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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216화 (216/222)

216화

“뿔 달린 존재?”

뿔이 달린 녀석들은 많다.

당장 눈앞의 유르만 하더라도 드래곤 폼을 한 상태에선 뿔이 달려 있으니까.

게다가 마물 중에도 뿔 달린 몬스터는 많았다.

하지만 유르와 마주한 뿔 달린 존재들은 그런 어중띤 녀석들이 아니었다.

“난데없이 빙옥에 들이닥쳐 온 녀석들이라 예상은 했지만, 절 보자마자 공격해 오더군요.”

“그런…….”

“물론 어머닐 쉽게 넘겨줄 생각은 없어서… 나름 저항은 해 봤지만 역부족이었어요. 손에서 보랏빛 마검을 꺼내 들곤… 난생처음 보는 괴이한 마법들까지…….”

유르는 끔찍했던 기억이 되살아난 듯 눈을 질끈 감았다.

드래곤 폼의 유르는 웬만한 기사단장 급으로 강했다.

일 대 다수의 싸움이었다곤 하나, 유르가 그토록 허무하게 당했다는 건 상대가 그만큼 강했다는 소리였다.

어쩌면 유르가 이토록 살아서 도망쳐 온 것도 기적에 가까웠다.

“그 수가 얼마 정도였죠?”

“그리 많진 않았어요. 총 넷이었으니까요.”

“넷이라.”

유르의 말에 눈을 꼭 감은 채 고민에 빠졌다.

분명 뿔 달린 존재들은 내가 생각하는 ‘그 녀석들’일 거다.

최후의 봉인석이 남아 있으니 놈들이 나타나진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주인공 녀석이 따로 넷만 빼 온 건가?

아니면,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루트로 연결이 된 건가?

그것도 아니면 대체 놈들이 어떻게 넘어온 거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일단 확인된 개체 수는 총 넷.

그렇다고 절대 가볍게 볼 놈들이 아니다.

어쩌면 겨우 그 넷만으로 연합의 전 병력이 갈려 나갈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면…….

짝!

“…이안!”

홀로 고민에 빠져 있는 그때, 이글렌이 옆에서 손뼉을 쳤다.

“어엇.”

그 바람에 퍼뜩 정신이 돌아온 난, 토끼눈을 뜬 채로 이글렌을 바라봤다.

“또 혼자 고민하고 있죠?”

“그게…….”

“그러지 말고 털어놔 줘요. 그러기 위한 연합 아니겠어요?”

“…하하.”

내가 했던 말을 고대로 따라하곤 싱긋 미소 짓는 이글렌.

오늘따라 왠지 모르게 그녀의 미소에 마음이 안정됐다.

비록 사랑이 아닌 정략결혼으로 시작된 만남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그녀를 얻게 된 건 큰 행운이 아닐까 싶다.

“…죄송합니다. 잠시 생각 좀 하느라.”

“죄송하면 무슨 생각이었는지 말해 줘요.”

“…네.”

난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곤 이글렌와 유르에게 이야길 늘어놓기 시작했다.

“제가 생각했을 때 유르 공주님이 마주한 건… 악마인 듯합니다.”

“악마……?”

악마란 말에 두 여인은 고갤 갸웃했다.

악마는 주신들과 같이 보통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존재니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주신들이 인간들과 다른 차원에 있는 것처럼, 악마도 인간들과 다른 차원에 존재하니까.

때문에 악마들은 함부로 인간을 건드릴 수도, 위협할 수도 없는 존재다.

대신, 약간의 힘을 빌려주는 대가로 영혼을 취하는 악랄한 짓을 벌이곤 한다.

그게 바로 악마의 마법서.

크로노미콘 같은 아티팩트다.

“하지만… 제가 듣기론 악마들은 인간들의 세상엔 접근할 수 없다고 하던데요.”

“누가 그럽니까?”

“아바마마께서요…….”

유르는 저만치 떨어져 있는 탈리스는 흘긋 쳐다봤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저도 그런 줄 알았으니까요. 하지만 왜 그런지는 알고 계셨나요?”

“그건… 모르겠어요.”

“바로 이것 덕분입니다.”

난 품 안에 감추고 있던 최후의 봉인석을 꺼내 들었다.

히테라에게 협상에 얻어 낸 자그마한 돌멩이.

우로스의 보물 우로하콘에서 떼어 낸 이 자그마한 돌멩이에 대륙의 운명이 걸려 있다.

“그걸 이안이 어떻게… 아니, 그건 그렇다 쳐도 겨우 이 자그마한 돌멩이 하나 덕분에 악마들이 이 세상에 못 나타나는 거라구요?”

“네. 물론 이거 딱 하나 때문은 아니었죠. 다른 녀석들이 다 파괴돼서 그렇지.”

“그런……?”

“아무튼. 이 돌멩이 하나가 파괴된다면, 인간들의 세상과 악마들의 세상을 구분 짓던 경계가 허물어질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악마들이 넘어오겠군요.”

“…네.”

“그럼 다른 봉인석들이 파괴돼 버린 터라 힘이 약해져서 악마 몇 놈이 넘어왔단 소리구요.”

“아마 그럴 겁니다.”

“으음…….”

이글렌과 유르는 골치가 아파 오는 듯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다른 놈도 아니고 악마들과의 싸움이라니.

히테라교의 성서에서나 볼 법한 초월적 존재들을 상대로 뭘 할 수 있을까.

“…놈들의 힘은 어느 정도죠?”

“아직 최후의 봉인석이 남아 있으니 온전한 힘을 발휘하진 못할 겁니다. 그래도 하나하나가 기사단장급, 혹은 그 이상은 되겠죠.”

“하아…….”

“하지만 막아야겠죠. 안 그랬다간 그보다 더 한 놈들이 튀어나올 테니까.”

“…그렇죠.”

* * *

프란츠가 습격을 당한 이후.

연합의 병력은 빠르게 소집됐다.

이미 주 병력인 기사단이 아이소테르에 와 있는 상태.

덕분에 기사단을 필두로 한 병력은 금세 프란츠를 향해 진격했다.

전원 랭크 6 이상으로 이루어진 수백의 기사단.

거기에 아이소테르와 프란츠의 일반 병사들을 빠르게 소집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프란츠 왕성만 점거했을 뿐, 왕성 주변 민가엔 전혀 손대지 않고 있었다.

덕분에 프란츠의 일반 병력을 그대로 불러낼 순 있었다.

마치 왕성에 볼일만 끝나면 떠날 거라 말하는 듯, 왕성을 점거한 놈들은 조용했다.

“…….”

새하얀 눈발이 나부끼는 프란츠의 정경.

탈리스의 노회한 두 눈빛이 이를 차분히 바라보고 있었다.

“전하…….”

유르는 그런 탈리스를 걱정스레 바라봤다

지금 왕성을 점거한 놈들이 원하는 건 뻔했다.

블루 드래곤 프레이야.

소설에서 라크레시아가 그랬듯, 그녈 권속으로 부리려는 게 분명했다.

원작의 줄거리대로라면 이 사건으로 프란츠는 멸망한다.

탈리스는 권속이 된 프레이야에게 살해당하고.

분노한 유르와 투린의 손에 아무런 죄 없는 프란츠의 백성들은 살해당한다.

하지만 많은 게 바뀌었다.

유르와 투린은 어느덧 자신들의 피 속에 흐르는 드래곤의 힘, 용혈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됐다.

게다가 탈리스도 많이 변했다.

나단 공작을 필두로 한 프로스트 랜드의 배신.

그 일로 면역력이 쌓인 걸까.

오직 프레이야만을 되살리기 위해 여생을 낭비하던 늙은 왕은 이제 없었다.

“…괜찮단다. 딸아.”

“흐흑…….”

탈리스는 두 자식들을 향해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씁쓸함이 가득 느껴지는 미소였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미소를 띨 수 있단 건 그가 그만큼 성장했단 증거였다.

“아버지…….”

투린은 그런 아비를 위로 하려는 듯 손을 꼭 붙잡았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곁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내가 물었다.

“…그래. 무슨 일이 있어도 말일세.”

“…그렇군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말은 탈리스도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단 소리였다.

프레이야의 알이 주인공 녀석의 손에 넘어간 이상.

그녀가 무사히 있을 거란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래도 이만한 병력이 모인 건 대전쟁 이후론 처음 아닌가? 어쩌면 손쉽게 놈을 쳐부수고 프레이야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

“후후… 늙은이의 농담이 별 재미가 없었는가 보구만.”

탈리스는 괜한 긴장감을 떨쳐 내려는 듯 농담까지 던졌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볼수록 가슴 한켠이 아려 왔다.

프란츠 자체가 적들의 손에 넘어간 건 아닌 터라, 연합의 군세가 프란츠의 외성에 도달하자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입을 열었다.

쿠르르…….

성문 너머엔 이미 프란츠에 대기하고 있던 수도 경비대원들과 대신들이 병사들을 맞이했다.

“전하!”

이들은 탈리스를 보자마자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저들끼리 어떻게서든 왕성을 탈환해 보려 했었나 보다.

덕분에 경비대원들 중 몸이 성한 이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피칠갑한 붕대를 칭칭 동여맨 이들은 탈리스의 앞에서 고개를 푹 숙였다.

“크흑……!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왕성은 이미……!”

“…괜찮네.”

“전하…….”

탈리스는 다친 경비대원들을 다독였다.

유르도 어쩔 수 없던 놈들인데, 고작해야 기사단도 아닌 수도 경비대원들이 뭘 할 수 있었겠나.

“상황은 어떻지?”

탈리스는 대신들을 향해 물었다.

비교적 멀쩡한 상태의 대신들은 눈칠 살피다 입을 열었다.

“명령하셨던 대로 왕성 주변에 사람들은 모두 대피시켰습니다. 그리고…….”

“그것만 해도 잘한 걸세. 자네들의 임무에 왕성을 지키란 사항은 없었잖는가.”

“…면목 없습니다.”

“왕성에 있던 이들은?”

“모두 연락이 두절된 걸 보면…….”

“…알겠네.”

프란츠의 주요 병력이 회담장에 파견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왕성이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장소는 아니다.

나름 상주하고 있는 기사들도 있었을 테고, 그 외에 왕성에서 머무는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이런 말하기 뭐하지만, 아마 그들 대부분은 죽었을 거다.

다른 놈도 아니고 악마가 넷이나 왕성에 강림했으니.

연합의 병력은 프란츠 대신들의 안내에 따라 왕성으로 향했다.

푸른 얼음 조각이 우뚝 세워져 있는 프란츠의 왕성.

탈리스가 직접 조각했다는 프레이야의 조각상이 눈바람에 나부꼈다.

연합의 병사들은 그런 프레이야의 조각상 아래 천천히 진을 치기 시작했다.

“이제 시작인 건가?”

페이라는 눈치 없는 아이마냥 잔뜩 기대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사실 연합이 프란츠 왕성 탈환에 참전하기로 했지만, 연합의 수장들까지 자리할 필요는 없었다.

괜히 눈먼 화살에 맞아 죽기라도 했다간 더 큰 참사가 일어날 테니까.

때문에 대부분 연합의 수장들은 기사단만 맡기곤 본국으로 되돌아갔다.

이글렌도 일단은 내게 맡기고 테라리움에서 대기 중이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따라온 건 피스트의 국왕 페이라뿐.

녀석은 와이트 킹의 싸움을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잔뜩 기대해 있었다.

[…….]

리겔은 그런 페이라의 곁에서 조용히 눈칠 살폈다.

라스하겐이 연합에 기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리인지라 쿠스켈도 함께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이 자리에 주인공이 아니었다.

프란츠의 왕성을 탈환하기 위한.

프란츠의 주인을 위한 자리다.

“후우.”

탈리스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의 등 뒤엔 수백의 기사들과 그 이상의 병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리곤 마음 정리가 끝난 듯 뒤돌아섰다.

“연합의 기사들이여!”

눈보라치는 프란츠를 가득 메울듯 크나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두 이 늙은이의 집안싸움에 손길을 내주어서 고맙네!”

“…….”

과거 대전쟁 시절 무관의 왕이라 불렸던 남자.

무투왕 탈리스.

늙고 초라해진 그였지만, 지금 한순간만큼은 전성기 그의 모습을 방불케 했다.

“이런 사소한 싸움에 시간을 끌었다간 얼굴만 붉어질 뿐이지 않겠나!”

“…….”

“그러니 얼른 끝내고 돌아가자고! 알겠나!”

“…예!”

연합의 기사들은 탈리스의 연설에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연설이 끝나자마자, 대신들은 챙겨 두었던 커다란 상자 하날 꺼내 왔다.

달칵.

이를 열자 그 안엔, 무투왕 탈리스의 또 다른 반려.

에고 웨폰 어스 브레이커가 들어 있었다.

거대한 건틀렛의 형상을 띤 무구.

탈리스는 조심스레 어스 브레이커를 들어 올렸다.

[우웅… 이게 뭔 일이래……?]

“후후. 자고 있었나?”

[…탈리스?]

“미안하지만… 오랜만에 좀 날뛰어 줬음 해서 말이야.”

[…흐흐! 내가 언제 싸움 마다하는 거 봤나?]

“크흐흐! 그래야 너답지!”

탈리스는 어스 브레이커를 오른손에 끼워 넣었다.

그러자 주홍빛의 파장이 탈리스의 전신을 재빠르게 훑었다.

불룩 솟아난 그의 오른팔은 나 늙어 가는 노인의 것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럼.”

탈리스는 어스 브레이커를 한 손에 쥔 채 힘을 그러모았다.

그리곤 굳게 닫힌 프란츠의 왕성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

잠시 말없이 프레이야의 얼음 조각을 바라보던 탈리스.

그는 두 눈을 꼭 감곤 팔을 뒤로 뻗었다.

드래곤조차 맨손으로 때려잡던 무투 랭크의 달인.

그의 오른손을 주위로 푸른 오러 피스트가 맴돌기 시작했다.

지지직……!

무언가 뒤틀리고 바스러지는 파공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뭔가 번쩍하더니.

…콰아앙!

프란츠의 왕성을 향해 거대한 힘의 소용돌이가 터져 나갔다.

…쩌저적!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은 그대로 산산조각 나며 열렸다.

뿐만 아니라 주변 성벽까지 균열이 퍼져 나갔다.

계속해서 자라나던 균열은 왕성 중앙에 우뚝 솟은 프레이야의 얼음 조각까지 집어삼켰다.

…파캉!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 난 프레이야의 얼음 조각.

마치 이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프란츠의 왕성에서 심장이 멎을 듯한 포효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캬르르…….]

둥……! 둥……! 둥……!

거기에 저 멀리서 들려오는 북소리.

이는 프란츠의 배신자.

프로스트 랜드 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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