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규격외 등급 해석사-5화 (5/176)

5화.  그냥 하는 말인데요(1)

'불식'은 대한민국 최고라고 말해도 좋은 거대 길드였다. 결코 녹슬지 않는다는 그 이름의 의미처럼, 불식은 대전쟁 시절부터 지금까지 한국 대표 길드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오성화는 그 불식에서 가장 기대받고 있는 후기지수이자,S급을 목전에 두고 있는 A+급의 헌터였다.

오성화는 트레이닝 룸에 가기 위해 복도를 걷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는 서류를 안고 있는 신입사원이 상사한테 잔소리를 듣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 사람은 여기 지나갈 때마다 혼나고 있네. 이제는 얼굴이 익숙해질 지경이었다.

"나연 씨. 이게 상부에 안건까지 올릴 일이야?"

"아니...…”그, 차별성이라는 게……"

"나연 씨! 나연 씨가 할 일은 그냥 시세 적당한 매물 올라오면 매입하고, 아니면 그냥 놔두는 거야. 어차피 비약은 우리 길드 자체 작업장에서 일정분량 확보하고 있다고. 뭐 우리 길드 인사부가 직접 찾아가서 독점 계약을 하자고 해? 그냥 물약 파는 놈한테? 불식이란 이름이 우스운 거야 뭐야!?"

상사가 얼굴이 새빨개진 채 소리치자, 여사원은 놀라서 흡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상사의 일갈 때문이 아니었다. 복도에서 뚜벅뚜벅 걸어온 오성화가 머리를 들이민 채 여사원이 껴안고 있는 서류의 내용을 훑어보고 있었다.

"어디어디. 저도 구경 좀 해봅시다.''

오성화가 끼어든 것은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뭐 대체 얼마나 업무를 개판쳐놓아야 이 자리를 지나갈 때마다 꾸중을 듣고 있을 수가 있는 건지 궁금했다. 그의 등장에 깜짝 놀란 상사는 연신 허리를 숙이며 웃는 얼굴로 아부를 떨었다.

"아, 오 부장님! 죄송합니다. 이거 못 보여드릴 꼴을…."

그런 상사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이, 오성화는 대답하지 않고 신입에게서 빼앗은 서류를 펄럭펄럭 넘겨갔다. 그리고 적혀있는 내용을 읽으면 읽을수록, 반쯤 장난기로 서류를 살펴보고 있던 오성화의 눈동자가 점점 진중해져갔다.

그 보고서에 쓰여있는 건 최근 올라오고 있는 어떤 매물에 대한 분석이었다. 이름은 '하급 각성의 비약'. '고블린 주술사의 비약'과 달리 스탯을 5%가 아니라 6% 올려준다. 하지만 매물이 워낙 적은 탓에 아무도 구매하지 않는 실정이었다.

비약을 구매하는 것은 보통 대규모 공격대고, 공격대 전원이 전투 내내 복용하기 위해선 상당한 수량의 비약이 필요했다. 그리고 '고블린 주술사의 비약'은 고블린 부락을 사냥하기만 하면 어느 정도 수량을 확보할 수 있어 범용성이 있었다.

'그에 반해, 이 비약은 매물을 다 합쳐봐야 스무 병.'

이른바 계륵이었다. 효과만을 따지자면 '하급 각성의 비약‘보다 비싸긴 해도 훨씬 우수한 포션들이 있었고, 공급량으로 따지자면 고블린 주술사의 비약을 따라가지 못한다. 하지만 이 보고서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매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루마다 꾸준히 다섯 개씩 매물이 올라오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매물을 올리고 있는 게 전부 단 한 명의 판매자인 것. 다른 매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드롭 아이템이 아니라는 뜻이고. 그걸 하루에 다섯 개씩 꾸준히 올리고 있다는 것은.

".....판매자가 직접 만들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오성화의 입에서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소모 아이템을 제조하는 부류의 생산계 클래스는 가장 희귀한 케이스였다. 거대 길드에서도 한 명을 보유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실제로 '발푸르기스의 밤'에는 '흑마녀'가 있고, '누각'에는 '무당'이 있지만, '불식'에는 그러한 인재가 한 명도 없었다.

빙고. 손가락을 튕긴 오성화가 휘유 휘파람을 불었다.

"신입 씨. 보너스 받을 준비 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성화는 성큼성큼 복도를 걸어나갔다. 그의 원래 목적지였던 트레이닝 룸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오성화의 발걸음이 향하고 있는 곳은 길드 본사 건물의 최상층. 이것은 길드장과 직접 면담을 해야 할 사안이었다.

***

지수의 방에서는 매캐한 연기가 모락모락 솟아 오르고 있었다.

"케핵! 아이고. 이거 진짜 할 짓이 못 되네?

지수가 찡그린 채 가마솥의 재료들을 휘휘 저었다. 이러고 있기를 벌써 30분 째였다. 지수는 자기 나름대로 참을성도 집중력도 뛰어난 편이라 자부하고 있었지만, 이런 단순한 육체노동은 싫어했다.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일 비약을 다섯 개씩 만들기로 했던 스스로의 다짐을 무효로 돌릴 수는 없었다.

사실 이런 단순한 육체노동도 돈만 잘 벌린다면야 웃는 얼굴로 할 수 있겠지만, 실은 별로 그렇지도 않다는 게 문제였다. 요 며칠 간 지수가 거래 사이트에 올린 '하급 각성의 비약'은 고작 두 병 밖에 팔리지 않았다. 아마 비약 같은 고급품을 개인 대 개인, 그것도 몇 병 단위로 찔끔찔끔 사는 것이 꺼려지는 듯했다.

역시 '포션 팔아서 백만장자 되기' 계획에는 약간의 수정이 필요할 듯 싶었다. 하지만 더 효과가 좋은 자신의 비약을 '고블린 주술사의 비약'보다 더 싼 가격에 올리기는 싫었다. 자존심 문제이기도 했고 너무 손해를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별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결국 문제는 수량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재고가 쌓이면 쌓일수록 한꺼번에 사고 싶다는 사람이 나타날 확률도 커질 것이다. 이러한 낙관적인 성격과 인내심은 지수의 강점이었다.

그리고 그런 낙관은 지수의 예상보다 빨리 맞아 떨어졌다.

"뭐야 이거."

거래 사이트를 확인하던 지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구매자가 나타났다. 그것도 모든 매물을 싹싹 긁어 일괄구매를 해준 사람이 있었다. 입금은 벌써 완료되어있었다. 자그마치 460만원이라는 목돈이 지수의 통장에 다이렉트로 꽂혔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이 다음에 올리실 매물도 소화하고 싶으니 이쪽에 먼저 연락해주시면 좋겠다는 메모까지.

'뭐지? 천사인가?'

지수는 자연스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수수께끼의 구매자는 택배도 귀찮게 부치실 필요 없으니 장소를 말씀해주시면 제 쪽에서 받으러 가겠다 말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너무 대우가 좋아서 오히려 사기치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 이미 돈은 제대로 입금되어 있었다.

지수는 얼떨떨한 채로 집 바로 앞에 있는 역 이름을 문자로 보냈다. 그러자 곧바로 '지금 가겠습니다' 하는 답장이 돌아왔다. 마치 문자가 오는 것을 미리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속도였다. 지수가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20분 안에 도착한다고 재차 답장이 왔다.

"무슨 수집가 같은 건가?"

뭔지는 몰라도 사준다는데 마다할 필요는 없었다. 지수는 지금까지 만든 비약들을 뽁뽁이로 둘둘 말아 박스 안에 포장했다. 그리고 추리닝 차림에 슬리퍼를 질질 끌고 역 앞까지 나가 구매자를 기다렸다.

이내 역 앞의 도로에서 멈춘 것은 한 대의 스포츠카였다. 광택이 쫙 빠진 빨간 색 쉘비 코브라. 양복을 차려입은 남자가 차 안에서 문을 열고 걸어나왔다.

"헌터매니아에서 비약 판매하신 분 맞으시죠?"

남자는 헷갈리는 일 없이 한 번에 지수의 앞으로 걸어왔다. 목소리는 더없이 사무적이고 정중했다. 지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물건의 상태를 세심히 확인했다. 그는 시판되는 유리병에 대충 담겨있는 비약을 보더니, 의미불명의 미소를 지으며 역시.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놀라운 것은 그 직후에 벌어진 일이었다. 지수는 당연히 남자가 박스를 타고 온 스포츠카에 싣고 갈 거라고 생각했지만, 남자는 한 손에 든 박스를 그대로 아무 것도 없는 공간에 쑥 집어넘었다. 그러자 박스는 허공에 삼켜지듯 사라져버렸다. 마치 마법 같은 광경이었다. 지수가 입술을 매만지며 말했다.

"아공간 포켓……?"

저건 최전선에서 뛰는 헌터들이나 사용하는 아이템인데. 설마 진짜 상위 헌터가 이거 하나 사겠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닐 테고. 혹시 엄청나게 돈이 많은 사람인가? 하기야 엄청나게 돈이 많으니까 내 비약도 일괄구매하고 그러는 거겠지.

지수는 혼자서 납득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물건의 수납을 끝낸 남자는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지수에게 건네주었다. 일부러 명함까지 건네주다니. 다음에 만들 약들도 이쪽에 팔아달라고 했던 것이 그냥 빈말이 아니라 정말인 듯 싶었다. 뭐하는 사람인지 궁금해서 지수가 명함을 살펴보았다.

- 불식 길드 제 1 팀장 오성화.

불식? 오성하? 분명히 어디서 들어봤던 이름인데. 지수가 뭐였더라 생각하며 눈썹을 찌푸렸다. 잔잔한 경악은 바닥에서부터 넘쳐흘렀다. 불식, 오성하.

대한민국 최고의 길드와 지금 전국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헌터. 멍하니 입을 벌린 지수가 고개를 들고, 남자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말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비즈니스 이야기 말입니다. 양복을 입은 남자가 상쾌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것은 티비에서 매일 보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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