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저건……?”
피칠갑을 한 하얀 비늘의 생명체.
3미터는 됨직한 거대한 덩치에 주변 사람들의 낯빛에 두려운 기색이 역력했다.
다들 처음 보는 마물의 모습에 고갤 갸웃했다.
[크르륵…….]
흉측한 눈빛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녀석은 힘겹게 한 발자국을 뗐다.
“어딜!”
공격하려는 걸로 받아들인 위셀란의 기사단장이 푸른 오러 소드를 뽑아냈다.
그대로 녀석을 향해 검을 휘두르려는 찰나.
콰악!
“멈추십시오.”
난 그의 팔뚝을 거칠게 잡아챘다.
마치 거대한 바위에 짓눌린 듯 꿈쩍도 안 하는 팔에 그의 눈빛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무슨 힘이……?”
하지만 방금 내가 안 막았으면, 애먼 대전쟁이 또 터질 뻔했다.
공간 도약을 통해 넘어온 건, 다름 아닌 프란츠의 공주였으니까.
하프 드래곤 유르.
저건 그녀의 드래곤 폼의 모습이었다.
지난번 빙옥에서 봤을 때보단 크기가 작아졌다.
약해진 건 아니다.
오히려 그만큼 드래곤 폼을 능숙히 다룰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 그녀가 피칠갑을 한 채 왔다는 건…….
“유르!”
“누, 누나!”
탈리스와 투린은 거대한 괴생명체가 유르란 사실을 금세 알아챘다.
황급히 유르에게 달려들자, 그제서야 유르는 드래곤 폼을 풀었다.
“으윽…….”
다시금 가냘픈 프란츠의 공주, 유르의 모습으로 되돌아온 그녀.
불행 중 다행히도 지난번처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은 아니었다.
하얀 드레스를 반쯤 피로 적신 그녀는 힘겨운 듯 신음을 흘렸다.
“아, 아바마마…….”
“이,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유르!”
“으으…….”
“정신 좀 차려 보거라!”
빈사 상태에 빠진 딸의 모습에 다시금 분노에 휩싸이려는 탈리스.
난 서둘러 그에게 다가갔다.
“…힐.”
자잘한 말로 진정시키기보단, 서둘러 유르에게 회복 마법을 퍼부었다.
그러자 온몸에 가득했던 깊은 자상이 하나 둘 빠른 속도로 회복됐다.
“…….”
점점 표정이 편안해지던 유르는 긴장을 푼 탓인지 이내 조용히 눈을 감았다.
“유, 유르!”
“잠깐 잠든 것뿐입니다. 상처는 다 치유됐으니 잠시만 기다려 보시죠.”
“아아……! 어째서 이런 일이……!”
탈리스는 기절한 유르를 꼭 끌어안았다.
투린은 그런 아비의 곁에서 걱정스런 눈빛으로 아비와 누이를 번갈아 볼 뿐이었다.
그래도 예전보단 많이 나아졌다고 해야 하나.
아마 소설 속 투린과 탈리스였다면, 탈리스는 벌써 분노에 정신을 잃고 투린도 그런 그를 따라 미쳐 버렸을 거다.
난 잠시 정신을 잃은 유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젠장.”
프란츠를 지키고 있어야 할 유르가 이 상태라는 건, 주인공 녀석은 여기가 아니라 프란츠를 노렸다는 거다.
그리고 프란츠엔…….
“으윽…….”
잠시 정신을 잃었던 유르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힘겹게 눈을 뜬 그녀는 곁을 지키고 있던 투린과 탈리스의 뺨을 어루만졌다.
“아바마마… 투린…….”
“무, 무리하지 말거라! 일단은 휴식을 취해야…….”
“…괜찮아졌습니다. 방금 써 주신 회복 마법 덕분예요.”
“…….”
유르는 내게 고맙다는 듯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떻게 된 겁니까.”
“…프란츠가 공격당했습니다.”
“…역시.”
너무 연합의 수장들 호위에만 신경 쓴 걸까.
그 틈을 노리고 프란츠를 공격할 수도 있다는 건 잠시 잊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프란츠에는…….
“프레이야 님은 어떻게 됐습니까.”
“…….”
블루 드래곤 프레이야.
카잔 황제의 농간에 빠져 알이 되어 버린 여왕.
지금 그녀는 프란츠의 보고에서 보호받고 있는 중이었다.
탈리스나 투린뿐만 아니라 남은 기사단까지 모두 회담에 참석한 지금.
그녀를 지켜 줄 수 있는 건 유르뿐이었다.
자세한 위치는 철통같은 비밀에 부쳐져 있긴 했지만, 그거야 이미 과거 시점으로 전생한 주인공 녀석에겐 모두 알려진 사실이었다.
“어머니께서 어떻게 됐는지는 못 봤지만… 아마…….”
유르는 목이 메는 듯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프레이야가…….”
“…죄송해요! 아바마마!”
“…….”
탈리스는 말없이 유르를 꼭 안아 줬다.
“…괜찮다. 유르. 네가 죽지 않고 살아와 준 것만으로도 고맙다.”
“아바마마…….”
예전의 탈리스였다면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을 거다.
유르와 투린도 사랑하지만, 그보다 더 프레이야에게 미쳐 있던 녀석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그에게 남은 이들을 아끼고 보살폈다.
‘성장했다는 건가.’
그 모습에 대단스래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론 안쓰러웠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난 유르를 꼭 끌어안고 있는 탈리스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그, 그게 무슨 말이오? 임페라 공작?”
“라크레시아가 프란츠를 노린 건 십중팔구 프레이야 님을 차지하기 위해서일 겁니다.”
“그렇겠지…….”
“그럼. 프레이야님의 알을 파괴하는 것보단 부화시켜 되살리는 게 목적이겠죠. 물론 그런 짓을 공짜로 해 줄 리는 없고. 그분을 자신의 권속으로 부리기 위해서겠죠.”
“으음…….”
블루 드래곤을 권속으로 삼는다라.
탈리스나 다른 북부인들 입장에선 피가 거꾸로 솟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권속으로 삼겠다는 건.
달리 말하자면 죽이진 않을 거란 소리다.
“그럼… 어찌해야 한단 말이오?”
“어쩌긴요.”
난 탈리스의 물음에 짧게 답했다.
간단하면서도 명쾌한 해답.
지금 녀석을 막기 위한 유일한 길 하나.
“싸워야겠지요.”
“아아…….”
탈리스는 감정이 격앙된 듯 눈망울이 반짝였다.
난 자리에 함께한 연합의 일원들에게 당당히 외쳤다.
“이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나단 공작을 필두로 한 프로스트 랜드, 그자들의 배신을 처단하기 위한 전쟁이 아닙니다.”
“…….”
프란츠가 공격당했다.
이건 북부인들의 단순한 내전이 아니다.
연합을 향해 칼을 들이민 자들을 향한 전쟁이다.
“연합의 일원인 프란츠가 카잔 황제의 망령에게 공격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가만히 있을 생각이십니까?”
“그게…….”
위셀란과 도라스의 국왕은 머뭇거리며 시원스레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연합의 일원이 공격받은 이상, 저들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순 없었다.
“모두 도와주십시오. 프란츠를 공격한 간악한 무리들을 향해 검을 뽑을 때입니다.”
“으음…….”
“맞아요.”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이글렌이 한마디 거들었다.
“애당초 프란츠를 도울 생각이긴 했습니다만, 지금 같은 때엔 다른 분들의 도움도 절실합니다.”
“…….”
아직 우물쭈물거리는 이들에게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대로 프란츠가 넘어간다면. 그다음은 우리 아이소테르나 신성 왕국이겠죠.”
“그, 그런……!”
“라크레시아의 권속이 된 프레이야 님은… 그대로 모든 이들을 집어삼킬 겁니다. 다른 연합의 일원 분들을 하나도 남기 없이.”
이글렌의 말에 신성 왕국의 국왕이 마른침을 삼켰다.
과거 북부인들의 분노를 겪어 본 터라, 그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았다.
게다가 프레이야를 앞세운 진격이라면, 그 잘난 히테라 주신들을 향한 신앙심도 허무하게 짓밟히고 말 거다.
“위셀란, 도라스, 마지막으로 피스트까지. 그럼 그때 가서 후회하실 생각이십니까? 차라리 처음 프란츠가 공격 받았을 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어야 했다고?”
“…후후.”
리겔을 만지작거리던 페이라가 작게 웃음소릴 냈다.
따지고 보면 피스트는 대륙 최남단에 있다 보니 북부인들의 싸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페이라는 그런 걸 따질 남자가 아니다.
“나도 참전하지.”
그러면서 와이트 킹 리겔을 향해 물었다.
“네 녀석도 그럴 건가?”
리겔은 쿠스켈과 날 번갈아 쳐다봤다.
쿠스켈 같은 흑마법사 입장에선 절호의 기회다.
땅속으로 처박은 흑마법사들의 인식을 바꿀 수 있는 기회니까.
쿠스켈은 리겔을 향해 조용히 고갤 끄덕였다.
[그, 그렇겠죠?]
“그럼 무조건 참전이지.”
와이트 킹의 싸움을 볼 수 있단 말에 페이라는 벌써부터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저, 저도 참전하겠소.”
“저도…….”
페이라의 참전 선언에 이어 다른 왕국들도 하나 둘 참전 의사를 밝혔다.
“…우리 위셀란도 참전하겠소.”
마지막까지 버티고 버티던 위셀란의 국왕.
녀석의 참전 선언을 끝으로 연합의 모든 이들의 동의를 얻어 내는 데 성공했다.
“…감사하오. 모두들.”
탈리스는 그런 연합의 수장들을 향해 고갤 숙였다.
대부분 마지못해 참전하는 거긴 했지만, 그래도 참전하는 건 참전하는 거니까.
“으응… 여, 연합의 일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허허…….”
멋쩍은 듯 미소 짓는 연합의 수장들.
“에휴.”
그런 이들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상황이 얼마나 급박한데 저러고 앉아 있으니.
“그럼. 일단 잠시 휴정하고 다시 모이도록 하겠습니다.”
이글렌은 분위기를 환기 시킬 겸 자리에 모인 이들에게 말했다.
이내 연합의 수장들은 저마다의 기사단에게 호위를 받으며 잠시 휴식을 가졌다.
* * *
난 자세한 상황을 듣기 위해 유르에게로 향했다.
“유르 공주님.”
“후후… 임페라 공작님……. 공작위 받으셨단 소문 잘 들었어요.”
“몸 상태는 어떻습니까.”
“그… 방금까진 죽을 것 같았는데, 회복 마법을 써 주신 덕에 살 것 같아요.”
“다행이군요.”
유르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띄운 채 날 바라봤다.
“매번 민폐만 끼치는 거 아닌가 몰라요.”
“그럴 리가요. 서로 돕고 살기 위한 연합 아니겠습니까.”
“후후. 그런가요?”
그렇게 유르의 상태를 살피고 있는데, 이글렌이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아아… 이글렌 여왕님.”
유르는 이글렌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고갤 숙였다.
“어엇……! 무리하지 마세요! 그러다 상처라도 벌어지면…….”
“후후. 임페라 공작님께서 치료해 주신 덕에 상처는 다 나았어요. 대신… 몸에 좀 기운이 없네요.”
“아… 그렇담 다행이군요.”
이글렌은 안심한 듯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그런 둘 사이에 있으려니 괜히 눈치가 보였다.
이글렌과는 결혼을 한 사이고, 유르는 탈리스가 나랑 결혼 시키고 싶어 하는 사이고.
“…….”
“…이안? 무슨 생각해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흐음. 뭔가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는데.”
여자의 촉이란 게 이런 걸까.
뭔가 쎄한 기운을 감지하곤 이글렌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난 서둘러 분위기를 전환 시킬 겸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유르 공주님. 힘드시겠지만 어떻게 된 건지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으음…….”
유르는 눈살을 찌푸리며 기억을 되짚었다.
“아바마마와 투린이 먼저 공간 도약을 쓰러 가고. 전 빙옥에서 회담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어요.”
“빙옥……?”
이글렌은 빙옥이 뭔지 모르는 듯 고갤 갸웃했다.
“네. 프란츠 왕성 지하에 위치한 얼음 궁전이에요. 그리고 그보다 더 깊은 지하엔…….”
“프레이야 님이 계셨군요.”
“…네.”
유르는 그저 빙옥이 시원해서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 지하에 있는 프레이야의 알을 지키기 위해서였지.
“그런데 갑자기. 아무것도 없던 빙옥에서 뭔가가 나타났어요.”
“뭔가라면…….”
“그건…. 처음 보는 마법이었어요. 공간 도약도 아니었고, 대공간 이동 마법도 아니었어요. 마치 허공에 균열을 찢고 나오는 듯한…….”
“…균열?”
허공에 균열이 생겼다고?
난 불현듯 떠오른 어떤 생각에 황급히 유르를 다그치듯 물었다.
“그 균열. 무슨 색이었습니까?”
“그, 그게… 보랏빛에 가까운 색이었죠?”
‘보랏빛 균열? 그렇다면 설마……?’
“계속해 주세요.”
이글렌의 말에 유르는 다시금 이야길 재개했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을 비집고 나온 말은.
“균열 속에서 뭔가가 나오더군요. 거대한 뿔이 달린 존재들이.”
“…이런.”
안타깝게도 내 최악의 상상과 일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