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외부와 완벽히 차단된 자그마한 방.
주인공의 이야기가 끝난 곳.
동료마저 모두 잃은 주인공은 황제의 사념을 주입 당했다.
덕분에 지금 주인공 녀석은 더 이상 디아 제니스가 아니다.
디아와 황제의 사념이 뒤엉킨 또 다른 무언가.
그리고 지금.
눈앞에 녀석이 서 있다.
하얀 백발에 조금은 큰 듯한 키.
평생 검을 휘둘러온 몸이라 다부진 체격이었지만, 녀석의 등은 상당히 초라해 보였다.
“…디아 제니스.”
“…….”
녀석은 대답 없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런 녀석의 앞엔 뭔가가 박살 난 채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마치 해골처럼 생긴 파편에 금세 녀석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카잔 황제의 사념이 담겨 있던 최후의 유물.
“해치운 건가. 황제를.”
주인공 녀석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후련한 걸까, 아님 후회하는 걸까.
지금껏 카잔 황제의 계략을 막기 위해 발버둥 쳤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짓을 꾸민 게 결국 녀석의 아버지였다.
모든 걸 막았다 생각한 순간, 아버지의 손에 모든 걸 잃었다.
이제 와서 최후의 유물을 파괴했어도, 죽은 녀석의 동료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이 세상의 동료들은 주인공 녀석의 동료가 아니다.
그저 다른 시간 선에서 같은 얼굴과 다른 삶을 살아가는 전혀 다른 사람일 뿐.
“…후련한가.
“…그럴지도.”
녀석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직 이 세상에 황제의 사념은 남아 있다.
주인공 녀석의 몸 안에.
“…이제라도 그만…….”
“넌 나를 막아야 한다.”
주인공 녀석은 작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그러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니까.”
“…뭐?”
그러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라고?
그게 무슨 소리일까.
파앗.
의문에 답을 얻기도 전에.
주인공 녀석의 주변에 서 있던 데스 나이트들이 사라졌다.
“…무슨 짓을 한 거지?”
“…녀석들은 모두 전사들이었다.”
“…….”
“전사들에겐 그에 걸맞는 무덤이 있는 법이지. 이런 어두침침한 골방이 아니라.”
전장?
그렇다는 건…….
“프란츠로 보낸 거냐?”
지금 프란츠에선 나단 공작 병력들의 공성전이 한창이다.
탈리스를 비롯한 다른 이들이 합류했으니 크게 문제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방금 그 녀석들이 참전했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하나하나가 주인공 녀석의 마나를 주입 받은 데스 나이트니까.
게다가 녀석들의 본판은 다름 아닌 이 이야기의 조연.
아무리 무투왕이라 해도 녀석들을 모두 상대하는 건 어려울지도 몰랐다.
“…하나가 남았군.”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 할까.
아직 데스 나이트 한 구가 남아 있었다.
정확히는 데스 나이트는 아니었다.
눈앞의 주인공마냥 새하얀 은발을 길게 늘어뜨린 여인.
타르옌 베로니아였다.
내가 알던 타르옌과 똑같은 얼굴이긴 했지만, 뭔가 풍겨 오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
타르옌은 제 주인을 향해 슬픈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녀석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내게 손가락을 가리켰다.
“내놔라.”
“…….”
녀석의 손끝엔, 품 안에 넣어 둔 최후의 봉인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최후의 봉인석을 손에 넣고, 이걸로 히테라 주신과 거래를 하려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주신은 그런 걸 가능케 할 존재가 아니다.
해 줄 녀석도 아니고.
결국 녀석의 바람대로 해 준다면, 금제만 풀어질 뿐이다.
다른 차원에 봉인된 악마들만 풀려날 테고.
탈리스급 되는 강자가 아니라면 모두 악마들의 손에 죽을 거다.
당장 약화된 악마 몇 마리에 그토록 고전하던 게 인간들이다.
온전한 힘을 가진 악마들을 풀어놓았다간 다 끝이다.
“그건 안 되겠는데.”
“…그렇담 어쩔 수 없지.”
짧게 대답한 주인공 녀석 주위로 마나가 소용돌이쳤다.
지금껏 그 누구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어마어마한 양의 마나였다.
꿀꺽!
무기 한 점 들지 않은 채였지만, 느껴지는 위압감에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가능한 너와는 싸우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야.”
“…….”
“뭐랄까… 팬이었거든. 온갖 생고생에 똥밭을 굴러도 꿋꿋이 살아 돌아오는 너가.”
“…….”
“…하지만 이제 와서 대화로 풀 순 없겠지?”
“…….”
이제 와서 대화를 시도해 봤자 먹힐 리도 없다.
게다가 녀석은 휘하의 데스 나이트들을 프란츠로 보냈다.
한시라도 빨리 녀석을 막아야 한다.
괜히 시간 낭비를 했다간 데스 나이트들에게 연합군이 궤멸되고 말 거다.
난 허리춤에 메어 둔 검을 뽑아 들었다.
소설에서도 오랜 세월 디아와 함께했던 검.
에고 소드 황혼.
이미 마핵을 잃어 평범한 검에 불과한 검.
하지만 검에 마나를 불어넣자 회빛깔의 검선이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황혼이 가지고 있던 특유의 색은 아니었다.
검선에 화염 속성을 부여해 붉게 타오르는 것뿐이다.
주인공 녀석을 상대로 속성 하나 부여한다고 뭐가 달라지겠냐만.
이건 일종의 의식이다.
제 주인을 막지 못하고 폭주하도록 내버려둔 검.
이미 생명을 다해 버린 녀석이지만, 죽은 녀석을 위로해 주고 싶었다.
“그럼. 간다.”
가볍게 오른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단단한 대리석 바닥이 마치 부드러운 슬라임 가죽처럼 느껴졌다.
물컹거리는 첫 걸음이 떼지고, 몸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뒤이어 대리석 바닥이 박살나며 조용히 비명 질렀다.
…콰직.
어느새 눈앞에 녀석이 서 있다.
붉게 타오르는 검이 녀석의 가슴팍을 향해 쇄도했다.
그대로 녀석의 심장을 꿰뚫으려는 순간, 그때까지도 녀석의 눈빛은 공허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의 마음처럼 텅 빈 눈.
마침내 검이 살갗을 베고 파고들려는 찰나.
카가각!
동시에 단단한 갑주에 걸린 것마냥 굉음이 터져 나왔다.
녀석의 살갗과 검 사이에서 붉은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럼 그렇지.’
이 정도는 예상했다.
녀석은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무슨 짓을 해도 죽지 않던 괴물 중에 괴물.
가장 강했던 녀석이다.
파앙!
곧바로 녀석의 가슴팍을 찌르던 검을 거뒀다.
그리곤 녀석의 옆구릴 향해 있는 힘껏 검을 올려쳤다.
콰드득!
묵직한 감촉이 검을 타고 손끝에 맴돌았다.
하지만 역시나 놈의 거죽을 뚫기엔 부족했다.
“이 정도인가.”
“아니!”
놈의 옆구리에 검을 밀어 넣은 채로, 양 다리에 힘을 불어넣었다.
“……!”
그러자 여지껏 미동도 않던 녀석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붉은 황혼의 검선을 타고 녀석의 핏물이 배어 나왔다.
뒤늦게 놈이 검을 붙잡았다.
녀석의 단단한 손에 붙들린 검은 그대로 우뚝 멈춰 섰다.
하지만 내 목적은 이대로 녀석을 베는 게 아니다.
이 좁아터진 골방에서 나가는 거지.
“끄아압!”
있는 힘껏 양팔에 힘을 불어넣곤 검을 올려쳤다.
그러자 녀석의 몸뚱이가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콰아앙!
천장을 그대로 들이받은 녀석은 그대로 골방을 무너뜨리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타앗!
난 녀석이 날아가며 만든 구멍을 향해 뛰어올랐다.
한참을 날아오르자, 비로소 밖이 보였다.
잔잔한 호수에 둘러싸인 자그마한 섬.
난 이내 최후의 유물이 잠들어 있던 장소가 어딘지 알아냈다.
소설에선 그저 공간 도약을 통해 왔다 갔다 한 곳이라 정확히 지도상 어디에 위치하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주변을 보자마자 알아차렸다.
화합의 섬.
수만 년 전 생겨난 현생 인류.
마치 그들에게 서로 화합하며 살라고 말하는 듯.
대륙 중앙에 위치해 오랫동안 인간들의 화합 장소로 열리던 땅.
최후의 유물은 바로 그 화합의 섬 지하에 숨겨져 있었다.
“악취미로구만.”
원래부터 최후의 유물이 화합의 섬 아래에 있던 건지, 아니면 카잔 황제가 여기로 옮겨다 놓은 건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덕에.
화합의 섬은 주인공 녀석과의 마지막 싸움터가 됐다.
“…이안 임페라.”
화합의 섬 한가운데 널브러져 있던 디아.
녀석은 먼질 훌훌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이진수.”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구만.”
녀석은 지구에서 불리던 내 이름을 읊조렸다.
놀랄 건 없었다.
날 이 세상으로 부를 만한 놈은 이제 녀석 말곤 없으니까.
오베론이 그런 짓을 했을 리는 없고.
그렇다는 건.
지구를 묵사발 낸 것도 녀석일 가능성이 컸다.
“…내가 미운가?”
디아는 서글픈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난 피식 웃으며 녀석에게 대답했다.
“…그게 이제 와서 뭐가 중요하겠나.”
“…그렇군.”
뭐가 됐건 그런 건 이제 중요치 않다.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선 녀석을 막아야 한다는 사실만 남았을 뿐.
콰드득……!
디아의 손 주위로 검은 기운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내 형태를 갖춘 건 한 자루의 검이었다.
마치 검게 물든 황혼처럼 생긴 검.
이제야 제대로 싸울 맘이 난 듯 녀석은 검을 든 채 자셀 잡았다.
“막아 봐라.”
“흐흐. 그래!”
콰득!
놈의 몸뚱이 앞으로 쏜살같이 내달렸다.
어찌나 빠른지 지면을 박살 내는 소리가 뒤따라 들려올 정도였다.
…카앙!
하지만 나도 나름 지구에서 최후까지 살아남은 놈이다.
아무리 주인공 녀석이라 해도 만만히 볼 상대는 아니었다.
상단을 노리고 들어온 검격.
이대로 막았다가 빈틈을 노릴까 했지만, 본능적으로 녀석의 다음 공격이 예상됐다.
소설에서 놈이 매번 하던 공격.
몸을 회전시켜 상단, 중단, 하단에 이르는 삼연격.
지금 이 시간대의 디아도 자주 쓰는 검술이다.
하지만 그거야 풋내기 애송이 기사가 쓰는 검격이고.
지금 눈앞의 검격은 달랐다.
카카캉!
“으읏……!”
마치 세 자루의 검이 동시에 쏟아지는 것마냥 재빠른 공격.
게다가 이는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카캉!
다시금 이어진 두 번의 찌르기.
거기에 중간중간 권격까지 섞였다.
난 이를 악물고 녀석의 공격을 막았다.
과연 주인공답달까.
공격 하나하나가 매섭고 살의가 가득했다.
녀석은 기사왕 카이세리온까지 홀로 처치한 놈이다.
검에 있어선 절정에 달한 수준이라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순간.
뭔가가 떠올랐다.
“…….”
그런 거였나.
하나하나가 매서운 공격이긴 했지만, 아슬아슬하게 막을 수 있었다.
더 나아가, 마치 녀석의 다음 공격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찰나에 가까운 순간이었지만, 녀석의 다음 공격이 먼저 보이고, 그 뒤를 이어 맹렬한 공세가 쏟아졌다.
녀석의 계속된 공격을 막으면서, 녀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날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
난 지금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녀석의 공격을 잘 알고 있었다.
단순한 검술뿐만 아니라, 사소한 공격 패턴과 버릇까지 하나하나 빼놓지 않고 말이다.
이 모든 건. 녀석이 내게 남긴 소설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
콰콰콰……!
난 조용히 녀석의 공격을 계속해서 막아 냈다.
삼연격과 이연격, 거기에 찌르기까지 부드럽기 연계되는 우아한 검선.
이는 끊어지지 않고 흐르는 물줄기마냥 계속해서 이어졌다.
하지만 이 끝엔, 녀석의 검선이 멎는 부분이 분명 존재했다.
기사왕 카이세리우스를 처치했던 최후의 일격.
부드럽게 이어지는 검격 끝에, 녀석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서 일순간 검기를 터뜨렸다.
그리고 그 순간.
모르는 이라면 가만히 당했겠지만, 난 안다.
찰나에 가까운 순간 자그마한 틈이 생긴다는 걸.
“…….”
파앙!
녀석이 강하게 검을 후려쳤다.
그리곤 예상했던 것처럼, 놈의 오른쪽 발이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아주 작은 틈이었지만, 난 이를 놓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붉게 타오르는 황혼의 검선이 그대로 녀석의 심장을 향해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