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아니 다 보인다니까 (2)
지수와 오성화가 처음 만났던 역 앞의 카페.
정장 차림의 오성화는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은 자리에 앉아있었다. 얼굴에는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채였다. 그럴 만도 했다. 이번 A급 던전의 단독 공략으로 오성화와 불식 1팀의 주가는 오를 만큼 올라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로 나라 안이 떠들썩했다.
하지만 그들은 알까. 불식 1팀이 던전 공략에 성공한 것에는 숨은 공로자가 있다는 것을. 원래대로라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전멸할 뻔 했다는 것을. 피식 웃으며 오성화가 커피를 홀짝였다. 약속상대는 시간에 딱 맞춰 찾아왔다.
"오셨어요, 지수 씨."
오성화는 환한 미소를 짓고 지수를 반겨주었다. 지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뚱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본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부터 철벽을 치고 있기 위함이었다. 그래도 이쪽이 해준 게 있는데 이 정도 무례함은 용서해주겠지.
"......며칠만에 또 보게 됐네요. 큰일 치르신지 얼마 안 됐는데. 던전 공략이 끝난 다음엔 보통 푹 쉬지 않나요?"
"쉬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서요."
"말씀해주실 게 있으면 그냥 문자로 주셔도 되는데."
"아뇨, 직접 얼굴을 보고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오성화가 선글라스를 벗어서 내려놓았다. 얼굴을 들켜 이목이 집중될 수도 있지만, 그런 것보다 지수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듯 했다. 오성화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받은 지수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실례인 거 알지만 먼저 말씀드리겠는데, 불식에 들어오라고 설득하러 오신 거면 애초에 헛수고니 그냥……"
지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오성화가 한쪽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우르르 일어났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지수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놀라서 의아해하는 지수에게 오성화가 말했다.
"저희는 순수하게 감사를 전하러 왔을 뿐입니다."
맞은편의 성화 또한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지수는 그제야 깨달았다. 지금 일어나서 인사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가슴팍에 똑같은 모양의 휘장을 차고 있다는 것은. 결코 녹슬지 않는 단단한 대검은 불식 길드의 표식.
즉, 지금 인사하고 있는 것은 불식 1팀의 멤버 전원.
"그 던전의 비밀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어떤 수단을 써서 정보를 손에 넣은 건지. 묻지 않겠습니다. 지수 씨가 그런 경고를 살짝 흘리는 것만으로, 얼마만큼의 위험요소를 부담해야 했을지도 모를 만큼 어수룩하지는 않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그건 그냥 감으로……"
"그럼에도 지수 씨는 저희를 걱정해서 귀띔해주셨습니다. 그 결과, 불식 1팀은 전원이 목숨을 구원 받았다."
오성화의 말은 과장도 뭣도 아니었다. 지수가 회복 물약과 해독제를 가져가라고 말해주지 않았다면 공략에 성공하기는커녕 탈출하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늪지대에 발이 묶인 채 서서히 소모당하다, 지금쯤 불식 1팀은 한 명도 빠짐없이 그 안에서 백골이 되어있었겠지.
"저는 자주 콩깍지에 씌이니까. 최대한 과대평가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과소평가였던 모양입니다."
처음에는 천재 연금술사를 찾아냈다고 생각했다. 그 다음엔 능력과 별개로 만만치 않은 수완을 가진 청년이라고 감탄했다. 그리고 이제 오성화는 눈앞의 청년에 대해서 자신의 잣대로 평가하기를 그만두었다. 과장 반쯤 보태서 지수가 사실 마법까지 쓸 수 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이 빚을 갚을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지수 씨를 불러낸 것도 그것 때문입니다."
갑작스러운 말에 지수가 멍하니 굳었다. 이른바 은혜 갚기란 말인가. 스카우트나 그런 것이 아니라, 단순히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 보통 그런 것 때문에 막 던전행을 끝낸 거대 길드 팀원들이 아무 이름도 없는 각성자를 만나러 오나?
"우선 지수 씨, 이걸 받아주세요."
그렇게 말한 성화가 내민 건 한 개의 반지였다. 거미 다리 같은 장식이 달려있는 연녹색의 가락지. 반지에 의식을 집중하자 저절로 아이템에 대한 정보창이 떠올랐다.
[늪지옥 여왕의 반지(영웅)]
늪지옥을 지배한 거미 여왕의 정수가 담긴 반지.
'거미여왕의 늪지옥‘을 최초 시도로 클리어해야 획득할 수 있다.
상급 이하의 맹독 효과에 완전한 면역을 부여하고, 그보다 높은 등급의 맹독에 중독될 시 효과를 50% 경감시킨다.
반지에 마력을 주입하는 것으로 적의 이동을 방해하는 늪지대와, 적의 회복 효과를 반감시키는 피안개를 형성할 수 있다. (이 효과는 동시에 둘 중 하나 밖에 발동할 수 없다.)
'또라이 같은 아이템이다.'
일단 반지 주제에 영웅 등급이라는 것부터가 어이가 없는데, 효과는 한층 더 난리가 나있었다. 상급까지의 맹독을 아예 안 통하게 해준다니? 아닌 게 아니라 이 반지 하나만 있으면 맹독 대책은 그냥 끝나는 것이나 마찬가지 였다.
게다가 늪지대와 피안개 형성 효과 또한 흘륭했다. 직접 써보기 전에는 제대로 평가할 수 없겠지만, 설명만으로도 어느 상황에서나 확실하게 이득을 볼 수 있는 꿀 같은 스킬이었다. 초견살 패턴의 A급 던전을 초견으로 클리어해야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기도 했다.
지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지수의 손에 들린 이 반지 하나의 가격은 최대한 저렴하게 잡아도 수억을 호가할 것이다. 말이 수억이지 물건의 가치를 아는 헌터라면 누구에게도 팔지 않고 자신이 사용하겠지. 지수가 주먹을 꽉 쥐었다. 가지고 싶다. 하지만 해야 할 대답은 이미 정해져있었다.
"죄송하지만 못 받겠습니다. 보답 치고는 너무 과해요."
괜히 폼을 잡거나 겸손을 떠는 것이 아니었다. 지수 또한 갖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말 한 마디 귀띔해준 것 가지고 이런 물건을 받아버리면, 오히려 이쪽이 빚을 지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빴다. 그러다가 질질 끌려다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성화는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 반지는 보답 같은 게 아닌데요."
"……네?"
"보스가 드랍한 아이템은, 던전 공략의 최고 공로자에게 돌아가는 게 헌터 업계의 룰. 그리고 이번 공략의 MVP는 바로 지수 씨 당신입니다. 그건 은혜에 대한 보답이니 뭐니 하는 게 아니라 당연히 가지셔야 할 물건일 뿐입니다."
남 아이템 훔치면 욕 먹고 업계에서 쫓겨납니다. 어깨를 으쓱인 성화가 농담 반 진담 반인 어조로 말했다. 지수는 괴상망측한 표정을 하고 오성화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성화는 결코 지수에게서 반지를 돌려받을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러면 보답하겠다는 건 뭔가요."
지수의 물음에 성화가 큼큼 헛기침을 하고서 말했다.
"불식 길드는 지수 씨에게 동맹을 제의하고자 합니다."
동맹. 수준이 비슷한 두 길드가 서로를 우군으로서 지켜주고, 기술과 지식을 공유하면서 발전하는 것을 꾀하는 시스템. 중소 길드들 사이에선 흔하게 이루어지는 일이지만, 그 단어가 불식 길드의 입에서 나오는 건 커다란 의미를 지녔다.
'녹슬지 않는 검은 고고하다.’
불식에 산하 길드는 있어도 동맹 길드는 하나도 없었다.
불식과 대등한 관계가 될 수 있을 만큼 영향력 있는 길드들은 전부 불식을 언젠가 넘어뜨려야 할 벽으로 보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길드도 아니고 단 한 사람의 각성자와 동맹을 맺는다? 그것도 아직 헌터 라이센스도 못 딴 풋내기와?
하늘이라도 무너지지 않는 이상 그런 억지가 통할 리 없다.
그리고 하늘을 무너뜨리고서 그런 억지를 통하게 할 수 있는 게 오성화와 불식 1팀이었다. 사실상 불식 길드의 차기 길드장인 오성화와 그 측근들인 불식 1팀 전원이 절박하게 부탁하는 사안을 대체 길드의 누가 거절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으로 지수의 몸에 누군가가 위해를 끼치려는 날에는, 불식 길드가 나서서 밟아줄 정당한 명분이 생겼다. 지수의 능력을 이용하기 위해서 별 잡놈들이 꼬이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그것이 지수가 능력이 새어나갈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들을 구해준 것에 대한 성화 나름의 배려였다.
"동맹이 되면 제가 뭔가 해야하는 게 있나요?"
"동맹은 단순한 우호 관계의 공식적 표명일 뿐 이니, 당장 지수 씨가 저희 길드에 무언가를 해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은 그냥 동맹으로서 불식 길드에 호감을 가져주신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고도 남아요. 사실 그게 제 노림수입니다. 일종의 선행 투자죠. 아, 여기 웃어야 할 부분인데?"
"안 웃긴데요."
"빙고. 사실 진지한 이야기였어요. 보은이라고 해도 이 동맹을 맺는 건 언젠가 저희 길드에 큰 이익이 되겠죠. 적어도 저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쪽에서 도와줄 게 있다면 뭐든지 말씀해주세요. 가능한 한 지원해드릴 테니."
성화는 지금 당장에라도 말해보라는 듯 자신 있게 입꼬리를 올렸다. 팔짱을 끼고 있는 다른 불식 1팀 멤버들 또한 무엇이든 해내보이겠다는 듯 굳건한 각오가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뭘 이렇게까지 해주지? 라는 생각이 들어도, 그들 입장에서는 지수 덕분에 목숨을 구한 셈이니 이 정도는 당연했다.
"정말로 뭐든지 가능하나요?"
"저희 능력 범위 안의 일이라면요."
그리고 저희 능력 범위는 아주, 아주 넓죠. 오성화가 능글맞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지수가 원하기만 한다면 범죄조직 하나를 통째로 괴멸시키는 것도 가능했다. 목숨의 빚을 갚겠다고 정했을 때부터, 그 정도 각오는 굳히고 있었다.
지수는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부탁하고 싶은 것이라. 내가 이 사람들한테 부탁하고 싶은 것. 그게 뭐지. 아, 생각났다. 작게 손뼉을 친 지수가 입을 열었다.
"맞다, 족집게 과외 좀 소개해주실 수 있어요?"
"네?"
"헌터 라이센스 시험을 보려는데 필기가 영 불안해서. 제가 그런 쪽 라인이 하나도 없거든요."
과, 과외 선생 소개요…? 이건 정말 상상도 못했다는 듯, 오성화와 불식 1팀 멤버들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