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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218화 (218/222)

218화

엘 아지프.

수만 년 전, 대륙 남쪽 끝에 위치해 있던 거대한 사막 왕국.

그 왕국의 주인이었던 대마법사.

끝없는 지식을 향한 갈구 끝에 스스로 랭크를 초월한 자.

하지만 그 끝은 생각보다 달콤하지 않았다.

랭크를 초월한 채 악마가 된 그는 다른 악마들처럼 단절된 차원에 내동댕이쳐졌으니까.

랭크 시스템이란 그런 거다.

이탈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 인간들을 철저히 억압하고, 만에 하나 이를 초월한 자가 발생하면 악마들의 차원에 격리시켜 버리는 시스템.

히테라 주신이 만든 이탈자로부터 고통 받지 않는 세상.

최후의 봉인석이 파괴되면 단절되어 있던 차원이 붕괴된다.

수만년간 봉인되어 있던 악마들은 자유로이 대륙을 활보하게 될 테고.

그 잘난 기사단장들마저 본연의 힘을 발휘한 악마들에겐 갓난아이 수준이나 다름없다.

눈앞의 악마들은 그런 존재다.

아직 불완전하게나마 남아 있는 봉인석 탓에 제 힘을 발휘하진 못했지만.

우우웅……!

엘 아지프의 두 뿔 사이에서 거대한 검은 마탄이 모여들었다.

한눈에 봐도 위험천만하게 생긴 마탄.

이는 그대로 날 향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돌진했다.

“…흥!”

무색의 오러를 품은 황혼.

이젠 마핵을 잃어 평범한 철검에 불과한 존재였지만, 지금의 난 그런 패널티 따윈 가볍게 씹어 먹을 경지였다.

최후의 봉인석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마나.

이는 새로운 단전 하날 얻은 것마냥 내 몸에 끊임없이 마나를 불어넣어 줬다.

…서걱!

무색의 짙은 오러 소드는 그대로 녀석의 마탄을 양단했다.

콰아아앙!

둘로 나뉜 마탄은 길을 잃고 바닥에 처박히며 굉음을 터뜨렸다.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성벽은 가루가 되어 먼지처럼 흩날렸다.

‘가능하면 소멸시켜야겠군.’

나타난 악마들 중 유일한 한 쌍의 뿔을 가진 녀석답게, 부서진 마탄임에도 파괴력이 엄청났다.

난 녀석을 도발할 겸 한마디 했다.

“이게 단가?”

[키히힛.]

내 말을 알아들은 건지, 아니면 그냥 웃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예 효과가 없는 건 아니었나 보다.

바아앙!

엘 아지프의 주위로 무수히 많은 마탄이 생겨났다.

하나하나가 모두 방금 양단한 마탄과 비슷한 양의 마나가 느껴졌다.

“…흠.”

괜히 까불었나.

하지만 괜찮다.

이보다 더한 놈도 쓰러뜨려 본 적 있으니까.

억지로 봉인을 뚫고 강림한 악마 녀석들쯤이야 내가 상대했던 놈들과는 비교도 안 된다.

그리고 하나 더.

난 이놈들보다 더 강한 놈을 쓰러뜨리러 가야 한다.

단순히 이놈만 처치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와라.”

[키힛!]

내 말에 응답이라도 하듯, 놈의 마탄이 빗발쳤다.

뒤에선 다른 녀석들이 한창 싸우고 있었기에. 궤적을 바꾸려 지면을 힘차게 박차 올랐다.

쐐애액……!

“응?”

하지만 이번엔 유도 기능이라도 달린 건지, 공중으로 솟구쳐 올라온 날 향해 궤적을 틀었다.

“후후. 그래. 이 정도는 되야 악마지.”

허공에 솟아오른 상태에서 양발에 마나를 집중시켰다.

그리곤 대기를 지면 삼아 힘껏 발을 굴렀다.

사실상 마나를 발바닥으로 쏟아붓는 거나 다름없어서 잘 쓰지 않는 기술이다.

하지만 과거 단전과 랭크 시스템만 있었을 때완 달리 계속해서 솟구쳐 오르는 마나.

아낄 필요 따윈 없었다.

쐐애액!

허공에서 궤적을 틀자 이를 노리고 마탄이 계속해서 날아왔다.

난 그런 마탄을 유도하며 허공을 유유히 활보했다.

“…….”

수십 개의 마탄이 닿기까지 고작 손바닥 몇 뼘 차이.

난 그 거리를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며 계속해서 도망쳤다.

“…지금이다!”

마침내 마탄이 나와 격돌하려는 순간.

지면을 향해 방향을 급선회했다.

벼락처럼 지면을 향해 추락하는 꼴이었지만, 마탄은 그러지 못했다.

궤적을 틀려는 순간, 허공을 활보하던 또 다른 존재.

프레이야와 충돌해 버렸으니까.

콰콰콰콰!

[캬르르르!]

수십 개의 마탄이 그대로 프레이야의 몸뚱이와 격돌했다.

검은 연기를 자욱이 내뿜던 프레이야는 날개에 구멍이 송송 뚫린 채 하늘에서 비틀거렸다.

콰앙!

그사이, 난 안전하게 지면에 착지하는 데 성공했다.

“후후.”

이쯤되면 녀석도 뭔가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키히힛.]

“…쯧.”

하지만 엘 아지프는 오히려 재밌다는 듯 여전히 킬킬대기만 할 뿐이었다.

“언제까지 웃나 보자고.”

[키힛.]

오러 소드를 녀석을 향해 들어 올렸다.

놈의 가슴팍과 연결된 날카로운 검선.

이대로 지면을 박차 놈의 심장을 꿰뚫는다.

[키히힛.]

“…….”

하지만 녀석은 그런 날 향해 검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마치 뭔갈 가르키듯 내민 손가락에선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리고 이는 어김 없이 적중했다.

…꾸웅.

“…쿨럭!”

갑자기 배 속에서 끔찍한 격통이 밀려 들어왔다.

헛구역질 하듯 내뱉은 기침에선 검붉은 피가 끈적하게 흘러나왔다.

“이건……?”

갑작스레 느껴진 격통에 정신이 아찔해졌지만, 금세 원인을 파악했다.

그리곤 재빨리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콰앙!

그러자 방금까지 내가 서 있던 자리에 검은 마탄이 하나 나타나더니 그 자리에서 폭발했다.

“이 자식이…….”

무슨 저주라도 내린 게 아닐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간단한 개짓거리였다.

놈은 주변 어디에든 마탄을 소환할 수 있다.

그래서 한 번 더 마탄을 소환한 거다.

다른 곳도 아니고 정확히 내 배 속에다가.

콰앙! 쾅!

그 이후로도 마탄은 계속해서 생성됐다가 폭발하길 반복했다.

모두 정확히 내가 서 있었던 자리였다.

파아앗.

이를 재빠르게 피하는 한편, 걸레짝이 된 배 속에다 회복 마법을 퍼부었다.

최후의 봉인석답게 금방금방 치유되긴 했지만, 저런 걸 한 대 더 맞고 싶진 않았다.

콰앙!

그러면서 중간 중간 녀석의 뿔 사이에서 마탄이 쏘아졌다.

한시라도 가만히 있었다간 내장이 너덜너덜해질 테고, 그러면서도 놈이 쏘아 대는 마탄도 신경 써야 했다.

‘골치 아프군.’

그러던 그때.

빗나간 마탄 한 발이 유르와 투린, 프리아나를 향해 날아갔다.

저들이 눈치껏 피해 줬으면 했지만, 이미 두 마리의 악마와 상대 중이라 그럴 여유는 없어 보였다.

“칫.”

하는 수 없이 난 녀석들을 향해 힘껏 내달렸다.

…콰앙!

“…크악!”

거대한 마탄 한 발이 가슴팍에 명중했다.

덕분에 흉갑이 한순간에 날아가고, 가슴팍을 뚫고 붉은 살점이 드러났다.

“고, 공작님!”

“이안 공작!”

싸움에 한창이던 다른 녀석들이 큰 소리로 외쳤다.

잠시 정신이 아찔해졌지만, 녀석들의 외침 덕에 다시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치이익…….

붉은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상처 위로 회복 마법을 퍼부었다.

금세 새로운 살점이 너덜너덜해진 가슴팍 위로 자라났다.

“…난 괜찮으니 신경 끄라고.”

“으으…….”

[키힛!]

그 모습을 보며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는 엘 아지프.

아까 프레이야에게 마탄을 적중시킨 걸 앙갚음 하려는 게 아닐까 싶다.

상당히 골치 아프다.

녀석을 상대하는 와중에도 다른 이들이 휘말리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한다니.

그러다 문득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다.

문제란 건 모름지기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수록 안 풀리기 마련이다.

“…그래.”

이럴 때일수록 단순 무식한 방법이 최고다.

그리고 지금의 난, 충분히 그럴 만큼 마나가 차고 넘쳤다.

“…후우.”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곤, 다시금 엘 아지프를 향해 걸어갔다.

뭔가 재밋는걸 기대라도 한건지, 놈은 가만히 날 보고만 있었다.

“…그랬지.”

잠시 잊고 있었다.

이 몸뚱이에 익숙해져서 그런걸까.

난 예전부터 무식한 방법으로 많이 싸웠다.

그도 그럴 게 발할라 시스템 최후, 최강의 사나이였으니까.

고작해야 악마 놈들에게 꿀릴 상대가 아니다.

“…….”

찹.

난 조용히 바닥에 손을 얹었다.

그리곤 발할라 시스템에서도 몇 번 사용했던 스킬을 시전했다.

딱히 제대로 된 이름은 없다.

그저 내가 대충 지어 준 이름만 하나 있는 스킬이다.

이런 무식한 스킬을 쓸 수 있는 건 나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간단하고 직관적인 이름 그 자체다.

“상자 가두기였지.”

끔찍한 네이밍 센스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순간, 내 손을 시작으로 주변에 어마어마한 양의 마나가 터져 나왔다.

[…키힛?]

드디어 뭔가 심상찮음을 깨달았는지, 엘 아지프가 고갤 갸웃했다.

여전히 입가엔 미소가 드리워 있었지만, 놈은 더 이상 가만히 날 기다리지 않고 검지 손가락을 다시금 들어 올렸다.

하지만 난 움직이지 않은 채 계속해서 스킬을 시전했다.

주변을 향해 터져 나온 마나.

이는 일정한 거리까지 뻗어 나가자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올랐다.

이내 네모 반듯한 성냥갑 크기로 자라난 마나의 벽.

…콰앙!

순간, 미간을 향해 미세한 살기가 느껴졌다.

스킬 시전 중이라 크게 피하진 않았고 고갤 살짝 까딱였다.

…주륵!

덕분에 이마가 찢어지며 붉은 피가 왈칵 쏟아졌다.

피가 얼굴 전부를 뒤덮을 때쯤, ‘상자 가두기’의 시전이 끝났다.

반투명한 막에 위해 차단된 안팎.

덕분에 바깥과 안쪽은 빛만 통과할 뿐, 단 한점의 소리도 새어 들어오지 못했다.

고막이 살짝 먹먹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때?”

이 자그마한 상자 안엔 이제 나와 녀석 말곤 없다.

[…키히힛!]

엘 아지프는 상자 가두기를 보곤 조소를 흘렸다.

기대완 달리 별 볼 일 없는 스킬로 느껴진 모양이다.

하지만 이건 그냥 상자가 아니다.

외부와 다른 차원의 존재마냥 완벽하게 차단시키는 스킬.

마신 아쉬타르와 싸울 때도 썼던 스킬이다.

최후에 녀석과 나만이 남았을 때.

남은 모든 마나를 쥐어 짜내 만들어 낸 벽.

이안 임페라의 몸뚱이론 상상도 못할 양의 마나가 필요한 스킬이다.

하지만 최후의 봉인석 덕분에 마나 걱정은 없었다.

방금까지 뽑아낸 어마어마한 양의 마나가 벌써 채워지기 시작했으니까.

그리고 이 벽은.

쿠구구……!

[키힛…….]

실컷 비웃던 엘 아지프의 웃음이 잦아들었다.

그리고 주변을 가로막던 상자가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다.

이제 여기서 나갈 수 있는 건.

오직 하나뿐이다.

파아앗!

난 다시금 오러 소드를 뽑아냈다.

[키힛!]

놈은 그런 날 향해 마탄을 퍼부었다.

이제 거칠 것도 없겠다, 난 매섭게 놈의 마탄을 베어 넘었다.

무수한 마탄이 쪼개지고 갈라지며 사방으로 튀었다.

검은 연기를 남기며 폭발한 마탄.

하지만 주변에 형성된 벽엔 미세한 금조차 나지 않았다.

[키히힛!]

엘 아지프는 그런 와중에도 재밌다는 듯 킬킬댔다.

…꾸웅!

동시에 배 속에서 마탄이 터지는 걸 느꼈다.

“끄흡…!”

끔찍한 격통과 함께 배 속에서 무언가 끓어올랐다.

“…퉷!”

그냥 가래침 한 번 뱉듯 검붉은 피를 게워 냈다.

그리곤 녀석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갔다.

펄럭!

[키히힛!]

거리가 가까워오자 날개를 펼쳐 도망치기 시작한 엘 아지프.

…쿵!

[키…힛……?]

하지만 여기에 도망칠 공간 따윈 없다.

녀석은 천장에 만들어진 벽에 머릴 처박곤 비틀댔다.

아주 잠깐 균형을 잃은 수준에 불과했지만, 놈과 거릴 좁히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네크로노미콘의 주인이자, 원래 줄거리대로였다면 이 몸뚱일 권속으로 부렸을 악마.

난 녀석을 향해 오러 소드를 휘둘렀다.

정확히 가슴팍을 기준으로 양단하는 곧은 검선.

무색의 오러 소드는 그대로 놈의 검은 신체와 격돌했다.

콰가가가각!

무시무시한 경도를 자랑하는 악마의 몸답게 오러 소드와의 격돌에 굉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미 전성기 시절에 준하는 경지에 오른 이 몸.

악마의 몸 하나 못 벨 정도로 애송이는 아니었다.

콰가갓!

놈의 검은 몸뚱이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무색의 오러 소드는 그런 균열을 타고 놈의 몸을 꿰뚫기 시작했다.

[키히힛!]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광기 어린 웃음을 잃지 않는 엘 아지프.

난 그런 녀석을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잘 가라.”

…서걱!

이내 깔끔한 소리와 함께.

무색의 오러 소드가 놈의 몸뚱일 깔끔하게 양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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