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다른 왕국의 수장들과는 달리 기사단장조차 대동하지 않은 남자.
그도 공간 도약이 신기하긴 한 듯 눈썹을 씰룩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호오.”
마흔 후반의 그리 젊지 않은 나이.
대전쟁 때 전성기였던 녀석이니 따지고 보면 에런골드 2세와 동년배다.
하지만 따로 뭘 챙겨 먹기라도 하는지 얼굴만 놓고 보면 서른 초반 같았다.
한쪽으로 넘긴 짧은 머리 덕에 전형적인 미중년의 표본 같았다.
생긴건 멀쩡한 놈이지만.
방심해선 안 된다.
그저 재밌을 것 같다는 이유만으로 흑마법을 익힌 놈이니까.
그러면서도 제 몸은 끔찍이 아껴서 악마들에게 영혼을 파는 짓 따윈 하지 않았다.
여러모로 주의해야 할 인물이다.
“…아이소테르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이글렌은 그런 페이라를 향해 짧게 고갤 까딱였다.
그녀의 인사에 페이라가 잠시 멍하니 이글렌을 바라봤다.
“…아!”
그리곤 마치 오랜만에 조카라도 만난 것마냥 활짝 미소 지었다.
이글렌의 손까지 부여잡고 흔들어 대기까지 했다.
“그쪽이 아이소테르의 새로운 주인이구만!”
“그, 그렇습니다.”
당황한 이글렌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빼려 했다.
하지만 페이라는 대전쟁 당시 검술 랭크 6이었던 자.
확실히 알려지진 않았지만, 내가 알기론 지금도 검술 랭크 7은 된다.
‘그래서 기사단장도 대동하지 않고 온 거지.’
그런 녀석의 손아귀를 이글렌이 떨쳐 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턱.
“반갑습니다. 피스트의 주인이시여.”
난 그런 녀석의 팔을 낚아챘다.
손끝을 타고 꽤나 우악스런 힘이 느껴졌지만, 나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최후의 봉인석을 지니고 있는 한, 난 과거 전성기 시절의 힘을 발휘할 수 있으니까.
“…호오.”
우뚝 멎은 팔에 페이라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만. 혹시 아이소테르엔 주인이 둘이었나?”
“…이분은 제 반려. 이안 임페라 공작입니다.”
묘한 신경전이 오가는 가운데 이글렌이 대신해서 중재하고 나섰다.
공작이면 그래도 왕에 준하는 귀족.
피스트의 국왕이란 지위로 찍어 누르려던 페이라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아아. 얼마 전 새로 반려를 맞이하셨다더니. 그게 이분이로군요.”
“그렇습니다.”
짧게 대답하자 페이라의 눈썹이 꿈틀댔다.
하지만 녀석도 내 힘을 느꼈는지 더 이상 시비를 걸진 않았다.
“…하하! 내 오랜만에 아리따운 여인을 봤더니 살짝 지나쳤나 보군요.”
“괜찮습니다. 회담에 나오신 지 꽤나 오랜만이시라 들었는데. 그럴 수도 있지요.”
“흐음…….”
페이라는 은근히 긁는 듯한 말투가 신경 쓰이는 듯했지만, 역시나 별다른 말은 없었다.
“그럼. 이만 자리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입.”
페이라는 그렇게 피스트 국왕을 위해 마련된 회담 자리로 돌아갔다.
“저 친구. 성격 많이 죽었구만.”
녀석과 묘한 신경전이 오가던 와중에 익숙한 노인이 한마디 거들었다.
분명 백발이 형형한 늙은 노인이었지만, 풍선처럼 부푼 근육이 부자연스레 느껴졌다.
“…탈리스 님.”
무투왕 탈리스.
그도 프란츠 왕국의 주인 자격으로 이번 회담에 참가했다.
프로스트 랜드 탓인지 몰라도 요새 단련을 다시 시작했다곤 들었는데.
지난번 화합의 섬에서 봤을 때랑은 완전 딴판이었다.
그때 당시엔 다 늙어 가는 노인의 모습이었다면, 지금은 전성기 모습을 어느 정도 따라잡고 있었다.
‘괜히 무투왕이 아니란 건가.’
“백작… 아니, 공작님!”
그런 그의 곁엔 익숙한 얼굴이 하나 더 있었다.
“아아. 투린 왕자님.”
프란츠의 왕자이자, 탈리스와 프레이야 사이에서 나온 하프 드래곤.
녀석도 탈리스마냥 꽤나 달라진 모습이었다.
의젓해졌다고 해야 하나?
누나인 유르의 보호 아래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였던 녀석이었는데, 지금은 키도 제법 커지고 체격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남달랐다.
“오랜만이군요.”
“오랜만이에요!”
투린은 활짝 웃으며 반갑게 인사했다.
현재 프란츠의 기사단장 자리는 공석이다.
그야 녀석은 화합의 섬에서 난리가 났을 당시, 나단 공작의 편에 들었으니까.
때문에 새로운 기사단장을 물색 중이긴 했지만, 지금은 투린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일반인들보다 월등히 강한 랭크, 용혈 랭크.
아마 지금의 투린이라면 웬만한 기사단장들과 견주어도 모자람 없을 거다.
“누나도 오고 싶어 했는데… 아무래도 셋 모두 왕국을 비우긴 어려울 것 같더라구요.”
“으음. 그렇군요.”
투린의 말에 잠시 잊고 있던 장면이 떠올랐다.
드래곤 폼으로 변신했다가 그만 변신이 풀려 그대로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 버린 일이 있었다.
“…….”
“그래서. 신혼의 즐거움은 잘 느끼고 있는가?”
잠시 멍하니 생각에 빠져 있는데 탈리스가 한마디 했다.
“…네?”
“흐흐! 농담일세!”
“흠흠.”
“그리고. 행여나 내가 저번에 말했던 제안. 혹시라도 생각 있으면 언제든 말해 주고.”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흐흐. 그런가?”
탈리스가 능글맞은 눈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잘 지내는 것 같으니 다행이다.
“…그런데 말일세. 내게 서신으로 했던 말. 그게 사실인가?”
“…네.”
“허어…….”
탈리스는 당황한 듯 침음을 흘렸다.
그에게 보냈던 서신은 다름 아닌 오늘 회담의 주 안건.
흑마법 랭크의 합법화.
아무리 탈리스가 대전쟁 이전의 사람이긴 해도, 지난 수십 년간 금지 되었던 랭크를 합법화한다는 건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지난번에 제게 해 주셨던 약속. 기억하시죠?”
“으음. 그거야 그렇다만…….”
탈리스는 쉽사리 내릴 수 없는 결론인 듯 잠시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이내 고갤 훌훌 털더니.
“에잇! 그래. 내 무투왕이란 이름을 걸고 한 입으로 두 말 해서야 쓰겠나?”
탈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우악스런 손길에 골이 울릴 정도였다.
“…고맙습니다.”
“그럼. 이따 회담 때 보자고.”
“넵.”
탈리스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자릴 떴다.
그런 그의 뒤를 따라 투린도 함께 손을 흔들었다.
“후.”
이렇게 두 표는 확보됐고.
남은 건 회담이 시작되고 나서 확인해 볼 일이다.
* * *
페이라가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침내 연합 회담이 시작됐다.
지금껏 연합 회담은 화합의 섬에서 열리는 게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호위 병력도 몇 없이 기사단장과 정예들만 대동하는 게 그간의 관례.
왕립 기사단 전부를 대동하고 열린 회담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연합의 미래가 바람 앞의 등불 같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
수백의 기사들이 한자리에 모인 연합 회담.
이들의 눈빛엔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혹시모를 대참사를 막기 위해 기사단을 대동한 거긴 했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괜한 짓일 수 있었다.
지금 이 회담 자리에 모인 이들만 모두 처치해 버린다면, 라크레시아의 탈을 쓴 주인공 녀석의 앞길을 막을 수 있는 건 없으니까.
“…그럼. 첫 번째 안건부터 진행하겠습니다.”
회담을 주최한 이글렌이 첫 번째 안건을 꺼내 들었다.
주목적은 흑마법 랭크의 합법화지만, 그 외에도 자잘한 안건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난 이글렌의 반려 자격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회담 자리에 참석해 있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는…….”
자잘한 안건에도 연합의 수장들의 의견은 첨예하게 대립했다.
각 왕국의 무역품 관세부터 시작해서, 군비 관련된 내용도 주를 이뤘다.
다행히 별다른 마찰은 없었지만.
“…그럼 이제 마지막 안건을 진행하겠습니다.”
결국 마지막 안건이자 이번 회담의 주 목적이 드러나고 있었다.
꿀꺽.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곤 연합 수장들의 반응을 살폈다.
“…흑마법 랭크의 합법화에 대한 안건입니다.”
“…뭐라?”
“그, 그게 무슨 소리요! 흑마법 랭크를 합법화한다니!”
이글렌의 말을 듣자마자 위셀란과 도라스의 수장이 제 귀를 의심하듯 되물었다.
이글렌은 침착히 그들을 진정시켰다.
“거부감을 느끼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하지만 대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흑마법 랭크는 제대로 된 울타리 안에 존재하던 랭크입니다. 라크레시아를 무찌르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하는 지금…….”
“그게 무슨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흑마법사들이 얼마나 악랄한 자들인 줄 알고!”
격하게 반대하고 나서는 두 수장.
한창 감정이 격해지려는 가운데 탈리스와 눈이 마주쳤다.
“…….”
싱긋 미소 짓는 탈리스.
그리곤 그는 굳게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난 찬성이라오.”
“뭐, 뭣이! 프란츠의 주인이시여! 그게 지금 무슨 소립니까!”
“틀린 말은 없지 않소? 애초에 내 젊었을 적엔 흑마법사들도 자유로이 흑마법을 쓰고 살았소. 사실 흑마법 랭크가 불법이 된 것도 ‘그 흑마법사’가 연합에 반기를 드는 바람에 그런 것 아니오?”
“그, 그건…….”
“지금은 그런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일 때가 아니라오. 한 줌이라도 더 힘을 모아 싸워야 할 때. 그런 와중에 옛 감정에 취해 귀한 힘을 낭비할 생각이오?”
“으음…….”
탈리스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둘은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면서 신성 왕국의 주인에게 구원의 눈빛을 보냈다.
히테라 주신을 섬기는 녀석들이라면 흑마법을 반대해 주지 않을까 하고.
“크흠.”
하지만 그 전에 신성 왕국의 국왕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처음엔 놀라 눈이 휘둥그레진 녀석이었지만, 나와 눈이 마주치곤 고민에 빠진 듯 고개를 떨궜다.
주에른 4세는 지난 수십 년간 신성 왕국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지주나 다름없었다.
그런 자에게 은혜를 입힌 게 바로 나다.
그런데 거기에 반대를 하겠다는 건 녀석의 입장에서도 달갑지 않았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신성 왕국의 주인은 우물쭈물거리며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었을 땐.
“…전 중립표를 던지겠습니다.”
“허어!”
이로써 찬성 2, 반대 2, 중립 1로 표가 갈렸다.
남은 건 단 한 남자.
피스트 왕국의 주인, 페이라 피스트 엘칸토.
그에게 달려 있었다.
“흐음.”
다들 저마다의 생각이 담긴 눈빛이 페이라를 향해 쏘아졌다.
“난…….”
페이라의 입이 열리려는 순간.
“잠시만요.”
“…응?”
난 회담 한가운데 끼어들어 흐름을 막았다.
페이라가 지금 흑마법 랭크를 보유하고 있단 건 확실했다.
하지만 페이라라면 그런 이유만으로 흑마법 랭크를 합법화하려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저 재밌을 것 같아 흑마법을 배운 녀석이라면, 불법인 상태에서 몰래 흑마법을 익히는 게 더 재밌을 수도 있으니까.
때문에 녀석의 구미를 당길 만한 게 필요했다.
그건 바로.
‘준비 다 됐나?’
[네!]
품 속에 있던 자그마한 통신용 마법구.
거기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회담장 한가운데에 선 난 통신용 마법구를 향해 작게 속삭였다.
‘지금이야.’
[넵!]
쿠드드득!
그러자 별안간 땅바닥이 갈라지기 시작하더니, 큼지막한 균열을 뚫고 뭔가가 튀어나왔다.
지면을 뚫고 튀어나온 건, 다름 아닌 구울 한 마리였다.
“으악!”
“구, 구울이다!”
위셀란과 도라스의 수장이 구울을 보곤 혼이 빠져라 소리쳤다.
동시에 주위에 있던 수많은 기사단장들이 검을 뽑아 들고 구울에게 달려들었다.
“잠깐!”
그 가운데 크게 소리치자, 기사단장들의 검이 구울의 코앞에서 멈춰 섰다.
구울은 검을 마주한 채로 멋쩍게 미소 지었다.
[아하하…….]
“구울이…….”
“웃어……?”
구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와이트 킹, 리겔.
이를 본 페이라의 눈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