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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222화 (완결) (222/222)

222화

전쟁이 끝났다.

지금 이 시간대에 대륙은 당분간 평화를 맞이하게 될 거다.

카잔 황제의 사념도 소멸했고, 라크레시아도 죽었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대륙에 마수를 뻗치던 주인공, 디아 제니스.

녀석도 이젠 없다.

나단 공작 녀석은 프란츠 공성전 도중 눈 먼 화살에 맞아 죽었다.

어찌 보면 신이 내린 천벌이라고 해야 할까.

‘주신이란 놈이 그럴 놈은 아니지만.’

녀석은 그저 이 세상을 굴리는 거대한 톱니바퀴 같은 놈이다.

천벌이니 뭐니 그런 걸 할 놈은 아니었다.

“후.”

모든 상황이 정리되고, 난 다시금 임페라 공작령으로 되돌아왔다.

간만에 생긴 여유에 몸이 노곤노곤 해졌다.

일레느가 만들어 준 블루핀 파르페.

처음엔 이걸 어떻게 파나 싶었는데, 지금은 지역 특산물이 될 정도였다.

수제 콜라도 마실까 싶었지만 파르페로도 이미 충분히 달다.

포옥.

파르페를 한 큰 술 떠 입안에 넣었다.

달달한 크림이 입안을 감쌌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 바깥 풍경을 감상했다.

따사로운 햇살이 기분 좋게 내려앉았다.

‘이게 사람 사는 거지.’

바깥에선 프리아나가 검술 훈련에 매진 중이었다.

검술 랭크 7에 올랐는데도 여전한 놈이다.

어쩌면 소설에서보다 더 높은 경지, 검술 랭크 8에 오를지도 몰랐다.

‘아직 젊으니까.’

이제 막 서른을 넘긴 나이일 텐데.

어디 적당한 짝이라도 만나면 좋으련만, 검술 말곤 전혀 관심 없는 놈이라 그게 가능할지 싶다.

“맛있나.”

“그럼. 너도 한번 먹어 볼래?”

“…싫다.”

크로드는 옆에 소파에 앉아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런 그의 옆엔 영겁의 기사단장, 기사왕 리온 카이세리우스가 앉아 있었다.

“난 하나 땡기는군. 만들어 줄 수 있나?”

“네.”

이슬린이 짧게 대답하곤 자리를 비웠다.

이글렌은 지금 바쁠 테니 아마 직접 만들어 올 거다.

‘이슬린도 제법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이글렌이 만든 게 더 맛있긴하지.’

하지만 굳이 얘길 꺼내진 않았다.

내 거 먹기도 바쁘니까.

“으음. 좋구만.”

영겁의 기사단과 시시덕거리며 노닥거리는 연합의 귀족이라.

아마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지금도 연합에서 이를 알았다간 난리가 나기야 하겠지만…….

‘뭐 어때. 꼬우면 맞짱 뜨든가.’

사실 지금 연합에 나랑 싸워서 이길 놈은 없다.

탈리스…는 모르겠다만, 프레이야랑 수십 년 만의 재회에 노닥거리기 바쁠 테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슬린이 파르페 두 개를 만들어 왔다.

하나는 카이세리우스에게 주고, 다른 하나는 말 없이 크로드의 앞에 놨다.

“…….”

크로드는 그런 이슬린을 한 번 쏘아보곤 팔짱을 꼈다.

포옥.

크로드가 그러건 말건, 카이세리우스는 파르페를 한술 떠 입안에 가져다 넣었다.

“으음……! 맛있군!”

카이세리우스가 눈썹을 치켜뜨며 감탄하자 크로드가 마지못해 숟가락을 들었다.

“…….”

그렇게 모두가 평화로운 여유를 즐겼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지?”

조용히 몇 숟갈 퍼먹던 크로드가 물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몰라서 묻는 건가? 이제 연합을 어떻게…….”

“으음. 일단 이것만 마저 먹고.”

“…….”

불만 가득한 눈빛으로 날 노려보는 크로드.

하지만 나라고 전혀 생각이 없는 건 아니다.

앞으로 연합은 어떻게 할지. 또 영겁의 기사단은 어떻게 할지.

지금 이 상태론 영겁의 기사단과 대립은 불가피했다.

어찌됐건 녀석들은 카잔 제국에 속해 있던 녀석들이니까.

“…일단은 생각해 둔 게 있긴 해.”

“뭐지.”

“카잔… 왕국을 다시 만들어야지.”

“뭐, 뭐라고?”

좀처럼 동요하지 않던 크로드가 놀라 되물었다.

카잔을 다시 재건한다라.

지금껏 카잔 황제 때문에 이렇게 피똥을 싸 놓고 재건한다니.

미친 소리로 들리는게 당연했다.

하지만, 카잔 제국이 아니라 왕국이다.

“그리고 연합에 가입시키는 거지. 다른 왕국들을 집어삼키려던 제국이 아니라 왕국으로.”

“그게 가능할 것 같나? 연합의 반대는 어쩔 생각이지? 게다가 지금 황제의 핏줄은…….”

요란 떠는 크로드에게 대답 대신 창 밖을 가리켰다.

거기선 프리아나와 대련이 한창인 디아가 서 있었다.

“…무슨 의미지? 설마 저 기사 녀석을…….”

“그래. 저기 옆에 쬐끄만한 녀석 보이지?”

“…뭐라?”

지금의 디아 제니스는 크로드에겐 별 감흥도 없는 녀석이었다.

당연히 프리아나를 가리킨 줄로만 알았던 크로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 녀석. 카잔 황제의 아들이야.”

“…뭐?”

크로드는 잘 들어 놓곤 제 귀를 의심했다.

“그래서 그쪽의 봉인이 풀릴 수 있었던 거고.”

“호오.”

카이세리우스는 신기한 듯 입을 오므렸다.

처음엔 당황한 크로드도 봉인을 풀었단 얘기에 입을 다물었다.

디아의 피를 석상에 뿌린 건 다름 아닌 크로드 본인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런 거였나.”

“그런 거지.”

“…….”

크로드는 머리가 복잡해진 듯 생각에 잠겼다.

그러는 한편, 앞으로 있을 계획을 세우기 위해 미간을 좁혔다.

“라스하겐의 도움도 있으면 금방 가능해질 거야. 당분간은 아이소테르의 지배를 받는 방식으로 하면 연합에서도 뭐라 하진 않을 테고.”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그야…….”

난 창 밖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평화로우면 좋은 거니까.”

“…….”

“나쁘지 않은 제안이군.”

망설이는 크로드를 대신해 카이세리우스가 대답했다.

그가 이렇게까지 나오자, 크로드도 군말 없이 따랐다.

아마 외교적으론 큰 문제로 번지지 않을 거다.

지금의 디아도 베로니아 가문과 협력하고 있는 상황이기도 했고.

라크레시아의 정체가 주인공 녀석이란걸 알기 전, 난 디아한테 명령을 하나 했었다.

그건 다름 아닌 베로니아 가문에게 후원을 받아 오란 내용이었다.

고맙게도 훌륭하게 성공해 주긴 했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녀석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 보지 못했다.

‘그건 나중에 풀기로 하고.’

지금 당장 디아를 카잔 왕국의 왕으로 세우는 건 어려울 거다.

하지만 영겁의 기사단, 베로니아 가문의 후원, 거기에 아이소테르의 지원까지 모인다면.

언젠간 녀석이 다시금 카잔 왕국의 왕위에 오르는 것도 가능했다.

“일단 가서 인사나 나눠 봐. 새로 섬기게 될 주인이신데.”

“…그래.”

“후후. 그래야지.”

카이세리우스와 크로드는 파르페를 다 먹곤 밖으로 향했다.

저 멀리 연무장에서 둘은 디아와 뭐라뭐라 떠들기 시작했다.

자세한 내막은 멀어서 잘 안들렸지만, 차차 풀리게 될 거다.

‘그건 그렇고.’

“…….”

모두가 방에서 나가자, 난 품 안에 쟁여 뒀던 자그마한 돌멩이를 꺼냈다.

최후의 봉인석.

아마 일 년간은 이게 유일한 봉인석일 거다.

그 후론 자가 수복 기능이 있는 다른 봉인석들이 생겨나겠지만…….

문제는 이 봉인석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다.

주인공 녀석 같은 괴물이 또 나오진 않을 거다.

하지만 금제를 풀겠다며 이 봉인석을 노리는 놈들은 또 나올 터.

그렇다는 건…….

‘내가 보관해야 하나?’

솔직히 그건 좀 그렇다.

전성기 시절의 힘을 불어넣어 주는 녀석이긴 해도.

그만큼 주변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었으니까.

“흠…….”

똑똑.

한창 고민에 빠져 있는데.

“손님 오셨습니다.”

“…손님?”

딱히 지금 찾아올 손님은 없을 텐데.

“…일단 들어오시라 해.”

“네. 공작님.”

얼마 지나지 않아, 손님이 들어섰다.

낯익은 얼굴이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이긴 한데…….

“오랜만입니다. 이안 임페라 공작님.”

“…아.”

간신히 기억해 냈다.

황금 은행 습격 후 우리 가문에 걸려 있던 빚은 변제해 준 장로.

제4장로 메르헨이었다.

“그간 무탈하셨는지요.”

“아. 예. 덕분에…….”

난 그때 빚 1만 골드를 무기한 무이자 대출 방식으로 처리했다.

설마 지금 그걸 달라고 온 건가?

지금이야 1만 골드 쯤 충분히 변제할 수 있지만…….

갑자기 생돈 나가려니 좀 아깝…….

파앗.

그때, 별안간 메르헨의 몸이 빛나기 시작했다.

이내 빛이 사그라들고 나자, 그의 얼굴이 전혀 다른 이의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어?”

그리고 그 얼굴은.

나도 잘 아는 이의 얼굴이었다.

“오, 오베론?”

“…그래.”

오베론이 갑자기 왜?

그리고 분명 메르헨의 얼굴이었는데…….

설마 둘이 같은……?

“잠시 다른 모습을 보인 건, 나름의 사정이 있어서였다네.”

그리곤 오베론은 그간 내가 몰랐던 이야기들을 시작했다.

오베론의 유산 ‘완벽한 돌멩이’를 메르헨에게 팔고 난 후.

오베론은 그의 의식 일부를 메르헨에게 주입시켰다.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팔아 치운 그의 유산.

이는 또 다른 랭크 9의 등장을 야기할 수 있었다.

소설에서 또 다른 랭크 9가 등장하지 않았던 건, 어디까지나 오베론이 계속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막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거였나.”

“…그렇다네.”

오베론은 주인공 녀석에게 ‘조화’에 당하며 죽었다.

하지만 메르헨의 몸에 남겨 두었던 그의 의식.

덕분에 불완전하게나마 살아남아 이곳에 온 거였다.

“…그래서. 당신 같은 대마법사가 내게 온 이유가 뭐지?”

“그거야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나.”

“…….”

난 말 없이 최후의 봉인석을 쳐다봤다.

“강제로 빼앗진 않겠네. 아니, 못한다고 해야지. 지금의 나로선 자네를 이길 수 없을 테니까.”

“…그럼 이걸 가져가서 뭘 하겠단 거지? 다시 예전처럼 강항 대마법사라도 되겠단 건가?”

“그럴 리가.”

오베론은 물끄러미 창 밖을 바라봤다.

디아와 영겁의 기사단 녀석들이 시끌시끌하게 떠들고 있긴 했지만.

그것만 빼면 완벽했다.

평화로움 그 자체인 대지.

“…….”

난 오베론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비록 녀석과 제대로 말을 섞어 보는 건 처음이었지만.

녀석의 마음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자식처럼 아끼던 디아 제니스.

그런 그를 버리면서까지 평화를 선택했던 녀석이다.

“…받아라.”

난 오베론에게 최후의 봉인석을 건넸다.

충만했던 마나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걸 빼고도 이미 난 충분히 강했다.

‘랭크는 안 뜨지만.’

“…괜찮갰나?”

“뭐 어때. 나처럼 바쁜 몸보단 할 일 없는 너가 지키는 게 낫겠지.”

“…고맙군. 이해해 줘서.”

‘이해라니. 이건 어디까지나 짐을 떠넘기는 거야. 내가 갖고 있기엔 너무 위험한 녀석이니까.“

“…….”

“만에 하나 잘못됐다간 찾아가서 줘 패 버릴 테니까. 간수 잘하라고. 난 상대가 누구던 진심을 다해서 패니까.”

“…후후.”

“됐으면 빨리 가 버려. 마음 바뀌기 전에.”

“…그래. 평생 간직하겠다.”

“…….”

평생이라.

녀석이라면 충분히 그럴 거다.

죽지도 않을 녀석이 평생 동안 최후의 봉인석을 지킨다.

봉인석의 수호자로 더할 나위 없이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

오베론은 고갤 꾸벅 숙이곤 바람처럼 사라졌다.

“후.”

오베론이 떠나자.

앓던 이가 빠진 느낌이다.

이제 남은 건 평화로운 여생을 즐기는 것뿐이다.

평화롭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

여왕의 반려라는 건 그런 자리니까.

“대공이라…….”

처음 이 세상에 왔을 때까지만 해도 막막했다.

쥐뿔도 없는 거지 백작가의 망나니 공자.

그랬던 놈이 아이소테르의 유일한 공작이라니.

“…에이먼.”

집무실 벽에 걸린 에이먼의 초상화를 바라봤다.

지금쯤 새로운 몸을 찾아 환생했을 거다.

그게 누가 됐을진 모르겠지만, 에이먼을 위해서라도 다시 태어날 아이를 위해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품 안에 웨이 포인트 파편을 집어 들었다.

간만에 감상에 빠져서 그런가?

이글렌이 보고 싶어졌다.

“…행복하라구.”

짧게 초상화를 향해 묵념하곤.

웨이 포인트 파편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던 인생은 끝났다.

이젠 새로운 생명들이 더 이상 고통 받지 않도록.

평화로운 세상을 유지하는 것.

그게 앞으로 남은 내 인생이었다.

* * *

“여긴…….”

짭짤한 바닷물이 입 안을 적셨다.

분명 그는 죽었다.

삶의 의지를 잃었으니까.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는 그렇게 죽는다.

디아 제니스.

라크레시아의 제국을 재건하겠다던 야욕.

이를 막은 대륙의 영웅.

동시에 시간대를 되돌려 가면서까지 온 대륙을 휘저은 최악의 악인.

요란스런 인생을 살아온 그였지만, 지금 그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사랑하는 이도 잃고, 동료들마저 모두 잃었으니까.

어디에도 기댈 곳 없는 무적자 신세.

그게 지금의 디아 제니스였다.

“…….”

여긴 어딜까.

설마 그간의 죗값을 치루기 위해 지옥에라도 떨어진 걸까?

하지만 주변의 풍경은 지옥이라 하기엔 다소 부족했다.

파도가 넘실거리는 모래 사장.

하늘은 맑고 불어오는 바람은 산뜻했다.

저 멀리선 낯익은 성곽이 눈에 들어왔다.

위셀란에 위치한 자그마한 성곽이었다.

“…위셀란?”

그의 시간대에서 위셀란은 반쯤 초토화됐다.

하지만 외곽에 동떨어진 해안 영지에까지 전쟁의 화마가 미치진 못했다.

여러모로 시끌시끌하긴 해도 그나마 평화로운 영지인 듯했다.

촤르륵!

아직 상황 파악이 채 끝나지도 않았던 그때.

물가에서 뭔가가 나타났다.

사람의 형태를 띈 생명체였다.

“…어인?”

이는 다름 아닌 심해에 서식하는 어인이었다.

“…인간!”

어인은 디아를 보자마자 밝은 미소를 내보였다.

“인간이다! 꺄핫!”

“…….”

“반가워!”

그리곤 디아를 향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인들을 학살하려 했던 터라, 디아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어디까지나 카잔 황제의 사념이 섞여 든 탓이었지만, 이는 디아의 의식도 또렷이 있는 상태에서 벌어진 일이었으니까.

“흐응… 표정이 왜 그래? 어디 아파?”

어인은 그런 상황에서도 디아를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봤다.

녀석은 그저 뭍으로 나온 지금이 마냥 즐거운 듯했다.

그러면서 거리낌 없이 디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읏…….”

자라마냥 목을 움츠리는 디아.

하지만 왠지 모르게 어인의 손을 피하고 싶지 않았다.

평범한 어인 마냥 검은 자위에 누런 동공을 가진 두 눈.

거리감이 느껴지는 게 당연한 눈빛이었지만, 디아는 왜인지 그녀의 눈빛이 익숙했다.

디아는 어인의 손길을 피하지 않은 채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흐응… 뜨겁긴 해도 아픈 것 같진 않은데.”

어인은 디아의 뺨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반쯤 나온 어인의 하반신이 물고기 지느러미마냥 펄떡거렸다.

덕분에 물이 찰방거리며 디아의 얼굴을 적셨다.

디아가 눈살을 찌푸린 채 이를 쳐다보자, 어인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 이건 헤엄칠 때만 쓰는 거야. 평상시엔 너희들처럼 다리로 걸어다 닌다구.”

“…….”

이 어인은 뭘까.

왜인지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는 녀석이다.

“네 녀석은…….”

“아차! 내 소개가 늦었네! 지상인들은 처음 만나면 자기소개부터 한다 그러던데.”

“…….”

“내 이름은 알리샤야. 나이는… 지상인으로 치면 한 살인가?”

“알리샤.”

디아는 알리샤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도 아는 이름이었다.

우로스에서 아에곤이 특별히도 애지중지하던 알이다.

디아가 라크레시아를 뒤쫓을 때 막 부화하려던 녀석이었는데.

그런 녀석이 한 살이라는 건?

“…원래 시간대로 되돌아온 건가.”

디아는 피식하고 웃었다.

허탈함에 내뱉은 웃음이었지만, 알리샤는 그런 그의 웃음에 미소를 띄었다.

“어! 웃었네! 이제 안 아픈 거야?”

“…그럴지도.”

“하핫! 다행이야!”

밝고 쾌활한 알리샤의 모습에 디아는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마치 처음 타르옌을 만났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다.

그러면서 한켠으론, 눈앞의 알리샤에게서 타르옌이 겹쳐 보였다.

단순히 그리움에 헛된 망상을 하는 게 아니었다.

인간의 경지를 초월한 그에겐 남들은 못 보는 무언가를 볼 수 있었으니까.

알리샤의 눈빛 너머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기운.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영혼은 마치 타르옌의 것과 똑 닮아 있었다.

“…그런 건가.”

타르옌은 이미 죽었다.

그리고 죽은 이는 다시 살릴 수 없다.

사흘이란 시간 동안 죽은 이의 영혼은 새로운 육체를 찾아 떠나가 버리니까.

“그래서 넌? 네 이름은 뭐야?”

“난…….”

디아는 잠시 망설였다.

지금 그의 이름은 뭘까.

카잔 황제의 피를 이어받은 진짜 라크레시아 카잔일까.

아니면 고아 출신의 기사이자 대륙의 영웅, 디아 제니스일까.

“…모르겠다.”

“흐응… 그래? 진짜로 어디 많이 아픈가 보네…….”

알리샤는 디아를 걱정스레 바라봤다.

“그럼 내가 하나 지어 줄까?”

“…뭐?”

“이름이 없으면 심심하잖아! 머리가 하얀색이니까… 하양이 어때?”

“…흐흐.”

“또 웃었네? 마음에 드나 봐?”

“그럴지도.”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녀석이라 그런지 네이밍 센스가 별로였다.

하지만 뭐가 됐다 한들 예전 이름보단 나을 것 같았다.

“그럼 이제부터 넌 하양이야!”

“…그래.”

“이렇게 된 것도 인연인데. 기억 찾는 것 좀 도와줄까?”

“으음…….”

“어디 기억나는 것들부터 이야기해 봐! 그럼 차차 생각이 날지도 모르니까!”

“기억나는 거라.”

“이왕이면 자세하게 설명해 줬으면 좋겠어! 지상인들 이야긴 나도 많이 못 들어 봤거든.”

사실 알리샤는 그게 더 궁금했다.

과연 지상인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지.

때문에 우로스의 왕, 아에곤 몰래 뭍까지 올라온 거다.

아마 지금쯤 우로스는 난리가 났을테지만, 아무렴 어떻겠나.

이제 대륙엔 평화가 찾아왔는데.

“해 줄 거지?”

디아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조금 길어지겠군.”

“흐흐! 나야 좋지!”

알리샤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뭍으로 걸어 나왔다.

잔잔한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평화로운 세상.

그 가운데서 디아는 천천히, 알리샤를 위해 한 남자의 서사시를 풀어 나갔다.

알리샤는 그런 그의 서사시를 들으며 방실거렸다.

조용히 이야길 풀어 나가는 디아.

그의 입가엔 지난 수년간 볼 수 없었던 푸근한 미소가 조심스레 드리우고 있었다.

<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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