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그게 무슨 소리요! 임페라 공작!”
갑작스레 등장한 구울에 회담장은 발칵 뒤집혔다.
위셀란과 도라스는 기사단장을 앞세우곤 금방이라도 리겔을 베려는 듯한 자셀 취했다.
“잠깐, 잠깐. 진정하세요.”
“진정하라니! 구울을 앞에 두고 그게 무슨…….”
역정을 내던 연합의 두 국왕의 목소리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구울이라면 보통 이성을 잃은 채 인간을 공격하는 마물이다.
하지만 리겔은 멋쩍은 미소만 짓고 있을 뿐 공격 의사는 전혀 없어 보였다.
“이게 무슨…….”
창백한 피부에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구울이라.
연합의 수장들은 혹시 모를 마물의 존재가 하나 떠올랐다.
그렇게 회담장에 긴장이 흐르는 가운데,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례하겠소.”
검은 빛깔의 치렁치렁한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
그의 곁엔 비슷한 차림새의 신관 셋이 함께 서 있었다.
아이소테르의 기사단, 붉은 갑주의 적갑 기사단에게 붙들려 온 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쿠스켈이었다.
“이자는……?”
난데없이 회담장에 등장한 이들의 모습에 다들 고갤 갸웃했다.
“라스하겐을 대표해서 온 흑마법사. 쿠스켈이라 하오.”
“흐, 흑마법사!”
쿠스켈은 셀렌교 신관들까지 대동한 채 국경을 넘어왔다.
대놓고 적국에 등장한 거나 다름없었기에 회담장의 사람들은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그 아이는 제 권속, 와이트 킹 리겔이오.”
“허억…….”
연속해서 터지는 충격적인 발언에 더 이상 놀랄 힘도 없어 보였다.
와이트 킹.
그런 마물을 권속으로 다룬다는 건 그만큼 강한 경지의 흑마법사라는 거다.
“뭐, 뭣들 하는 게냐! 당장 저 불한당 놈들을……!”
뒤늦게 정신을 차린 위셀란의 국왕이 소리 치려 했다.
“히야!”
하지만 페이라의 외침에 금세 저지됐다.
그는 기사단들에게 둘러싸인 리겔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와이트 킹이라니!”
그리곤 리겔의 두 뺨을 사정 없이 매만졌다.
[우읍…….]
리겔은 당황스런 눈빛으로 페이라의 손길을 허용했다.
그러면서 날 바라보는 녀석에게 조용히 고갤 끄덕였다.
“와이트 킹을 실제로 보게 될 줄이야! 으하핫!”
새로운 장난감이라도 만난 듯 싱글벙글 기뻐하는 페이라.
그 모습에 다른 연합의 수장들이 보다 못해 한마디 했다.
“피, 피스트의 주인이시여! 지금 그게 무슨 짓…….”
“뭐요? 지금 내가 하면 안 될 짓이라도 하는 거요?”
“그, 그게 아니라 흑마법사들의 권속은 위험한…….”
한창 말하던 위셀란의 국왕은 말문이 막혔다.
정말로 흑마법사의 권속이 위험한 존재라면, 페이라가 이렇게 만지작거리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테니까.
“크흐흐… 와이트 킹에 대한건 나도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말이야. 보기보다 얌전하구만 그래.”
[그, 그런가요?]
리겔은 두 뺨을 사정 없이 매만지면서도 멋쩍은 미소만 지었다.
다행히 여기까진 예상했던 대로다.
페이라는 재밌어 보이는 거라면 사족을 못 쓰는 놈이다. 그러니 흑마법 랭크도 익힌 거고.
죽은 자와 마주할 수 있는 것만큼 재밌어 보이는 게 또 없을 테니까.
게다가 페이라는 직접 와이트 킹을 본 적이 없었다.
대전쟁 당시 르델의 휘하에 꽤나 많은 와이트 킹이 있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장에서 미쳐 날뛰는 놈들뿐이었다.
대전쟁이 다 끝나 가서야 참전한 페이라는 다리 건너 소문으로만 듣던 존재였다.
“어떻습니까? 소문과는 달리 얌전하지 않나요?”
이글렌은 연합의 수장들을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득의양양한 그녀완 달리, 반대표를 던졌던 위셀란과 도라스의 국왕은 낯빛이 어두워졌다.
“끄응…….”
이제 더 이상 흑마법 랭크를 반대하고 나설 명분이 없어졌다.
흑마법사들이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다는 게 증명이 되긴 했지만, 이들이 어떻게서든 반대표를 던지고 싶어 하는 건 따로 이유가 있어서다.
지금껏 이단 심문이란 카드로 정적을 제거하던 게 불가능해질 테니까.
저들 입장에선 굉장히 유용한 카드를 버리긴 싫을 거다.
“하, 하지만…….”
“피스트의 주인께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으응? 뭘 말이지?”
페이라는 리겔의 볼을 부비작거리느라 정신 없는지 이글렌의 물음에 고갤 갸웃했다.
“흑마법 랭크를 합법화하겠다던 이번 안건 말입니다.”
“아아! 그거 말이군! 당연히 찬성이지요.”
“후훗. 그렇죠?”
페이라의 찬성표에 이글렌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웠다.
이로써 찬성 3, 반대2, 중립 1.
안건을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다.
페이라 덕에 일이 쉽게 풀렸다.
지금껏 사람들의 인식에 박혀 있던 구울이라면, 페이라의 거친 손길에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누구보다도 확실한 방법으로 흑마법사들의 인식을 바꿔 준 거다.
“후후.”
“으윽…….”
착잡한 낯빛을 숨기지 않는 녀석도 있었지만.
그래도 이번 회담은 성공적으로 끝나긴 했다.
앞으로 남은 건 단 하나.
대륙을 멸망의 소용돌이로 빠뜨리려는 주인공 녀석만 막으면 된다.
와이트 킹 리겔의 등장으로 어수선해지긴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회담장은 다시 엄숙한 분위기를 되찾았다.
연합 수장들과 라스하겐의 대표 쿠스켈 간에 자잘한 질의응답을 끝으로 회담은 어느정도 끝을 향해 달려갔다.
“…….”
난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이글렌의 곁을 조용히 지켰다.
혹시 모를 초대 받지 않은 손님을 기다리며.
‘…여긴 나타나지 않을 생각이군.’
내심 기대하긴 했다.
연합의 일원들이 모두 모인 자리.
그런 자리라면 주인공 녀석이 깽판치기 딱 좋은 자리였으니까.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이들만 모두 처치한다면, 연합의 전력 대부분이 소실된다.
하지만 녀석도 그러기엔 위험 부담이 컸는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럼… 프로스트 랜드는 어쩔 생각이십니까?”
슬슬 마무리되어 가는 분위기 속에 위셀란의 국왕이 화두를 던졌다.
“그, 그건……!”
다른 이들도 일부러 언급을 꺼리던 주제.
연합의 배신자 프로스트 랜드.
지난번 나단 공작의 배신으로 인해 프로스트 랜드는 연합에서 탈퇴했다.
그 후 프란츠와 프로스트 랜드 간에 새로운 성벽이 생겨난 건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라크레시아라는 거대한 적 때문에 다들 언급을 꺼리던 내용이었다.
카잔 제국의 옛 영토는 라스하겐에 맡긴다 치면, 이젠 슬슬 연합의 배신자에 대한 처우를 결정 지을 때.
위셀란의 국왕이 꺼낸 말을 시작으로 모두의 시선이 탈리스에게 쏠렸다.
“…….”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 버린 탈리스의 낯빛.
그는 잠시 고민에 빠져 있다 이내 입을 열었다.
“…그간 고민을 많이 했소.”
“크흠.”
“연합의 배신자이자, 우리 북부인들의 배신자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
제일 연장자이기도 한 탈리스의 중후한 음색에 연합의 수장들은 조용히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간 많이 참았소. 일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과거 대전쟁을 시작한 남자의 말이라 그런지 결코 가볍지 않게 느껴졌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참을 순 없을 노릇이지.”
“그렇다면…….”
탈리스는 굳게 꼬고 있던 팔짱을 풀었다.
그리곤 나지막히 연합의 수장들뿐만 아니라, 기사단들에게까지 말했다.
“프란츠의 주인이자 블루 드래곤 프레이야의 반려로서 말하겠소. 오늘부터 프로스트 랜드는 나의 적이고 우리 왕국의 적이오. 그러니 연합의 일원으로서 여러분들께 묻고 싶소. 나와 함께 적들을 무찌를 힘을 보태 줄 수 있겠소?”
“…당연하죠!”
위셀란과 도라스의 왕은 당연하다는 듯 굳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녀석들이 같은 편을 해 준다는 건 좋기야 했지만, 그간 연합의 수장들이 해 온 짓거리들을 생각해 보면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다.
탈리스의 배신자를 처단한다기보단, 이번 전쟁으로 뭐라도 빼먹을 것 없을까 하는 마음에서 한 소리일 테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단 공작을 필두로 한 배신자 무리들을 향하는 말이오. 다른 북부인들을 건든다는 건 북부의 주인으로서 용납 할 수 없소.”
“허읍…….”
탈리스는 노련한 나이의 왕답게 이를 간파하곤 먼저 선을 그었다.
나단 공작과 그를 필두로한 귀족들만 공격 대상이라는 거지, 평범한 북부인 백성들은 절대 건들지 말란 소리였다.
탈리스가 그렇게 말하자 위셀란과 도라스의 국왕은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다물었다.
신성 왕국의 주인도 눈칠 살피며 대답을 회피하기 바빴다.
페이라는 와이트 킹 리겔을 만지작거리기 바빴고.
“그래요. 그게 연합의 일이니까요.”
탈리스의 선 긋기에도 단호한 어조로 대답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
아이소테르의 주인 이글렌.
전쟁이란 지면 쫄딱 망하는 거고, 이기면 살짝 망하는 장사다.
이기건 지건 아이소테르 입장에선 꽤나 큰 출혈을 감당할 수밖에 없는 장사.
그래서 전쟁이 일어나면 다들 약탈이니 뭐니 난리가 나도 약간은 눈 감아 주는 거다.
안 그랬다간 그 피해를 온전히 자신들이 떠안게 될 테니까.
그런 와중에 탈리스가 그은 선은 달갑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이글렌 입장에선 전쟁으로 발생할 손해를 온전히 감당해야 할 테니까.
“…괜찮겠소? 아이소테르의 주인이여?”
“그럼요. 그러기 위한 연합 아니겠어요?”
뼈가 있는 이글렌의 말에 다른 이들이 겸연쩍은 얼굴로 고갤 돌렸다.
“푸흐흐… 고맙소.”
탈리스는 싱긋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프로스트 랜드가 배신을 한 건 맞지만, 어디까지나 연합을 탈퇴하고 조용히 틀어박혀 있기만 할 뿐이었다.
녀석들이 대놓고 공격을 한 거라면 모를까.
따지고 보면 북부인들의 내전에 가까웠기에 다른 연합의 강제적인 참전 권한까지는 없었다.
“죄송하지만 전대 교황님이 서거하신 지 얼마 안 된지라…….”
“충분히 이해하오. 너무 신경 쓰지 마시오.”
“흐흠. 우린 이번 작황이 워낙 끔찍했던 터라…….”
“괜찮소.”
“새, 생각해 보니 우리 위셀란도 전염병이 돌아서…….”
“알겠소.”
결국 프란츠를 도와 참전하기로 한 건 아이소테르 말곤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페이라를 흘끗 쳐다봤다.
[우읍…….]
“후후.”
여전히 와이트 킹을 만지작거리며 놀기 바쁜 페이라.
이미 회담엔 마음이 떠난 듯했다.
차라리 그게 나았다.
과거 대전쟁에 참전했다가 정신 나간 짓을 벌인 녀석이니까.
지금도 찬성표를 던진 건 고맙긴 했지만, 굳이 친하게 지내고 싶진 않았다.
“그럼. 방금 안건에 대해선 추후 긴밀히 협의를…….”
쿠구구…….
슬슬 회담이 마무리되려던 그때.
회담장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던 뭔가가 빛나기 시작했다.
“…웨이 포인트?”
빛이 터져 나오는 건 다름 아닌 웨이 포인트 석판.
아까 연합의 수장들이 공간 도약을 쓰느라 사용했던 웨이 포인트였다.
저게 빛난다는 건…….
“…뭔가 넘어온다!”
이미 웨이 포인트를 쓸 사람은 다 썼다.
여기서 또 공간 도약을 한다는 건, 초대 받지 않은 무언가가 나타나려 한다는 뜻.
“모두 전투 준비!”
“대열을 갖춰라!”
이내 이변을 눈치챈 이들이 서둘러 대열을 정비했다.
“전하! 피하십시오!”
“으음! 그, 그래!”
웨이 포인트가 빛나자 기사단들은 서둘러 그들의 주인을 에워쌌다.
그리곤 마치 합이라도 맞춘 듯, 견고한 벽을 웨이 포인트 주변으로 형성했다.
자그마치 여섯 왕국의 기사단이 만든 진형.
웨이 포인트 주위로 여섯 개의 진형이 검을 뽑아 들고 자셀 취했다.
모두 적을 향해 언제라도 검을 휘두를 수 있도록 살기 등등한 눈빛을 내뿜었다.
‘대체 누구지?’
주인공 녀석은 아닐 거다.
녀석이라면 공간 도약을 하는데 웨이 포인트가 필요 없을 테니까.
그렇담 녀석을 따르는 놈들 중 하나란 건데.
왜 굳이 이런 위험한 상황에 공간 도약을 하려는 걸까.
‘오히려 잘됐다.’
누군진 모르겠다만, 지금 내 앞길을 막을 놈들 중 하나라면 차라리 지금 처치해 버리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꿀꺽.
파아앗……!
난 마른침을 삼킨 채 웨이 포인트의 빛이 사그라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나타난 건.
내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