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파캉!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녀석의 가슴을 반쯤 파고든 황혼.
하지만 그 상태에서 그만 검이 부러지고 말았다.
“…젠장.”
부족했던 건가?
황급히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녀석의 검이 더 빨랐다.
콰아앗!
뒷걸음치려는 날 향해 거대한 검기가 파도처럼 덮쳐 들어왔다.
“크아아악……!”
동시에 끔찍한 격통이 몰려들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결국 내 몸뚱인 그대로 볼썽 사납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두 동강 나 버린 황혼.
거기에 걸레짝이 되어 버린 몸.
난 바닥에 쓰러진 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크헉……!”
이대로 질 순 없었다.
서둘러 만신창이가 된 몸에 회복 마법을 퍼부었다.
온몸에 난 상처 하나하나가 모두 심각한 수준이었다.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출혈량.
아마 최후의 봉인석이 없었더라면 몇 번이고 죽었어도 이상할 것 없는 상처였다.
‘빨리……! 일어서야……!’
부들거리는 몸을 가까스로 일으켜 세우려던 그때.
저벅. 저벅.
주인공 녀석이 날 향해 다가왔다.
가슴엔 부러진 검 파편이 박힌 채, 상처에선 피가 끊임없이 솟구쳐 나오고 있었다.
“…….”
“이 자식이……!”
일어서려는 내게 녀석이 검을 집어 던졌다.
콰직!
“끄악!”
녀석이 집어 던진 검은 그대로 내 복부를 뚫고 땅에 박혔다.
곤충 표본마냥 꼼짝도 못하게 된 난 가만히 녀석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놈은 내 품 안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곤 품속에 넣어 둔 자그마한 돌, 최후의 봉인석을 꺼내 들었다.
이렇게 끝인 건가?
결국 놈을 막지 못하는 건가?
“X팔……!”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검을 뽑아내려 안간힘 썼다.
하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일까.
좀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만.”
디아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최후의 봉인석을 쥔 손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콰드득!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한 최후의 봉인석.
저게 파괴되면 끝이다.
악마들의 봉인이 풀리고, 대륙의 모든 이들이 놈들의 손에 장난감으로 전락하고 만다.
“젠…장……!”
콰득!
결국 봉인석이 파괴되려는 그때.
누군가 디아의 팔에 손을 얹었다.
[이제… 그만하세요.]
“…….”
‘저건…….’
디아의 팔을 붙잡은 건 다름 아닌 타르옌이었다.
이미 죽어 디아의 권속으로 되살린 타르옌.
그런 그녀가 내뱉은 말은 주인을 거역하는 말이었다.
권속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말.
하지만 그간 녀석의 곁에서 주인을 바라본 탓인지 자아가 생기고 만 거다.
“흐읍…….”
난 복부를 꿰뚫린 채로 조용히 둘을 지켜봤다.
부디 저게 먹히길.
“…공작님!”
“응?”
그러던 그때.
별안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다름 아닌 이 소설의 주인공.
정확히는 아직 미쳐 버리지 않은 시점의 주인공.
풋내기 애송이에 불과한 디아 제니스였다.
그런 그의 곁엔 아직 살아 있는 타르옌이 서 있었다.
파아앗!
순식간에 달려온 둘은 나와 주인공 녀석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오러 소드와 마창을 소환한 둘은 주인공 녀석을 향해 자세를 잡았다.
“화합의 섬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길래 와 봤는데, 당신이 왜 여기 있어?”
타르옌이 퉁명스런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복부에 꽂힌 검을 뽑아내려는 듯 안간힘 쓰고 있었다.
“이익……! 이건 또 왜 안 빠져……!”
“자, 잠깐 그거 그렇게 막 뽑으면…….”
디아는 주인공 녀석을 향해 황혼을 뽑아 들었다.
“이 자식들이 감히 우리 공작님을…….”
그런 디아는 눈앞의 적을 보곤 고갤 갸웃했다.
“…어?”
“무슨 일이야?”
검을 뽑아내려던 타르옌이 디아의 이상한 반응을 눈치채곤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타르옌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게 눈앞의 둘은 디아와 타르옌을 똑 닮아 있었으니까.
“너 혹시 숨겨 눈 누님이라도 있었냐?”
“그러는 넌?”
전투 자셀 취한 채 주인공 녀석을 노려보는 둘.
녀석은 공허한 눈빛으로 둘을 내려다봤다.
[…여긴 우리들의 자리가 아니에요.]
“…….”
[그러니 이젠… 우리들이 있을 곳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
[부디… 제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시길.]
그 말을 끝으로 벤시 타르옌은 가슴팍에 손끝을 찔러 넣었다.
미처 말리기도 전에 벌어진 터라,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심장에서 마핵을 뽑아내 버린 뒤였다.
파스스…….
마핵을 잃은 벤시는 그렇게 먼지가 되며 흩어졌다.
…텅!
새하얀 마핵 하나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런 건가.”
“그러긴 뭐가 그래! 당장 저리 안 꺼져!”
타르옌은 금방이라도 마탄을 쏘아 버릴 기세로 주인공 녀석에게 소리쳤다.
그 모습에 주인공 녀석이 입꼬리가 살짝 움직였다.
“…그래야지.”
“…응?”
파아앗!
주인공은 만들어진 블랭크다.
다만 내가 알던 대로 오베론이 만든게 아닌, 카잔 황제가 만든 블랭크.
때문에 그런 녀석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삶의 의지를 잃어버리는 것.
주인공 녀석의 몸이 바스라지기 시작했다.
손끝부터 천천히 먼지가 되어 흩날리기 시작하더니.
“어엇?”
이내 내 뱃가죽에 박혀 있던 검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덕분에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지만, 타르옌이 지혈을 해 준 덕에 금세 멎어 들어갔다.
“…….”
난 사라져 가는 주인공 녀석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가는 거냐.”
“…그래.”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녀석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널 이 세계에 끌어들인 건 미안하다.”
“알면 됐다.”
“…….”
파스슷……!
녀석은 마지막 사과를 끝으로 한 톨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졌다.
챙그랑!
주인공 녀석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부러진 황혼이 나뒹굴었다.
파스스…….
이제 본연의 목적을 다 했단 걸 아는걸까.
부러진 황혼도 제 주인을 따라 바스라지기 시작했다.
“…잘 가라.”
* * *
“허억……! 허억……!”
탈리스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간 너무 오랜 기간 쉬었던 걸까.
무투 랭크 8이라는 경지였지만, 연이은 전투를 감당할 체력이 문제였다.
게다가 공성전 초기에 갑작스레 등장한 정체 불명의 기사들.
하나하나가 기사단장, 혹은 그 이상의 수준이었다.
“...어디서 굴러먹던 놈들이지?”
[…….]
탈리스가 쏘아붙이듯 물었지만, 녀석들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아무런 말 없이 자신을 몰아붙인 기사들.
그런 녀석들을 탈리스가 모를 리가 없었다.
게다가 녀석들 중 셋이 몰아붙이는 합은 한두번 맞춰 본 수준이 아니었다.
나머지 셋은 연합의 기사단장들과 싸우는 터라 아슬아슬하게 균형이 유지되곤 있었지만.
어느 한쪽이라도 무너지기 시작하면 끝이다.
탈리스는 곁눈질로 다른 이들의 상황을 살폈다.
“크하핫! 그래! 그거야!”
와이트 킹과 함께 성벽을 뛰어내린 피스트의 주인 페이라.
그는 적과의 혼전에서도 희열을 느끼는 것마냥 날뛰었다.
다른 이들도 바쁜 건 마찬가지였다.
기대를 걸 수 있는 건 단 하나.
이안 임페라.
녀석이 빨리 상황을 마무리 짓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카앙!
“크읏……!”
거대한 대검이 탈리스를 향해 내려쳤다.
동시에 오러를 머금은 화살이 빗발처럼 쏟아졌다.
카가각!
가까스로 막았나 싶었던 그때, 다시금 마탄이 쏟아졌다.
체력이 다 한 터라, 탈리스는 그만 복부에 일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크아앗……!”
여유를 줄 생각은 없었는지, 탈리스의 앞에 대검을 든 기사가 우뚝 섰다.
‘이대로 끝인가…….’
죽기 전 단 한 번이라도 프레이야를 보고 싶었건만.
아쉽게도 안 될 것 같았다.
“…….”
무투왕 탈리스.
이제 그가 왕관을 내려 놓을 때였다.
‘먼저 가겠소. 프레이야.’
탈리스는 차분히 눈을 감았다.
이만하면 괜찮은 죽음 아닐까.
왕국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전사한다니.
“…응?”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이미 대검을 내려쳤어야 할 녀석이 움직이질 않고 있었다.
파스스…….
“어엇……?”
힘겹게 고개를 들자 대검을 든 기사 녀석의 몸이 바스라지고 있었다.
녀석과 같이 등장한 정체 불명의 기사들 모두 그랬다.
떠들썩하던 전장이 갑작스런 이변에 조용해졌다.
“이게 무슨……?”
영문도 모른 채 두리번거리던 탈리스.
그런 그의 눈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비춰졌다.
눈보라가 그치고 맑게 갠 하늘.
그 가운데 그토록 그리던 그녀가 힘찬 날갯짓을 펄럭이고 있었다.
[캬르르…….]
전장을 가득 메우는 블루 드래곤의 포효.
탈리스의 눈망울이 촉촉히 젖어 들어갔다.
“아아……!”
* * *
“이것 참 미안하게 됐습니다.”
[그건 내가 할 말이지.]
주인공 녀석에게 당한 상처를 대충 지혈하고, 난 곧바로 프란츠로 되돌아왔다.
혹시 주인공 녀석이 잠깐 숨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권속의 문양이 깔끔하게 지워진 프레이야를 보자마자 생각을 고쳐 먹었다.
이제 주인공 녀석은 없다.
카잔 황제의 사념도 말끔히 사라졌다.
이 세상을 난장판으로 만들던 놈들은 더 이상 없었다.
하지만 아직 전쟁은 한창이었다.
이를 막기 위해선 확실한 한 방이 필요했다.
그리고 난 일말의 고민도 없이 프레이야에게 부탁했다.
잠시만 날 태우고 날아 달라고.
따지고보면 대전쟁 이후 처음으로 제정신을 차린 프레이야였지만, 고맙게도 금새 상황을 파악하곤 무리 없이 내 부탁을 들어줬다.
남은 건 이 쓸모없는 전쟁을 끝내는 것뿐.
“후읍.”
깊게 호흡을 들이마셨다.
아직 주인공 녀석한테 당한 상처가 채 아물지 않았다.
덕분에 몸이 찢어질 듯이 아팠지만, 아무렴 어떠랴. 이제 다 끝인데.
“전쟁은 끝났다!”
전장 전역에 울려 퍼지는 힘찬 함성.
그리곤 마법으로 사람 머리 같은 걸 만들어 냈다.
어차피 멀어서 잘 안 보일 거다.
“라크레시아는 죽었다! 모두 무의미한 저항은 멈추고 투항하라!”
“어엇…….”
지상에선 프로스트 랜드의 병사들이 주춤거리는게 보였다.
게다가 주인공 녀석이 보낸 데스 나이트들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챙그랑!
북방인 하나가 들고 있던 병장구를 떨궜다.
“프레이야 님……!”
그가 프란츠의 사람인지, 프로스트 랜드의 사람인지는 정확치 않았다.
하지만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걸 보면, 북부의 사람이란 건 확실했다.
“빙룡이시여……!”
“아아……! 프레이야 님이……!”
그를 시작으로 모든 북부인들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프레이야가 북부인들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새삼스레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대단한 분이셨군요.”
[그런 말 하지 말게. 그래 봐야 난 결국 수많은 피를 흘리게 한 장본인이니.]
“으음. 그건 뭐 어쩔 수 없는 거죠.”
[…그런가.]
프레이야의 씁쓸한 전언이 들려왔다.
[저건…….]
프레이야는 전장에 무릎 꿇고 앉은 탈리스를 발견했다.
후우웅…….
곧바로 탈리스의 앞으로 날라간 프레이야.
탈리스는 두 눈이 휘둥그레져 가지곤 프레이야를 바라봤다.
그런 그의 두 눈에선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프레이야……!”
[후후. 못 본 새 많이 늙었구려.]
“크흑…….”
프레이야의 몸이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이내 유르를 똑 닮은 성숙한 여인이 탈리스 앞에 섰다.
눈처럼 하얀 머릿결에 푸른 드레스를 입은 프레이야.
인간형인 그녀의 모습에선 말로 표현하기 힘든 고풍스런 느낌이 풀풀 풍겼다.
그녀의 앞에 선 탈리스.
대전쟁 이래로 벌써 이십 년도 더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프레이야 없이 줄곧 프란츠를 지키던 무투왕 탈리스.
그의 얼굴에 자잘한 주름살은 그가 얼마나 힘든 세월을 보냈는지 짐작케 했다.
프레이야는 그런 그를 향해 나지막히 말했다.
[그동안… 혼자 있게 둬서 미안하오.]
프레이야는 눈물을 흘리는 탈리스를 꼭 끌어안았다.
둘은 그렇게 한참을 서로 꼭 끌어안았다.
이제 싸움은 끝났다.
죽은 이들의 이야기는 끝났다.
남은 건.
산 사람들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