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시작이군.”
탈리스는 저 멀리서 들려오는 북소리에 작게 중얼거렸다.
“전하! 프로스트 랜드에서 놈들이……!”
프란츠의 대신들이 탈리스를 향해 소리쳤다.
그는 한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다 대신들에게 답했다.
“…군을 모두 그쪽으로 보내라.”
“…네? 그럼 왕성은…….”
“왕성은 내게 맡겨라. 그리고…….”
탈리스는 날 흘긋 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왕성을 탈환하는 데 누가 필요할지 의견을 묻는 거였다.
“차라리 잘됐군요. 왕성을 점거한 게 악마들이라면, 군세를 이끌고 들어가는 것보단 소수로 상대하는 게 좋을 테니까요.”
“소수라면…….”
“제가 아바마마를 돕겠습니다!”
“저두요!”
유르와 투린이 손을 들었다.
난 그런 둘을 보곤 싱긋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저도 돕죠.”
상대는 악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이들 중 제일 센 놈들이 나서는 게 맞았다.
나도 손을 들며 나서자, 프리아나가 큰 소리로 외쳤다.
“저도 공작님을 돕겠습니다!”
“좋아.”
그렇게 탈리스까지 합쳐 총 다섯의 인원이 차출됐다.
“내 도움은 필요 없나.”
근처에 서서 이야길 옅듣던 빈트하겐 칼로스.
“넌 적갑 기사단을 지휘해야 하지 않겠어?”
“…난 기사단장이 아니다만.”
빈트하겐은 아직도 그게 신경 쓰이는 듯 입을 앙다물었다.
하지만 지금 적갑 기사단을 지휘할 인물은 그 말곤 없었다.
실제로도 적갑 기사단원 대부분이 아직까지도 그의 말이면 껌뻑 죽었고.
“푸흐흐. 그럼 뭐. 다른 연합 기사단장 손에 지휘를 맡기든가.”
“…….”
“아무튼. 더 이상 차출은 반대야. 나중에 부르면 오라고.”
“…그래.”
그렇게 왕성 탈환에 투입될 인원과 프로스트 랜드를 상대할 군세가 둘로 나뉘었다.
탈리스는 꾸역꾸역 따라온 피스트의 국왕, 페이라에게 말했다.
“피스트의 주인이여. 내 이번 군세의 지휘권을 넘겨드리겠으니. 잘 부탁하오.”
“후후. 맡겨만 두라고.”
페이라는 비릿한 미소를 짓곤 군세를 이끌고 성벽으로 향했다.
과거 정신 나간 짓을 한 놈이긴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급하니까.
왕성을 탈환하고 일이 잘 마무리만 된다면, 곧바로 군세에 합류하면 그만이다.
“그럼… 가세.”
탈리스는 부서진 성벽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왕성 탈환에 나선 일행은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잘그락.
탈리스의 권격 한 방에 박살 난 프란츠의 왕성.
부서진 건물 잔해가 발에 밟혔다.
쿵……! 쿵……!
그렇게 왕성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자,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이 굉음이 터져 나오는 건, 다름 아닌 깊은 땅속이었다.
“이게 무슨……?”
프리아나는 주윌 두리번거리며 검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탈리스를 비롯한 프란츠 왕가의 사람들은 이내 그 정체를 눈치챘다.
“…오는군.”
탈리스는 짧게 말하며 어스 브레이커를 낀 주먹을 꽉 쥐었다.
…쩌저적!
왕성 한복판 바닥에 거대한 균열이 일었다.
…콰앙!
그리고 이를 뚫고 거대한 뭔가가 하늘로 치솟았다.
부서진 건물 잔해가 눈보라와 섞여 흩뿌려졌다.
한 쌍의 날개를 펼친 채 하늘을 헤엄치는 블루 드래곤.
거대한 몸체와 누런 안광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백은 가히 최강의 생물이라 불리울 만했다.
하얀 눈보라 속에서 유유히 활공하는 모습에 잠시 모두가 넋을 잃고 바라봤다.
저게 바로 대전쟁 이후로 줄곧 잠들어 있던 북부인들의 신.
블루 드래곤 프레이야.
[캬르르……!]
고막을 찢는 듯한 괴성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프레이야…….”
탈리스는 그런 프레이야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어머…니……?”
수십 년 만에 다시 만나는 가족이었지만, 눈물겨운 상봉 같은 건 없었다.
어려서부터 알의 형태로만 마주했던 유르와 투린.
처음 보는 프레이야의 모습은 자애로운 어머니보단 이성을 잃은 마물에 가까웠다.
“…저기 보이십니까.”
난 프레이야의 미간을 가리켰다.
그곳엔 독특한 룬 문양 하나가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었다.
“저건……!”
저게 바로 프레이야를 권속으로 만든 문양이다.
지금 이 순간 프레이야는 탈리스가 알고 있던 블루 드래곤이 아니다.
악마들의 권속이지.
후우웅……!
프레이야가 날개를 펄럭이자 주변에 가득하던 눈발이 흩날렸다.
그러자 그녀의 등 뒤에 올라 탄 무언가가 보였다.
뿔이 삐죽 솟은 네 마리의 악마.
전신이 검은 빛깔의 거죽으로 뒤덮힌 놈들은 성별 구분 같은 게 없었다.
마치 그림자처럼 칠흑 같은 어둠에 이목구비만 뻥 뚫려서 표정만 간신히 구분할 수 있을 정도였다.
[키힛.]
‘…웃어?’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녀석들은 웃고 있었다.
수십년만에 재회한 프레이야와 탈리스.
그런 둘에게 재회의 기쁨 따윈 없다.
앞으로 남은 건 둘의 피 튀기는 싸움뿐.
이보다 더 악마에게 재밌는 구경거리는 없다.
놈들이 주인공 녀석을 따르기로 마음먹은 건,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닐 거다.
그저 재밌을 것 같아서지.
“이놈들……!”
[캬르르……!]
분노로 두 주먹을 꽉 쥔 탈리스.
그런 그를 향해 프레이야가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곤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리운 채 빠른 속도로 활강했다.
“프레이야……!”
[캬르르!]
탈리스는 분노로 가득차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면서 프레이야의 등에 올라탄 놈들을 향해 소리쳤다.
“감히……! 그녀를 탈 것 취급하다니……!”
[캬르!]
“하아압……!”
쿠구구……!
어스 브레이커 주위로 푸른 마나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향해 프레이야가 입을 벌린 채 돌진한 순간.
탈리스는 있는 힘껏 권격을 내질렀다.
콰아아앙!
둘이 충돌함과 동시에 어마어마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탈리스의 어스 브레이커는 그대로 프레이야의 턱주가리를 향해 내다 꽂혔다.
덕분에 기세 좋게 달려들던 프레이야는 그대로 볼썽 사납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캬륵!]
“미안하오! 프레이야!”
“워후.”
괜히 무투왕이 아니란 건가.
주먹 한 방에 블루 드래곤을 나뒹굴게 만들다니.
콰르르…….
프레이야가 그렇게 되자, 그녀 위에 타고 있던 악마들도 바닥을 나뒹굴 수밖에 없었다.
모양 빠지게 바닥을 구르던 악마 넷.
놈들은 고갤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키히힛.]
[키힛.]
하지만 놈들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이 모든 게 악마들에겐 그저 유희거리다.
인간을 초월한 뒤로 줄곤 다른 차원에 갇혀 지내던 악마라는 존재.
놈들에겐 일상을 벗어난 모든 게 유희거리였다.
가족간에 죽어라 싸우는 모습도.
자신들의 목숨이 걸린 전장마저도.
[키힛!]
저들끼리 뭐라 쑥덕거리던 놈들은, 이내 얘기가 끝났는지 서로 자세를 취했다.
한 놈은 다시금 프레이야 위로 올라탔고, 다른 셋은 저마다 다른 형태의 무기를 뽑아 들었다.
검은 몸뚱이에서 나뭇가지처럼 뻗어 나온 촉수.
이는 금세 형태를 갖춰 검, 지팡이, 건틀렛의 모습을 취했다.
프레이야 위에 올라탄 놈은 기다란 창을 뽑아 들곤 다시금 흉측한 미소를 띄었다.
[키히힛.]
“이놈이……!”
펄럭!
악마 한 놈을 태우자, 프레이야가 힘차게 날갯짓했다.
이내 빠른 속도로 하늘로 솟구친 프레이야.
탈리스는 그런 그녈 향해 다시금 주먹을 그러모았다.
낮은 무투 랭크라면 닭 쫓던 개마냥 하늘만 보고 있었겠지만, 탈리스쯤 되면 공중과 지상의 차이는 없었다.
“하아압!”
탈리스가 하늘을 향해 권격을 내질렀다.
그러자 매서운 광풍과 함께 권기가 프레이야를 향해 발사됐다.
[캬륵!]
가까스로 피하는 데 성공한 프레이야.
다시금 탈리스가 자세를 취했지만.
…콰앙!
“으읏……?”
하늘에서 검은 창날이 내리꽂혔다.
그걸 시작으로 하늘에선 비처럼 수많은 검은 창이 빗발쳤다.
“피하십시오!”
“쳇.”
하는 수 없이 우리 일행은 서로 거리를 벌리며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카카캉!
“이 자식이……!”
탈리스가 어스 브레이커로 창날을 막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흠.”
저걸 어떻게 도와줘야 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키힛.]
악마 한 놈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긴 뿔 한 쌍이 머리에 달린 악마 놈.
검은 바탕에 하얗게 뚫린 두 눈과 입 때문인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이질적인 존재로 느껴졌다.
“내 상대는 너란 거냐.”
[키히힛.]
짧게 고갤 끄덕이는 녀석.
난 그런 놈을 향해 검을 뽑아 들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탈리스가 프레이야와 악마 한 놈을 상대해 주고 있단 거다.
“…….”
곁눈질로 흘긋 쳐다보자 나머지 두 놈은 유르와 투린, 그리고 프리아나와 대치 중이었다.
건틀렛과 검을 든 악마 둘은 상대와 마주한 채 기분 나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눈앞의 녀석과 다른 점이 있다면, 다른 악마들은 뿔이 하나였다.
[키힛.]
이놈은 두 개고.
“너가 얘네들 대장이냐?”
[키힛.]
“후후. 영광이네.”
그래도 제일 센 놈이라 이건가.
“한 수 부탁하지.”
파아앗……!
검 위로 무색의 오러가 나타났다.
[키히힛.]
눈앞의 녀석은 이에 응하듯 지팡일 높이 쳐들었다.
그러자 나와 비슷한 체구였던 몸집이 점점 크게 자라났다.
이내 내 두 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덩치로 자라난 녀석.
그런 녀석의 양 어깨엔 박쥐의 날개가 펄럭이고 있었다.
그리고 녀석의 이마엔 크게 휘어진 두 개의 뿔까지 뾰족하게 자라나 있었다.
제대로 된 본연의 모습을 보인 악마.
어디선가 본 듯한 모습이다.
“…설마.”
[키힛.]
쾅!
거대한 악마는 날 향해 묵직한 발걸음을 내딛었다.
부서진 건물 잔해가 바스러지며 먼지가 자욱이 솟아났다.
“…후후.”
녀석의 모습을 보자 한 악마가 떠올랐다.
지식에 대한 끝없는 탐욕으로 인해 결국 스스로 악마가 된 자.
엘 아지프.
네크로노미콘의 주인.
어쩌면 원래의 줄거리대로였다면.
이 몸, 이안 임페라의 주인이 되었어야 할 놈이다.
“진짜 그자인가? 엘 아지프?”
[키힛?]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고갤 갸웃하는 악마.
확실한 건 모른다.
녀석과 제대로 된 의사소통은 불가능할뿐더러, 상대는 악마다.
시원스레 대답을 해 줄 리가 없는 존재니까.
하지만 왠지 그럴 것 같다.
자신의 종복이 되었어야 할 몸뚱일 향해 자연스레 이끌린 게 아닐까.
“하아압!”
[크르륵!]
뒤에선 벌써 유르와 투린, 프리아나가 싸움에 한창이었다.
어느덧 용혈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된 유르와 투린.
거기에 기사단장급으로 강해진 프리아나.
원래 줄거리였다면 상상도 못했을 일들이 이어졌다.
과연 저 셋이 악마 둘을 상대할 수 있을까.
쿠구구……!
그리고 앞에선 탈리스가 프레이야의 등에 탄 악마와 분전 중이었다.
남은 건 나와 눈앞의 악마.
엘 아지프뿐.
“시간 낭비는 여기까지만 하지.”
[키힛.]
검을 든 채 자셀 잡았다.
엘 아지프는 그런 날 상대로 고갤 치켜들었다.
날카롭게 솟은 두 뿔 사이에선, 거대한 검은 마탄이 모여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