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그게… 뭐죠?]
마법구 너머에 있는 이글렌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은은한 빛을 내뿜는 보석 같아 보일 거다.
하지만 두 눈 크게 뜨고 자세히 보면.
빛나는 건 보석이라서가 아니라, 돌멩이 빼곡히 적힌 룬 문양 탓인 걸 알 수 있을 거다.
자그마한 글자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돌멩이.
거대한 우로하콘에 적혀 있던 걸 이 자그마한 돌멩이에 옮기려다 보니 그럴 수 밖 없었다.
“이게 바로 최후의 봉인석입니다.”
[최후의 봉인석……!]
그 말에 다들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요. 원래는 좀 크기가 큰 놈이었지만… 어떻게 하다 보니 이렇게 자그마한 놈으로 변했죠.”
“어떻게 하다 보니……?”
이를 들은 카이세리우스가 미간을 좁혔다.
게다가 우로하콘은 우로스에서 보물로 여겨 오던 봉인석.
그런 녀석을 대뜸 가져와 놓고도 별 감흥이 없어 보이니 이상할 만했다.
“그래. 원래 최후의 봉인석. 그러니까 어인들이 우로하콘이라 부르며 애지중지하던 보물이었지. 그걸 둘로 나눠 하난 내가 가지고 있고 다른 하나는 어인들의 왕국에서 잘 보존 중이다.”
“호오.”
“그렇다는 건… 이 자그마한 돌멩이가 파괴되면 금제라는 게 풀린다는 건가요?”
이스바르트가 믿기 어렵다는 말투로 물었다.
고작해야 조막만한 돌멩이에 이 세상의 운명이 걸려 있다니.
“당분간은 그럴 거다. 봉인석엔 자가수복 능력이 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다른 봉인석들도 원상태로 복구되겠지만… 적어도 1년은 더 걸릴 일이지.”
“그 안에 그 돌멩이가 부서진다면…….”
다들 그 여파를 상상하고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서 가지고 온 거다. 천길 바닷속에 숨겨져 있는 것보단 내가 직접 가지고 돌아다니는 게 안전할 테니까.”
“그런가?”
카이세리우스는 내게 물어보면서도 크로드를 향해 눈빛을 보냈다.
크로드는 고맙게도 고갤 끄덕이며 내 생각에 동의해 줬다.
“…일단 알겠다.”
카이세리우스는 크로드가 저렇게까지 나서자 어깨를 으쓱하곤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그럼 이제 어쩌죠? 공작님께서 계속 들고 다니실 생각이신가요?”
“일단은 그래야지.”
“으음. 라크레시아 그자가 언제 공작님을 노릴지 모르는데… 계속 들고 있는 건…….”
이스바르트가 제법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라크레시아의 탈을 쓴 주인공 녀석.
그 녀석이 언제 날 노리고 기습해 올지 모른다.
다른 봉인석들이 회복될 때까지 언제까지고 최후의 봉인석을 들고만 있을 순 없었다.
만에 하나 잠깐이라도 방심한 사이, 녀석의 습격에 최후의 봉인석이 파괴되어 버릴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건 지금 내 상태를 모르고 하는 말이었다.
“…….”
최후의 봉인석에서 흘러나오는 어마어마한 양의 마나.
이는 마를 줄 모르는 거대한 폭포수마냥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 방대한 양의 마나는 그대로 내 단전을 향해 스며들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날수록, 단전의 마나는 계속해서 늘어날 거다.
어쩌면 지구에서의 전성기, 혹은 그 이상의 힘까지 발휘할 수 있었다.
이 말인즉, 이번만큼은 시간은 내 편이었다.
주인공 녀석도 지금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을 터.
녀석은 조만간 움직임에 나설 거다.
최후의 봉인석을 깨부술지, 아니면 이대로 패배해 버릴지.
“이글렌. 지금 왕국들의 상황은 어떻죠?”
[으음… 그게…….]
이글렌은 골치 아픈 질문을 받은 듯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연합은 총 여섯 개의 왕국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이소테르, 도라스, 위셀란, 프란츠, 신성왕국, 피스트.
프로스트 랜드는 나단 공작의 탈주 선언과 함께 북부에 조용히 틀어박혀 있었다.
[일단 연합 회담에 새로운 안건을 준비 중이긴 해요.]
“새로운 안건이라면…….”
“흑마법 랭크의 합법화겠죠.”
[…맞아요.]
프로스트 랜드가 빠져 버린 지금.
어떻게서든 전력을 모으기 위해 흑마법사들과 손을 잡기로 했다.
카잔 제국의 옛 영토에 둥지를 튼 흑마법사들.
와이트 킹까지 가세한다면 제법 큰 전력이 될 거란 건 분명했다.
하지만 대전쟁 이후 20년 넘게 금지되어 있던 흑마법.
그런 연합법에 반기를 들고 흑마법 랭크를 합법화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이소테르의 귀족들은 별 말 없습니까?”
[으음. 다행히 귀족분들 중에 반기를 드는 이는 없었어요. 아도르네이 후작이 조금 꺼림칙해하긴 했지만. 이안한테 공작위를 준 이후로 조용히 있는 걸 보면 암묵적으로나마 동의할 생각인 듯해요.]
“으흠.”
여왕의 절대적인 우군이자 새로운 공작.
그런 상황이다 보니 어중띤 귀족들은 차마 반기를 들 생각도차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글렌의 아버지는 에런골드 2세다.
귀족들간에 내란을 부추기면서까지 왕권을 강화시켰던 왕.
덕분에 애초부터 이글렌에게 대놓고 반기를 드는 귀족은 없었다.
‘이런 걸 선견지명이라고 해야 하나, 새옹지마라고 해야 하나.’
뭐가 됐건 나나 이글렌한테는 좋은 이야기였다.
“그럼. 문제되는 건 연합의 수장들이군요.”
[…네.]
“흐음…….”
연합의 수장들이 과연 흑마법 랭크 합법화에 동의를 해 줄까.
“그 부분에 대해선.... 제가 살짝 말씀드려도 될까요……?”
긴 생머리의 여인이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이스바르트였다.
“그래.”
“그… 일단 이걸 봐주세요.”
이스바르트는 좀처럼 남들 앞에 나서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다.
그래서 그런지 얼굴을 붉힌 채 우물쭈물거렸다.
부산스레 탁자를 가득 채울만한 종이를 가져온 그녀는,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연합의 이름을 크게 적어 나갔다.
“우선… 지금 연합은 총 여섯 왕국이죠?”
“그렇지.”
“그… 덕분에 변수가 하나 생겼어요. ‘연합법 11조 3항. 연합법 개정엔 연합의 일원 중 과반수 이상이 동의해야 한다.’”
“그…런 게 있지.”
법에 관해선 문외한이라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고갤 끄덕였다.
“그럼 새로운 안건이 통과하려면 몇 명의 동의가 필요할까요?”
“음…….”
과반수라.
왕국이 7개였을 땐 별 고민이 필요 없던 사항이었다.
4명만 동의하면 자연스레 소수 의견은 묵살됐으니까.
하지만 6왕국이면 다르다.
3명이 동의를 해도 반대가 3명이면 동률이다.
“그럼 똑같이 4개 왕국이 동의를 해야 하나?”
“아니죠! 저희가 필요한 건 4개 왕국의 동의가 아니에요.”
“으음……?”
그럼 뭐가 필요한 걸까.
내가 묻기도 전에 이스바르트가 슬쩍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3개 왕국의 동의와. 1개 왕국의 중립이에요.”
“…오호.”
그럼 3:2:1로 과반수가 되긴 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통신용 마법구 너머의 이글렌이 물었다.
“일단 아이소테르는 안건을 제시한 왕국이니 동의로 간주하고. 프란츠 왕국도 동의를 해 줄 것 같군.”
프란츠의 왕, 무투왕 탈리스.
그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편에 서 주겠다고.
이글렌이 들었다간 다소 기분 나쁠 수 있는 발언이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선 고마울 따름이었다.
“신성왕국은… 좀 애매하군.”
교황청은 전 교황 주에른 4세가 직접 내게 은혜를 입었다며 고마워했다.
신성 왕국만큼 교황청의 입김이 강한 왕국도 없으니.
아마 이번 안건에 반대를 하진 않을 거다.
하지만 신성 왕국이란 입장 상 안건에 동의까지 하긴 어려울 테고.
중립표를 던지는 게 그나마 그럴듯하지 않을까.
난 신성 왕국의 이름 옆에 세모 표시를 했다.
다음으로 시선이 향한 건 도라스와 위셀란.
아쉽지만 이 둘에게서 동의를 얻기란 어려울 거다.
대전쟁 당시 흑마법사들에 의해 가장 많은 피해를 보기도 했고, 연합이란 이름 아래 묶여 있긴 해도 서로 견제가 오가기도 했으니까.
“그럼 이 둘은 어려울 것 같고…….”
남은 건 피스크 왕국뿐이다.
다들 거기까진 생각했는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난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피스트 왕국의 이름 옆에 동그라미 표시를 했다.
“…어?”
[이안! 지금 뭐하는…….]
“뭐하긴요. 승률 예측하고 있죠.”
[그럼 더더욱 조심스럽게 예측해야…….]
이글렌이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따지려다 말을 멈췄다.
그리곤 이내 뭔가 있단 걸 아는 듯 고갤 갸웃했다.
[무슨 뾰족한 수라도 있나요?]
그런 이글렌을 향해 프리아나가 살짝 끼어들며 한마디 했다.
“후후! 역시 공작님이십니다! 피스트의 국왕을 설득하실 만한 방법이…….”
“…그런 거 없는데?”
“…네?”
뚱딴지같은 대답에 다들 입을 벌린 채 날 쳐다봤다.
“혹시 제가 잘못 들은…….”
“아니. 피스트의 주인을 설득할 생각은 없다.”
미안하지만 방금 들은 게 맞다.
“그럼…….”
흑마법 랭크를 합법화하자는 아이소테르의 안건.
이를 통과시키기 위해선 피스트의 동의가 필요했다.
하지만 녀석을 설득시킬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피스트의 국왕 녀석. 흑마법사거든.”
“…네?”
내 말에 다들 눈빛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흑마법은 지금 당장은 연합법상 대역죄에 해당하는 큰 죄다.
그런데 연합의 수장이란 녀석이 흑마법사라니.
놀라는 게 당연했다.
당연히 이 세상 그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지만, 난 안다.
‘소설에서 봤으니까.’
이글렌의 오라비였던 미친 왕 갈렌.
녀석은 네크로노미콘의 힘을 빌려 흑마법사가 됐다.
그때 당시에도 연합의 수장들끼리 이런저런 말이 많았다.
과연 갈렌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하고 말이다.
수많은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그저 못 본 척하는 거였다.
‘그럴 것 같았지.’
내가 연합의 이런 행동을 예측한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저 소설에서도 한 번 그랬으니, 이번에도 그럴 것 같았을 뿐.
소설에서, 그러니까 시간상으론 지금으로부터 1,2년 후.
피스트의 주인이 가진 비밀이 까발려진다.
그 결과 피스트의 주인이 바뀔 뻔했지만, 결국 연합의 지원이 없었기에 흐지부지 끝나고 만다.
사실 소설을 보면서도 살짝 아쉬워했던 부분이다.
피스트의 현 국왕은 과거 2왕자였던 놈이고, 소설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건 3왕자 측이었으니까.
이제 와서 이런 말하기 뭐하지만, 과거 2왕자이자 현 국왕인 녀석은 미친놈이다.
그것도 갈렌 못지않은 미친 놈.
그 녀석 덕분에 셀리버트의 엘프들마저도 인간을 적으로 돌릴 정도였으니까.
따지고 보면 정의로운 3왕자가 악역 2왕자를 몰아나는 구도였지만, 세상사가 그렇듯, 정의롭다고 이기는 게 아니다.
이긴 놈들이 정의로운 거지.
‘아무튼.’
“그, 그게 정말이십니까! 피스트의 주인이 흑마법사라니!”
프리아나가 화들짝 놀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뭐 어때? 흑마법 랭크가 합법화되면 앞으로 자주 만나게 될 텐데. 흑마법사 하나 가지고 호들갑은.”
“하, 하지만…….”
“후후. 농담이야. 놀랄 만하지. 다른 녀석도 아니고 연합의 수장이란 녀석이 흑마법사란 건데.”
“끄응…….”
아직 믿기 어렵다는 듯 침음을 흘리는 프리아나.
뭐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피스트의 현 왕이 어떤 놈이 건 간에 지금은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주인공 녀석을 막기 위해 하나라도 힘을 더 그러모아야 할 때.
흑마법사인지 아닌지 가지고 따지며 낭비할 힘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화면 너머의 이글렌이 짧게 고갤 끄덕였다.
그리곤 결심을 다진 듯 나지막이 말했다.
[그럼. 연합 회담을 주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