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그냥 하는 말인데요 (3)
지수는 오성화의 명함과 손에 쥔 핸드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러고 있는 게 벌써 십 분 째였다. 혼자서 호들갑을 떨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되도 않는 오지랖이다. 상관도 없는 남 일에 참견하는 건 자신답지 않았다. 그런 생각들이 계속 머릿속을 멤돌았다.
'하지만. 그래도.’
지수가 손에 들고 있는 핸드폰을 꽉 쥐었다.
오성화가 이끄는 불식 길드 1팀은 정석적이고 견실한 팀이었다. 개개인의 높은 전투능력을 기반으로 한 팀워크. 힐러를 믿고서 회복 물약 대신에 온갖 비약과 버프 아이템들을 포켓에 쑤셔넣고 몬스터들을 도륙해가는 고화력 초전박살 전략.
그렇게 압도적이고 화려한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그래서 불식의 1팀은 던전이나 헌터에 대해 잘 모르는 문외한이 봐도 강하다는 걸 한 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정면승부로 그들의 진격을 막아세울 수 있는 던전은 거의 없을 터였다.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던전명: 거미여왕의 늪지옥>
< 난이도 : A랭크>
<주요 출현 속성 : 어둠>
<주요 등장 패턴: 석화, 맹독, 암흑>
<특이사항: 던전 안에 깔린 피안개가 회복 스킬을 모두 무효화시키기에 체력 관리는 순전히 아이템에 의존해야 함.>
이번에 도전할 던전인 '거미여왕의 늪지옥'은 아마 불식 1팀과 최악의 상성이었다. 던전에서 등장하는 패턴들이 전부 철저하게 '정면승부를 성립시키지 않는‘ 종류의 방해 효과들이었으니까. 심플하게 강력한 파티일수록 맹점을 찔리기 쉬웠다.
게다가 회복 스킬을 무효화시키는 피안개가 던전 전체에 깔려있다. 힐러만을 믿고서 회복 아이템 하나 들고 가지 않는 불식 1팀이 이 던전을 공략하는 건 당연히 불가능. 단순히 실패하는 게 아니라 한 명도 돌아오지 못하고 전멸해버 릴지도 몰랐다.
당연히 오성화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을 것이다. 게이트에 쓰여진 '던전 안내'는 오로지 해석사인 지수만이 해석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지수가 던전 안내를 해석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꽁꽁 숨겨둬야 할 정보이기도 했다. 과장 좀 보태서 헌터 업계를 뒤집어놓을 수 있을 수준의 능력이다. 너무 대단한 능력은 양날의 검이었다. 누구에게 위협받지 않을 만큼 지수의 입지가 탄탄해지기 전까지는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불식 길드에게 스카우트 제안을 받긴 했지만 지수에게는 딱히 그치들을 도와줄 의리도 없고, 갚아야 할 은혜도 없었다. 던전이 위험해보이는 게 어쨌다는 말인가? 일류 헌터라면 알아서 대비할 것이다. 지수가 해야 할 일은 아주 간단했다. 그냥 입 꾹 다물고 모른 척한 채로 지나가면 된다.
"개뿔이."
...그리고, 그런 식으로 납득하지 못하는 게 지수의 나쁜 버릇이었다.
"그래. 비약 사줬으니까 서비스로.''
크게 한숨을 쉰 지수가 삑삑 핸드폰 번호를 눌렸다. 명함에 적혀있던 오성화의 번호였다. 일이 바쁘고 뭐고 뚜르르 세 번 안에 안 받으면 그냥 끊어야지. 지수는 뚱한 표정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통화는 거의 걸자마자 연결됐다.
<여보세요? 이 직통 번호에 모르는 번호로 걸려 왔다는 건. 지수 씨인가? 이거 지수 씨밖에 없는데. 지수 씨 맞죠?>
"……네. 이지수인데요."
<빙고. 드디어 생각을 바꾸셨어요? 불식 들어오시려고!?>
"그건 전혀 아니고요."
지수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길드 같은 데에 들어갈 생각은 정말로 요만큼도 없었다. 이건 그저 연금술사로서의 첫 단골에 대한 사소한 애프터 서비스일 뿐이었다.
"이거 그냥 하는 말인데요."
< 네.>
"아마 이상하게 들릴 거예요. 근거 같은 거 하나도 없고 그냥 감입니다."
<감은 중요하죠.>
"저도 답지 않은 짓 하고 있다는 거 아는데. 그냥 흘려 넘기셔도 되고. 조금 찜찜해서 이러는 거거든요."
<괜찮습니다. 말씀해 보세요.>
지수가 다시 한숨을 쉬었다. 혼자서 호들갑을 떨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되도 않는 오지랖이다. 상관도 없는 남 일에 참견하는 건 지수답지 않았다. 하지만 아는 사람 목숨이 달려있는데, 모른 척 시치미 뗄 수도 없는 일 아닌가.
"……힐러만 믿지 말고 회복 물약 꽉꽉 채워 들고 가세요. 독 대책 철저히 하시고. 빛 속성 인챈트 준비하시고."
지수는 후련하게 내뱉었다. 해야 할 말은 다 했다. 이걸로 못 알아처먹으면 어떻게 되든지 지수가 알 바 아니었다.
길드 숙소 앞에 서있던 오성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잘 알겠습니다. 참고하도록 하죠."
정중하게 통화를 끊은 오성화는 핸드폰을 다시 양복 안주머니에 집어넘었다. 그러자 옆에서 팔짱을 끼고 서있던 고깔모자의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불식 1팀의 마법사인 김혜성이었다. 그가 기대 어린 시선을 보내며 질문했다.
"대장이 찍었다는 그 애입니까? 들어온대요?"
"아니. 그냥 조언 좀 해주던데."
조언이라니? 김혜성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눈을 끔뻑였다. 일주일 전 막 각성한 풋내기가, 불식 길드의 에이스한테 훈수를 두었단 말인가? 그것 참 될 놈이네 하고 김혜성이 파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오성화의 얼굴은 진지했다.
"당장 아공간 포켓 다 비우고 회복 물약 쑤셔넣어. 해독제랑 엘릭서도 넣어두고. 혜성이 네가 다른 애들한테도 전달해라."
"네?"
"맞아. 그리고 빛 속성 인챈트 스크롤도."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대장 혹시 미쳤습니까?"
김혜성이 정신병자를 바라보는 얼굴로 오성화를 쳐다보았다. 끝내주는 힐러가 파티에 있는데 포켓에 회복 물약을 쑤셔넣는 것은 지극히 비효율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표정을 보니 오성화의 말은 그냥 하는 농담이 아니라 진심인 듯 했다.
"……진짜로?"
"신뢰를 얻으려면 먼저 신뢰를 줘야 하는 법이니까."
사실 오성화 또한 그게 비효율적인 일이라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시를 내린 것은 지수에게 이쪽의 진심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지금 이지수는 저쪽이 내 말을 어디까지 받아들여주는가 하고 간을 보며 불식 길드를 시험해보는 것일 수도 있으니.
'전부 계산한 거라면. 역시 만만한 친구가 아니야.
뚜벅뚜벅 걷고 있는 오성화가 식은땀을 흘리며 웃었다. 별 생각 없는 것 같은 기행 하나하나에 숨겨진 의도가 있다. 오성화의 머릿속에서 지수의 인상은 점점 뱃속에 수백 마리 뱀들이 똬리를 틀고 있는 냉철한 책략가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날. 불식 1팀은 던전에 입성했다.
거미여왕의 늪지옥. 그곳은 지금까지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던전 특유의 고양된 공기. 당장에라도 침입자를 죽이려는 몬스터들의 투기와 야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피부에 닿는 건 숨을 죽이고 있는 시선들과 적막이었다.
"뭐하는 거야! 회복이 전혀 안 되고 있잖아!"
"아니, 아까부터 계속 쓰고 있는데…! 아마 이 새빨간 안개 탓인 것 같아, 회복 효과가 발동이 안되고 있어!"
그것은 처음 겪어보는 형태의 적들이었다. 놈들은 던전에 입장한 헌터들을 '적'이 아니라 '먹잇감'으로 보고 있었다. 끈질기게 소모를 강요하면서 말려죽이려는 교묘한 함정들. 새까만 밀림 사이에서 거미들의 새빨간 눈동자가 빛났다. 바닥 또한 제대로 체중을 실을 수조차 없는 끈적한 진흙이었다.
"젠장! 이 거미놈들 짜증나게 자꾸 실만 쏴대고! 정정당당히 앞에 나와서 승부하란 말이야! 무슨 이 따위 던전이...…!"
"조심해! 섣불리 앞으로 발을 내딛지 마! 개미지옥이다!"
"앞쪽 바닥에 뱀 떼야! 다가오는 소리도 안 들렸는데! 이빨에 맹독이 묻어있어! 해독제를 갖고 와서 망정이지……!"
그리고 그 와중에도 냉정을 지키고 있는 한 사내가 있었다.
"빙고, 라고 속편히 말할 수도 없겠군."
이제는 스카우트니 뭐니 하는 문제가 아니게 됐어. 오성화의 속검이 정확한 궤도로 날아들어오는 뱀들을 양단했다. 한쪽 손으론 회복 물약을 꿀렁꿀렁 마시고 있었다. 평소 오성화는 공격력과 속도에만 집중하고 방어력이나 체력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애초에 상대방의 공격을 안 맞으면 되는 것이니까. 하지만 이 던전은 달랐다.
‘체력 물약이 없었다면 독 데미지만으로 이미 죽었다.’
미리 알고 있지 않으면 웬만해서는 대응할 수 없는 함정들. 아무 지식 없이 첫 공략을 시도한 파티는 거의 전멸하게 되는 초견살(初見殺)의 던전. 이지수의 조언을 받아들여 물약과 해독제를 챙겨 오지 않았다면 불식 1팀은 몰살당했을 것이다.
".....목숨을 빚진 건가?"
어둠에 잠긴 밀림. 이만한 빛을 대체 어떻게 갚아야 할지 고민하며, 오성화는 준비해온 빛 속성 인챈트 스크롤을 찢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