒤, 뚜벅뚜벅 걷고 있던 전승민의 발에 무언가가 걸렸다. 고개를 내려다보니 그건 수풀 사이에 교묘하게 숨겨져있는 글자였다. 이게 뭐지? 남자가 눈썹을 찌푸린 순간, 아찔한 전격이 그의 온몸을 타고 올라왔다.
‘함정의 룬.'
룬이 전승민의 움직임을 경직시키는 것은 일순간이었고, 지수는 그 일순간으로 충분했다. 일곱 종류의 룬을 풀 도핑한 채 숨 죽이고 있던 지수가 총알처럼 튀어나오는 것과 동시. '불의 룬’을 휘감은 목검이 전승민의 어깨를 내리찍었다.
"웃기지 마라…!"
전승민은 그렇게 무너져내린 자세에서도 반격을 시도하려 했다. 그의 손바닥에서 순식간에 마법진이 형성됐다. 하지만 그 순간, 삐이익 소리와 함께 전승민의 흉갑이 빨간색으로 변했다. 방금 받은 데미지로 전승민이 무력화됐다는 뜻이었다. 무력화 되어 전장에서 이탈한 상태에서의 공격은 금지였다.
지수가 느긋하게 자신의 흉갑에 적힌 숫자를 확인했다. 지금 2번 한 명을 사냥한 것으로 얻은 게 자그마치 465포인트였다.
"오. 합격 확정."
괜찮아요. 지수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전승민을 격려해주었다. 포인트는 다시 모이면 되는 거죠. 열심히 하세요. 이를 꽉 다문 전승민의 얼굴에 분노가 끓어올랐지만, 그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무력화 된 이상 10분 동안은 다른 사람을 공격할 수 없고,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도 없었다.
"저 먼저 갈 테니까 힘내시고."
".....얼굴 기억했다."
"네. 다음부터는 발밑 잘 보면서 걷는 게 좋겠네요."
휘파람을 불며 저만치 떠나가는 지수를 보며, 전승민은 각성자가 되고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살의를 느꼈다.
"바로 그거지! 역시 우리 지수! 기대를 배반하지 않죠!"
위쪽의 관전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오성화가 주먹까지 쥐며 환호했다. 말싸움하다 영웅 급 아이템까지 걸어버려서 쫄려 죽는 줄 알았는데 아주 통쾌한 역전극이었다. 반면 김혜성은 사기를 당한 것처럼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화면의 지수를 삿대질한 김혜성이 목에 핏줄을 세우며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연금술사라며!! 연금술사라고 했잖아!!"
물론, 지수가 그런 말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