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규격외 등급 해석사-3화 (3/176)

3화.  이게 왜 읽히냐 (2)

“질러버렸다....."

방에 돌아온 지수의 안색은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방바닥에는 열 권이 넘는 책들이 탑처럼 쌓여 있었다. 전부 센터의 기념품 가게에서 사온 것이었다. 다 합쳐서 이백 만원이 조금 넘어갔다. 이걸로 저금해온 통장잔고는 완전히 굿바이였다.

내가 무슨 미친 짓을 한 거지? 지수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하지만 지수 내면의 독서가로서의 면모는 이 책들은 충분히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고 있엇다. 어찌 됐든 던전 안에서 발견된 정체불명의 고서들인 것이다. 그것도 아마 이 세상에서 지수 한 명 밖에 읽을 수 없는 특별한 책.

쌓인 책들 하나하나가 두꺼운 하드커버인 탓에 들고 오는 것만 해도 고역이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서서 읽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예의에 어긋나는 걸 떠나서 그랬다가는 아무도 못 읽는 책을 넘기면서 혼자 이해된다는 척 정독하고 있는 중2병 미친놈 취급이나 받을 것이다.

구매한 열다섯 권은 지수가 면밀히 살펴보고 골라온 것이었다. 고른 기준은 명확했다. 의미없는 글덩이가 아니라 '책‘이라고 할 만한 내용이 적혀 있을 것. 그리고 또 하나의 기준은 책의 등급이었다. 지수가 책의 탑을 힐끗 바라보았다.

<주문의 이해와 마나 감응의 요령 (일반)>

<예바우드 식 마도 명상 훈련법 (고급)>

<마력 구조물의 입문과 실전에서의 응용 (고급)〉

<마법사라면 알아둬야 할 100가지 요령들 (고급)>

<모험가를 위한 기초 포션 제조법 (고급)>

<로즈레이드 룬마술 개론 (희귀)>

<해주의 비술 (전설)>

이처럼 해석 스킬로 책을 살펴보면 옆에 등급이 함께 떠올랐다. 던전에서 나온 다른 아이템들과 똑같다면 아마 '일반-고급-희귀-영웅-전설-신화'의 6 단계일 것이다. 지수는 고급 이상의 등급이 표시되어 있는 책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모조리 사왔다. 왠지 안 사면 손해 같았기 때문이다.

'전설 급이면 이거 엄청난 거 아닌가?'

신화 등급의 아이템은 역사상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으니, 사실상 던전의 아이템 등급은 전설이 최고였다. 거대 길드의 수장들 중에서도 전설 급 장비를 가지고 있는 건 극소수였다. 아이템 등급이 전설쯤 되면 용의 비늘이나 요정왕의 눈물 같은 단순한 재료나 소모품이어도 몇천 만원을 호가했다.

하지만 뭐, 막 각성한 햇병아리인 지수가 이 책, 제가 보니까 전설 등급이래요! 하고 떠들어봤자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읽기 전에는 뭐라고 평가할 수 없다. 지수는 책들의 탑 맨 위에 놓여있는 일반 등급의 책을 집어들었다.

<주문의 이해와 마력 감응의 요령>. 의자에 앉은 지수가 책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서점에서 직접 골라 사온 책을 처음으로 펴볼 때의 설렘은 언제나 각별했다. 특히 지금까지 읽어본 적이 없는 새로운 내용과 접할 때에는 더더욱.

책의 문면에는 해괴한 모양의 상형문자가 빽빽이 적혀있었지만, 해석 스킬 덕분에 지수의 눈에는 그냥 쭉쭉 읽혔다. 마법서의 내용은 어떤 주문을 가르쳐준다기보단, 마나와 교감하는 법부터 시작해서 주문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구성하느냐 하는 요령을 알려주는 입문자용 이론서 비슷한 것이었다.

속독으로 획획 읽어제꼈지만 놓친 내용은 없었다. 마법서를 쓴 사람이 설명하는 데에 재능이 있는 건지 아니면 해석 스킬 덕분인 건지, 내용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도 쏙쏙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하고 명료했다. 마법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지만 책의 풀이를 읽다 보니 과연 그렇구나 하고 무릎을 치게 되는 부분이 있었다. 그렇게 한 권을 완독한 순간.

".......어?"

지수가 책을 덮고 만족스러운 한숨을 쉬자마자, 마법서는 돌연 빛의 가루로 변해 흩날렸다. 그리고 그 빛가루들은 지수의 몸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지수는 깜짝 놀라서 신음을 흘렸다. 단순한 이해를 넘어선 체화. 한 순간에 마법서의 내용들이 지수의 머릿속 깊숙이 각인되고 있는 것을 느꼈다.

[알브란 어 마법서를 최초로 완벽히 독해했습니다. 지력이 10 상승합니다. 스킬 효율이 5% 상승합니다.]

옆에서 알림창이 튀어나왔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기묘한 감각이 머리를 휘저었다.

의미불명이었던 고서(古書)들은 일종의 소모품이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고대문자를 직접 해석해 완독하는 것으로 사용되는 일회용 아이템.

지수는 방금 읽은 마법서의 모든 부분들을 지금 당장에라도 생생히 떠올릴 수 있었다. 이 자리에서 누군가에게 하나하나 풀이하며 가르쳐줄 수도 있을 정도였다. 전에 느껴본 적 없었던 지적 충족감이 지수의 온몸을 휘감았다. 지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바닥에 쌓여있는 책들의 탑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저것들도."

그것은 진수성찬을 눈앞에 둔 굶주린 짐승의 표정이었다.

더 읽고 싶다. 더 이해하고 싶다. 더 먹어치우고 싶다. 난생 처음 경험해본 '완벽한 독서’의 경험은 지수의 이성을 날려버리기 충분했다. 학구열에 미쳐버린 독서광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다음 책을 집어들었다. 말 그대로 폭독이었다.

[달리아 어 마법서를 최초로 완벽히 독해했습니다. 지력이 10 상승합니다. 스킬 효율이 5% 상승합니다.]

[베릴 어 마법서를 최초로 완벽히 독해했습니다. 지력이 8 상승합니다. 스킬 효율이 4% 상승합니다.]

[옛 아르바의 마법서를 최초로 완벽히 독해했습니다. 지력이 15 상승합니다. 스킬 효율이 8% 상승합니다.]

"하하, 하하하하하하…!"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느샌가 지수는 환하게 웃으며 독서에 몰입하고 있었다. 현명한 사람들이 이걸 어떻게 하면 설명할 수 있을까 궁리하고 또 궁리해서 써낸 소중한 문장을 한 입에 꿀꺽 삼키고서, 과연 그렇구나 감탄하며 자신의 양식으로 삼는다. 이 얼마나 황홀한 체험인가.

['마법의 이해'가 2레벨이 되었습니다. 지력이 5% 상승합니다. 모든 주문들의 캐스팅 속도가 10% 상승합니다.]

['마법의 이해'가 3레벨이 되었습니다. 지력이 7% 상승합니다. 모든 주문들의 캐스팅 속도가 12% 상승합니다.]

밤이 가고 새벽이 와도 배고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완벽한 몰입 상태에 들어갔다. 문장의 속뜻이 저절로 간파되고, 하나를 배우면 열 가지 생각들이 솟아났다. 문자를 읽어내리는 눈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렇게 책읽기에 미쳐본 게 대체 얼마만인지, 뇌에 마약을 꽂아넣은 기분이었다.

['연금술의 소양'이 2레벨이 돠었습니다. 인내와 손재주가 3% 상승합니다. 1레벨까지의 시약을 만들 수 있습니다.]

['연금술의 소양'과 '마법의 이해'가 상호작용하여 서로의 스킬 효율을 상승시킵니다. 마법 재료를 다룰 수 있습니다.]

바로 옆에서 상태창이 계속해서 울리고 있는 것도 모르고, 완전히 집중한 지수는 쌓여있는 책들을 탐독했다. 방바닥에 높이 쌓아올려져 있던 책의 탑이 점점 낮아져갔다. 열다섯 권은 열 권으로, 열 권은 다섯 권으로, 다섯 권은 한 권으로.

결국 지수가 책상에 머리를 박고 기절하듯 잠들어버린 것은, 기념품 가게에서 사온 장서 열다섯 권을 몽땅 통째로 정독해 머릿속에 흡수한 다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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