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페이라 피스트 엘칸토.
대전쟁 당시엔 2왕자로 왕위 후계 서열에서 밀리던 놈이다.
하지만 대전쟁 당시 1왕자가 전사해 버린다.
괄괄한 성격이었던 1왕자는 선발대를 따라 전장의 선봉대에 선다.
셀리버트의 엘프들과 피스트의 선봉대가 합쳐진 선발대.
그때까지만 해도 둘 사이는 좋았다.
하지만 카잔 제국 병사의 눈 먼 화살에 죽어 버린 1왕자.
그의 죽음은 허무하기 그지없었지만, 그 여파는 꽤나 어마어마했다.
뒤늦게 2왕자가 이끈 원정군은 선발대에서의 비보를 전해 듣는다.
그의 죽음으로 원정군은 폭력의 명분을 얻었다.
제국의 영토를 유린하고 약탈해도 된다는 권한.
하지만 이도 결국 실패하고 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잔 제국이 항복을 해 버렸으니까.
아직 분노를 채 표출해 보지도 못한 원정군.
그들은 결국 분노의 화살을 애먼 데로 돌린다. 다른 누구도 아닌 함께 전장에 선 셀리버트의 엘프들에게로.
단 하루 만에 셀리버트의 엘프들은 끔찍한 일을 겪게 된다.
이 모든 걸 허락한 녀석은 다름 아닌 현 국왕.
페이라 피스트 엘칸토.
‘미친놈이지.’
당시 연합은 그래도 제정신 박힌 놈들이라 당연히 페이라의 비행을 손가락질한다.
덕분에 왕위 후계 서열에서 완전히 나락으로 갈 뻔했지만, 놈이 더 미친 짓을 하는 바람에 상황은 완전히 역전된다.
당시 아이소테르의 전범 재판소에 구금 중이던 페이라.
그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재판소에서 탈출한다.
그리곤 휘하의 기사들을 이끌고 강화 회담 중인 카잔 제국으로 향했다.
일단은 제국이 항복 의사를 표명하긴 했지만, 제국이 끝까지 항전한다면 연합 입장에서도 골치 아팠기에 적당한 강화 회담으로 끝내려 했다.
하지만 페이라는 그런 제국의 황성에 쳐들어가 모두를 죽인다.
어린 아이부터 늙은 노인까지 하나 빼지 않고 모두.
그리곤 카잔 제국의 주인, 황제를 납치해 연합에게 가져다 바친다.
이 모든 게 가능했던 건 그의 광증만큼이나 강력했던 검술 랭크에 있었다.
그렇게 카잔 황제까지 납치해 온 덕에, 대전쟁은 끝이 난다.
당연히 대전쟁을 끝낸 당사자가 처벌을 받을 순 없을 노릇.
덕분에 셀리버트 대숲림에서 그가 벌인 범죄 행위는 자연스레 묻히고 만다.
거기에 대전쟁을 끝낸 전공 덕에 차기 국왕 자리까지 꿰찼으니.
여러모로 대단한 놈이다.
“후.”
“긴장되십니까?”
상념에 빠져 있는 내게 프리아나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딱히.”
“흐흐. 긴장될 법도 하죠. 연합의 수장님들이 모이는 자리인데.”
“…….”
솔직히 연합의 수장들쯤이야 별 걱정 안 된다.
하지만 프리아나는 내가 괜한 센 척이라도 하는 줄 아는 듯 날 다독였다.
“…그래서. 녀석들은 언제쯤 오려나?”
“이제 곧 올 겁니다. 공작님께서 공간 도약용 마핵을 나눠 주셨으니. 지금쯤 다들 저마다 본국에서 준비는 끝냈겠군요.”
“흐음.”
이번 연합 회담이 열리는 곳은 다름 아닌 아도르네이 후작령.
처음엔 화합의 섬에서 만날까 했지만, 라스하겐의 흑마법사들을 부르려면 아도르네이 후작령이 나았다.
카잔 제국의 옛 영토와 맞닿아 있는데다가 후작령이면 그래도 제법 끗발 있는 영지니까.
“빨리 준비를 마쳐라! 곧 사절단이 도착할 거다!”
아도르네이 후작령 광장에 마련된 웨이 포인트.
웨이 포인트 자체야 대륙 곳곳에 남아도는 녀석이다.
적당한 웨이 포인트 하나를 챙겨 잠시 이곳에 가져다 놨다.
그 주변에선 아도르네이 후작이 바쁘게 사람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온갖 화려한 꽃들로 장식까지 해 가며 손님 맞을 준비에 바빴다.
“고생이 많구만 그래.”
“고…맙습니다. 이안 임페라 공작님…….”
아도르네이 후작의 이마에 핏대가 불룩 솟았다.
연합 회담이 자신의 영지에서 열린다는 건 여러모로 귀찮은 일이었다.
괜히 손님 대접에 문제라도 있었다간 크나큰 망신이 될 테니까.
“준비는 잘 되고 있나요?”
아도르네이가 바삐 움직이고 있는 와중에 누군가 다가왔다.
화려한 제복을 입은 아이소테르의 주인, 이글렌이었다.
“허억……!”
날 노려보고 있던 아도르네이 후작이 황급히 눈에 힘을 풀었다.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 전하! 아이소테르에 누가 되지 않도록 혼신을 다해 준비 중입니다!”
“호호. 그래요. 이 은혜는 잊지 않도록 하죠.”
“은혜라니요……. 말씀만으로도 황송할 따름입니다.”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후작의 모습에 이글렌이 고소한 듯 눈웃음 지었다.
그도 그럴게 녀석은 갈렌을 몰아낼 당시 중립을 표방했다.
미친왕 갈렌에게 영지가 난장판이 되고 있는 와중에도, 뒤에서 재고만 있던 녀석이니 이글렌 입장에선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대놓고 깔 순 없어도 이런 식으로 골탕 먹이고는 싶었을 거다.
쿠르르…….
그렇게 한창 손님 맞을 준비가 한창인 그때.
아도르네이 후작령 근처로 지축을 흔드는 듯한 소음이 들려왔다.
“왔군.”
저 멀리 각 왕국의 문양이 새겨진 깃발이 나부꼈다.
총 다섯 개의 깃발.
연합 왕국의 기사단이 먼저 오고 있었다.
“기사단은 따로 오는가 보군요.”
깃발을 본 프리아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지 뭐. 기사단 병력까지 한번에 공간 도약을 할 순 없을 테니까.”
공간 도약이 마나가 아닌 용혈을 쓴다곤 하지만.
기사단 병력을 전부 한번에 옮기기는 어려웠다.
때문에 일반 기사단들은 걸어서 오고, 기사단장만 대동하곤 수장들은 공간 도약으로 넘어오기로 했다.
“흐응…….”
이글렌은 각 왕국의 기사단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일단 상황은 상황인지라 기사단장만 대동하고 연합 회담에 참가하는 건 위험했다.
만에 하나 라크레시아가 그 틈을 노리고 습격이라도 했다간, 굉장히 끔찍한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때문에 이번 회담엔 각 왕국의 정예 병력들까지 대동하고 오기로 했다.
그런 상황이라 어쩔 순 없지만.
아이소테르의 여왕인 이상 타 왕국의 기사단이 들이닥치는 건 그리 달갑지 않았다.
“금방 끝날 겁니다.”
“그래야죠.”
각 왕국의 기사단이 도착했으니, 슬슬 녀석들도 등장 할 때다.
난 품 안에서 통신용 마법구를 꺼내 들었다.
“아아. 쿠스켈. 들립니까?”
[오오. 잘 들린다네.]
이번 회담엔 자잘한 안건들이 등장할 테지만, 제일 중요한 건 흑마법 랭크의 합법화다.
이를 위해 라스하겐의 흑마법사들도 대동하기로 했다.
라스하겐에 들른 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그간 꽤나 많은 변화가 있었다.
쿠스켈의 아들이자, 구울들의 왕.
와이트 킹 리겔.
녀석의 힘 덕에 포르겔은 다시금 평화를 되찾았다.
뿐만 아니라 남은 마공작 2명도 제압에 성공했다.
르델이 없는 상황인지라 시간이 좀 걸릴 듯했지만, 와이트 킹이란 강력한 힘 앞에 다른 마공작의 영지도 평화를 되찾았다.
“도착하려면 얼마쯤 걸릴 것 같습니까?”
[으음… 이제 막 지르하겐 지방을 통과했으니. 곧 도착하겠군.]
지르하겐이면 아도르네이 후작령 바로 위다.
순찰대엔 이미 말해 놨으니 이대로 쭉 내려오기만 하면 도착이다.
“그래요. 국경선 넘어올 때쯤 말해 주십쇼.”
[그래. 내 그럼 다시 연락하겠네.]
달칵.
버튼을 누르자 마법구의 화면이 꺼졌다.
화면이 꺼지기 무섭게 마법구가 얕게 떨려 왔다.
우우웅.
달칵.
다시 버튼을 누르자 익숙한 얼굴이 나왔다.
얼굴에 옅게 주름이 잡힌 중년의 남성.
기사왕 카이세리우스였다.
“무슨 일이지?”
[후후. 일은 잘 진행되고 있나 해서 말이지.]
“별 문제 없다. 연합의 기사단도 도착했고, 이대로 회담만 진행되면 끝이지.”
[흐음. 연합의 수장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라. 거기에 누군가 들이닥치기라도 하면 큰일이겠군.]
“…누군가?”
[가령 연합에 의해 몰락한 기사단의 주인이라든가.]
“…….”
[푸흐흐. 농담이야.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카이세리우스는 재밌다는 듯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농담이긴 하겠지만 살짝 쫄긴 했다.
다른 녀석도 아니고 기사왕이라면 회담을 난장판으로 만들기 충분하니까.
하지만 일단은 녀석들과 동맹인 상황이다.
카이세리우스가 원하는 건 카잔 제국의 복권이 아닌, 영겁의 기사단의 존속.
아직까진 나와 대립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럼. 그쪽이 말한 대로 얌전히 대기하고 있지.]
“…고맙구만.”
[후후.]
카이세리우스는 조소를 흘린 채 통신을 종료했다.
주인공 녀석을 막기 위해선 하나라도 힘이 더 필요했다.
다행히 카이세리우스는 그런 내 맘을 아는지, 별다른 반항 없이 내 제안에 응해 줬다.
지금 녀석을 비롯한 영겁의 기사단은 회담 장소 근처에서 잠복 중이다.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생기면 이를 막기 위해 나서 줄 거다.
“…….”
이제 준비는 다 끝났다.
남은 건 기다리는 것뿐.
다시 통신용 마법구를 품 안에 집어넣었다.
아도르네이 후작령까지 걸어온 기사단은 어느새 후작의 안내에 따라 임시 막사에 들어섰다.
먼 길 오느라 고생 했을 이들은 잠시나마 막사에서 여독을 풀었다.
먼저 도착한 기사단은 총 다섯.
아이소테르의 적갑 기사단까지 해서 다섯이다.
남은 하나는 페이라를 주인으로 둔 왕국, 피스트뿐.
이글렌은 살짝 떨리는지 옆에 선 내 손을 꼭 잡았다.
만에하나 그가 이번 회담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여러모로 골치 아파진다.
최악의 경우엔 녀석도 프로스트 랜드를 따라 주인공 녀석의 편에 선 걸 수도 있으니까.
“…저기 오는군요.”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피스트 왕국의 깃발이 나타났다.
하얀 장미를 내건 피스트 왕국의 문양.
그 아래 삐죽삐죽한 가시가 달린 독특한 모양새의 갑옷을 입은 기사단이 자리했다.
저 자들이 바로 피스트 왕국의 기사단.
장미 기사단.
아리따운 이름과는 달리 여러모로 뒤가 구린 놈들이다.
이글렌은 이들의 등장에 긴장을 풀지 않은 채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들 대부분은 셀리버트에서 약탈을 일삼았던 놈들이다.
동맹국의 영토를 약탈한 질 나쁜 놈들이니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이리로 오시지요.”
아도르네이 후작은 그런 그들을 조심스레 안내했다.
장미 기사단 녀석들도 별다른 문제를 만들고 싶진 않았는지 잠자코 후작의 안내에 따랐다.
이내 아도르네이 후작의 안내에 따라 막사로 들어서자, 비로소 왕국 연합의 모든 기사단이 회담 장소에 도착했다.
파아앗……!
연합의 이들이 모두 도착하자, 비로소 아도르네이 후작령에 가져다 놓은 석판이 빛을 발했다.
내가 공간 도약을 쓸 줄 안다는 건 이미 대륙 여기저기에 소문났다.
자이겔론드엔 공간 도약용 마핵을 가져다 팔 정도였지만, 아직 연합의 사람들에겐 상용화가 덜 된 기술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써 보라 한 거지.’
이번 회담에 참석하는 이들에겐 공간 도약용 마핵을 공짜로 나눠 줬다.
빨리 회담을 진행하려는 것도 있었지만 이들을 새로운 고객으로 만들려는 이유도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왕국의 주인이 공간 도약을 써 보면, 다른 녀석들도 쓰고 싶어 안달이 날 테니까.
파아앗…….
이내 빛이 사그라들며 연합의 수장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옆엔 왕국의 기사단장을 대동하곤 멍한 얼굴로 주윌 두리번거렸다.
“서, 성공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다들 하나같이 반응이 똑같았다.
처음 공간 도약을 쓰는 터라 속이 메스꺼워 보이긴 했지만, 이 짧은 순간에 먼 거리를 이동했단 게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아이소테르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오오… 아이소테르의 주인이시여…….”
어안이 벙벙해 있던 이들은 이글렌을 마주하자 활짝 미소 지었다.
난 그런 그들의 옆에서 조용히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이내 다른 연합의 수장들이 모두 도착했다.
남은 건 피스트의 페이라 국왕뿐.
파아앗.
모두가 저마다 자리에 착석할 때 즈음.
석판이 한 번 더 빛나기 시작했다.
‘왔군.’
그리고 그 위로 한 남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