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아니 다 보인다니까 (4)
지수는 강사가 떠난 자리에 앉아 조용히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너무 신나있었어.'
사실 생각해보면 웃기는 일이었다. 이쪽에서 과외선생 좀 소개시켜 달라고 부탁한 주제에, 불러주니 그 앞에서 과시라도 하는 듯 몇 번이고 백 점을 맞아버리다니. 사정을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무슨 관심병자 같아 보일 것이다.
하지만 몇 시간 전의 지수는 도저히 끓어오르는 흥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몬스터들이 주고 받는 신호나 생태들이 지수의 눈에 끊임없이 해석되고 있었다.
아마 명확한 체계를 가지고 있는 의사소통 수단 이라면 굳이 문자 형태가 아니라도 해석이 가능한 듯 했다. 예를 들면 수화나 모스 기호, 꿀벌의 언어처럼. 그건 즉 지수에게 있어서 필기 시험을 통과 하는 건 누워서 떡 먹기라는 뜻이었다.
'근데 결국 올백은 못 받았네.'
지수가 억울하다는 얼굴로 입가를 삐죽 내밀었다. 총 열입곱 번의 시도에서 지수가 얻은 총점은 1692점. 다시 말해 8점의 감점 요인이 있었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건 결코 지수의 실수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완벽했던 게 탈이었다.
칼날늑대 암컷의 높은 울음소리는 수컷의 경우와 달리 '이 싸움에 상관하지 마라'가 아니라 '지금 당장 구해주러 와달라’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아직 던전 연구자들은 그 생태를 밝혀내지 못했다. 그렇기에 무리를 해서라도 그 자리에서 도망쳐야 한다는 지수의 판단이 감점을 당한 것이다.
하긴 지수에게는 익숙한 경험이었다. 학교에 다닐 때도 관심 있는 분야를 따로 공부하다, 교과서와 다른 내용을 답으로 적어내면 오답 취급을 당하곤 했었다. 그때는 세상 다 잃은 것처럼 분하고 화났었지만 지금은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어차피 커트라인만 넘으면 되는 시험이니.'
오히려 만점을 받지 못한 것보다 창백한 얼굴로 자료를 챙겨 나가던 강사가 더 신경쓰였다. 자기 직업에 자부심이 대단해보이던데 혹시 자존심을 건드려버린 게 아닐까 하고. 하지만 이제 와서 신경써봐야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꼴이었다.
앞에 닥친 시험 컨디션 관리에나 집중하자. 마음을 정리한 지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으로 돌아 가면 비약 만들기부터 마법 연습까지 해야 할 일이 잔뜩이었다.
***
라이센스 시험은 헌터 협회 건물에서 이루어졌다.
필기는 강사가 틀어주었던 모의 시뮬레이션과 달리, 직접 VR고글을 쓰고서 진행되었다. 책상에 모여앉은 응시자들이 전부 새까만 기계장치를 눈에 차고 있는 모습은 SF소설에나 나올 법한 진풍경이었다. 이내 시뮬레이션이 시작되었다.
<1. 앞으로 진행한다.>
<4. 오른쪽 갈림길로 향한다.>
<1. 숨을 죽인 채 자리에서 대기한다.>
<2. 바닥의 문자를 발로 지워버린다.>
지수의 선택은 거침없었다. 숙고할 필요도 없이 지수의 눈에는 모든 신호와 단서들이 모조리 해석 되어 보이고 있었다. 땅바닥에 보라색 침을 흘린다는 것은 경보 페로몬으로 동족을 부르고 있다는 뜻. 꼬리춤을 추는 속도는 몬스터 캠프와의 거리를, 꼬리춤의 각도는 캠프의 방향을 나타낸다.
<던전을 클리어했습니다. 시험을 종료합니다.>
지수는 고글을 벗어 책상에 내려놓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무래도 시험을 제일 일찍 끝낸 건 지수인 것 같았다. 다른 응시자들은 아직 고글 안의 화면에 빠져 신중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지수가 조용히 손을 들고 문을 가리키자, 시험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끝났으면 퇴실해도 좋다는 뜻이었다.
시험장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앉아서 대기하고 있던 한 남자가 벌떡 일어나 지수에게 다가왔다. 수첩을 들고 있는 남자는 다짜고짜 막대형 녹음기를 들이대며 말했다.
"오, 빨리 나오셨네요! 시험은 포기하신 겁니까?
아, 저는 헌터 전문 객원기자 김민기라고 합니다.
지금 라이센스 시험의 난이도에 대해서 기사를 쓰고 있는 중인데, 괜찮다면 현장 응시자로서 인터뷰를 부탁해도 될까요?"
속사포처럼 터져나오는 남자의 말에 지수는 눈썹을 찌푸렸다. 갑자기 다가와선 시험을 포기했냐느니 뭐니 상당히 무례한 어조였다. 눈앞의 남자는 지수가 상종하기 싫어하는 전형적인 부류였다. 하지만 지수는 느긋한 태도를 잃지 않고 대답했다.
"다 풀고 나왔고요. 인터뷰는 사양하겠습니다."
"하하. 다들 그렇게 말하고는 하죠."
기자가 피식 코웃음을 쳤다. 마치 지금 지수가 쪽팔려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 생각하는 듯한 반응이었다. 사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당연한 판단이었다. 이 짧은 시간에 저 던전 탐험 시뮬레이션을 다 풀고 나오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기자는 라이센스 시험의 필기시험 난이도를 비판하기 위한 기사를 쓰고 있었다. 기사의 원고는 이미 거의 다 완성되어있었다. 그 원고의 요지는, 만점자는커녕 90점 대도 나오지 않는 현 시험체제가 과연 타당하냐는 질문이었다.
"저도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합니다. 미치도록 어렵잖아요 필기가. 그래도 뻔히 들통날 거짓말을 하는 건....."
"더 할 말 없으시면 가보겠습니다."
작게 한숨을 쉰 지수는 정말 질렸다는 듯 터덜 터덜 복도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그 와중에 기자는 날카로운 눈썰미로 지수가 가슴팍에 달고 있는 시험번호를 기억해두었다. 시험을 포기하고 도중에 나온 25번 응시자. 이건 좋은 소재였다.
그리고 점심시간 기계의 채점이 끝났을 때. 필기 시험 결과를 확인한 기자는 자리에 서서 멍하니 입을 벌렸다.
"말도 안 돼."
*수험번호 25번, 100점.
*수험번호 31번, 81점
*수험번호 12번, 76점
헌터 협회 1층 로비 전광판의 맨 위에는, 당당히 역대 최초 라이센스 필기시험 만점자의 수험번호 가 쓰여있었다.
***
복도를 뚜벅뚜벅 걷는 두 남자의 차림새는 큰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한쪽은 쫙 빼입은 새까만 정장에 광을 낸 구두, 선글라스. 그리고 나머지 한쪽은 러프한 후드티에 스니커즈를 신고 머리엔 누더기같은 고깔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다.
"혜성이 너, 요새 실력이 좀 늘어난 것 같은데. 뭔가 한 꺼풀 벗어던진 느낌이야. 깨달음이라도 얻은 건가?"
"아, 그거요? 사실 인터넷에 '척척……"
"척척?"
거기까지 말한 김혜성이 황급히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어느 날 마법사 카페에 불현 듯 나타난, 대체 누구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 정체 불명의 마법사. 의문의 회원 '척척박사'가 고깔에 마법 노하우를 풀어주는 전제조건은 카페 외부에의 누설 절대 금지였다. 아무리 동료라고 하더라도 섣불리 말할 수는 없었다.
"비, 비밀이에요. 이건 말하면 안 되는 거라서."
"아니 뭐, 캐물으려는 건 아니었는데. 그보다 혜성이 너까지 시험장에 따라올 줄은 몰랐네. 너도 지수 보러 가는 건가?"
그 말대로 오성화는 지수가 실기시험을 치르는 걸 보러 가는 중이었다. 필기시험이야 옆에서 구경할 수가 없지만 실기의 경우는 모든 현역 헌터들과 길드 스카우터들이 자유롭게 관전할 수 있었다. 팔짱을 낀 김혜성이 피식 웃었다.
"아뇨, 저도 개인적으로 주목하는 녀석이 있어서."
오성화와 김혜성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에 있던 사람들의 주목이 단숨에 쏠렸다. 관전실 안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라이센스 시험은 모든 신인 헌터들의 등용문이니, 유망주를 스카우트하러 모여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신인을 포섭하는 데에 목말라하는 중소 길드까지의 이야기다. 굉장한 다크호스나 슈퍼 루키가 등장하지 않는 이상 거대 길드의 스카우터가 직접 모니터링하러 오지는 않는다. 그런데 지금 문을 열고 들어온 건.
'불식 1팀의 팀장과 부팀장이 함께…?'
최악의 A급 던전이었던 늪지옥의 단독 공략에 성공한 불식 1팀은, 헌터 업계에서 전례없을 정도로 주가가 올라있었다. 그런데 그런 팀의 인사 담당자도 아니고 자그마치 팀장과 부팀장이 직접 왔다고? 이건 말 그대로 대사건이었다.
방 안에 그런 경악이 흐르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오성화와 김혜성은 느긋하게 수다를 떨며 자리에 앉았다.
"고놈 참 물건이에요.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시간을 좀 들이면 저희 팀 수습 정도로는 쓸 수 있을 걸요."
"네가 그런 말을 할 정도면 상당한가 본데."
오성화가 기대된다는 듯이 눈을 빛냈다. 그 말대로 김혜성은 자기 실력 하나만 믿고 뻗대는 성격 때문인지, 다른 인재를 평가하는 데에 상당히 째째했다. 그런 김혜성이 이리 자신 있게 말할 정도면 분명 대단한 소질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장담하죠. 걔는 이번 기수 다크호스가 될 겁니다."
팔짱을 낀 김혜성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건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기도 했다. 지금 김혜성이 기대하고 있는 응시자는, 마법사들만의 인터넷 카페인 '고깔'에서 만나 채팅을 주고받은 게 연이 되어 이런저런 조언을 해준 녀석이었다. 그렇게 신경써준 녀석이 풋내기한테 질 리가 없다.
하지만 오성화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끔뻑였다.
"뭔 소리야? 이번 기수 다크호스는 당연히 지수지."
"네? 걔 연금술사 아니에요?"
"아마 그럴걸."
"에이 무슨, 연금술사가 어떻게 싸움까지 잘 합니까? 보니까 필기 수석 딴 것 같더만. 실기까지 바라는 건 욕심이지."
김혜성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 말은 정론이었다. 애초에 대장장이나 연금술사 같은 생산직들은 헌터 라이센스를 딸 필요 자체가 없었다. 그들은 던전에 들어가서 몬스터와 싸우는 게 아니라 공방에서 아이템을 만드는 게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오성화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흑마녀는 연금술산데 싸움도 잘 하잖아. 아마 너랑 나랑 같이 덤벼도 걔가 이길걸? 1팀 다같이 달려들어야 이길까 말까야."
"그 괴물년이랑 비교하면 안 되죠. 걔는 이레귤러에 S급인데. 예외지."
그 또한 정론이었다. 하지만 성화는 지수도 충분히 예외에 들어가는 인재라고 생각했다. 선글라스를 벗고, 도발하듯 피식 웃은 오성화가 김혜성에게 말했다.
"내기 해? 실기 수석 누가 따나? 함 해?"
"하. 이 양반이 진짜."
가소롭다는 듯 김혜성이 코웃음을 쳤다. 불식 1 팀의 팀장과 부팀장의 자존심을 건 내기가 성립되었다. 위쪽의 관전실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시험장 안에 필기시험을 통과한 응시자들이 하나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험장 바로 옆의 대기실.
눈을 감고 마도 명상을 끝낸 지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