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응?”
방금까지 난 우로하콘을 깨부수려 하고 있었다.
단순히 하는 척만 할 게 아니라 진짜 부술 생각이었다.
주신이란 모든 걸 초월한 존재.
같잖은 연기론 넘어가지 않았다.
때문에 뭔가가 날 막지만 않았더라면 우로하콘을 박살 냈을 거다.
“…….”
하지만 우로하콘을 향해 검을 내려치던 그 순간.
갑자기 사위가 변해 있었다.
“여긴…….”
방금 내가 있었던 곳은 우로스의 부화소.
미처 태어나지 못한 알들이 잔뜩 있는 곳이었다.
거기에 하늘엔 수많은 심해어들이 헤엄치고 다니던 별천지.
하지만 지금은 웬 시장 한복판에 서 있었다.
“쌉니다 싸요!”
시장 상인들로 활기가 가득한 시장.
그 한가운데 난 덩그러니 놓여졌다.
잠시 얼빠진 얼굴로 이들을 쳐다봤지만 시장 가득한 사람들은 날 본 체도 않고 저들의 할 일에 집중했다.
그러다 한 녀석이 내 어깨를 스쳐 지나갔다.
“…….”
다시 보니 아니다.
마치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것마냥 날 통과해 지나가는 사람들.
덕분에 금방 이게 현실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게다가 방금 날 통과해 지나간 녀석을 포함해서, 여기 있는 이들은 모두 양손이 깨끗했다.
랭크 시스템이 없음에도 차별이나 핍박 없이 평화롭게 세상은 돌아가고 있었다.
‘고대인들인가.’
아마 이 환상을 보여 주는 건 주신 녀석일 거다.
우로하콘을 파괴하려던 내게 그 여파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건지 알려 주려는 걸 거다.
“…으악!”
그러던 와중에 별안간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탈자다!”
‘이탈자?’
뭘 이탈했길래 별칭까지 붙이는 걸까 싶었지만, 소설을 읽은 덕에 금세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탈자.
세상의 규율을 벗어난 자.
지금은 없는 단어다.
고대인들이 살던 시대에 유행했던 말이니까.
“크하하하!”
저 멀리 이탈자 녀석이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폭주한 마나를 바탕으로 무차별적인 폭격을 가하는 녀석.
그 바람에 주변 시장 상인들이 다진 고깃덩이로 전락해 버렸다.
운 좋게 살아남은 이들은 다친 상처를 부여잡은 채 도망쳤다.
“…젠장!”
“경비대는 뭐하는 거야!”
뒤늦게 제복을 입은 녀석들이 이를 막으러 나섰다.
맹렬한 접전 끝에 이탈자 녀석을 사살하는 데 성공은 했지만, 이미 수많은 이들이 다치고 죽어 버린 뒤였다.
“크윽…….”
부상자들은 침음을 흘리며 괴로워했다.
따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다친 이들은 모두 한마음일 거다.
더 이상 이탈자로 인해 고통 받지 않는 세상을 원한다고.
“…….”
주변 환경은 다시금 빠르게 지나쳐 갔다.
마치 영상에서 원하는 부분만 골라 보듯, 이번엔 희한하게 생긴 건물로 들어와 있었다.
하얀 페인트로 덧칠되어 있는 방.
그 안은 지금껏 봐 왔던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꾸며져 있었다.
마치 현대 지구의 연구실 모습에 가까웠다.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뭔갈 바라보며 이야길 나누는 과학자들.
그들은 연구 데이터를 보며 만족스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제 곧 완성된다.”
“더 이상 이탈자에 의해 고통 받는 세상은 끝이다.”
그런 유리창 너머엔 한 어린 소년이 앉아 있었다.
뼈만 앙상히 남은 채 비쩍 말라 소년인지 소녀인지 구분도 안 가는 외형이었다.
오랜 기간 관리를 못한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과 누더기에 가까운 옷.
그런 녀석의 온몸엔 괴랄한 호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저 녀석인가.’
녀석을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 아이는 고대인은 아니다.
그렇다고 현생 인류를 대변하는 녀석도 아니다.
최초의 인조 생명체.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현생 인류의 시작.
그리고.
“히테라. 넌 이 세상의 희망이다.”
과학자들은 진이 빠진 채 추욱 늘어진 아이를 보며 한목소리로 말했다.
‘히테라 주신.’
저 아이가 바로 이 세상의 기원.
랭크 시스템을 만든 녀석이다.
파아앗!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아이의 몸에 매달려 있던 호스가 터져 나갔다.
긴급 경보가 울리고 제압 병력이 투입됐지만, 고대인들의 모든 힘이 모인 아이를 이길 수 없었다.
이내 아이가 한 발짝 내딛자, 주변 모든 것들은 먼지가 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주변을 파괴하는 것이 아닌, 모든 걸 소멸시켜, 마나의 근원인 마소로 만들고 있었다.
이후 히테라를 막기 위해 고대인들은 모든 역량을 동원했다.
하지만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을 뿐이다.
히테라가 한 발짝 내딛을 때마다 고대인들의 찬란한 문명은 마소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뒤늦게 녀석을 막는다는 게 불가능하단 걸 깨달은 고대인.
녀석들은 저마다 살길을 모색하려 발버둥 쳤다.
이게 고대인들이 절멸해 버린 이유고. 과정이었다.
먼 과거엔 오베론급 마법사들이 심심찮게 등장했다.
이들은 모두 약속했다는 듯 주변을 파괴시켜 나갔다.
이따금 정신을 차린 녀석들이 있긴 했지만, 계속된 파괴에 고대인들은 지키고 말았다.
그 결과.
차라리 자신들의 자유를 조금 내어주는 대가로 안전을 보장 받고 싶었다.
더 이상 이탈자들로 고생하는 세상이 아니라.
정해진 틀 안에서 행복하게 살길 원했다.
‘그 결과가 이거지.’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절멸해 버린 고대인.
그렇게 재창조된 세상은 히테라에 의해 재구성됐다.
주신 히테라, 달의 악신 셀렌.
이 모든 건 그저 하나의 존재였다.
뿐만 아니라 결투의 여신이니 대지의 여신이니 하는 모든 것들은 결국 단 하나의 존재.
지금 눈앞에 웅크리고 있는 저 어린아이였다.
“…….”
이윽고 모든 게 사라지고 세상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로지 방금 연구실에서 본 비쩍 마른 어린아이뿐.
“…반갑구만.”
이 세상에 처음 왔을 땐 내가 녀석과 직접 마주할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그래서 그런지 왠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넌… 누구야?]
웅크린 어린아이가 내게 물었다.
“…이안 임페라다.”
녀석에게 짧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녀석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자그마한 체구에 조막만한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흐음. 아닌 것 같은데.]
“…….”
주신이란 존재답게 이미 내 모든 걸 꿰뚫은 듯 녀석은 고갤 가로저었다.
“…이진수다.”
과거 대한민국이란 나라에 살던 소시민.
십수 번의 대격변 끝에도 살아남았지만 결국 아사한 남자.
그의 이름을 읊조리자 히테라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반가워! 다른 세계에서 온 녀석은 처음 보네!]
“…그런가.”
어린 아이에 걸맞는 천진난만한 미소였지만, 함부로 속단하기엔 일렀다.
겉모습마냥 하는 짓도 애나 다름없는 녀석이니까.
히테라교가 수많은 주신들을 섬기는 건 복잡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
다신교 신앙은 보통 다른 부족과 유대감을 형성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번개의 신을 섬기는 부족과 대지의 신을 섬기는 부족.
그런 부족들이 모이고 모여 다신교가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구에서의 상식.
고대인의 절멸 이래로 생긴 현생 인류는 애초부터 부족 간에 차이 같은 게 없었다.
인간이면 인간. 엘프면 엘프.
저마다 섬기는 존재가 달랐다.
그럼에도 다신교란 게 생길 수 있었던 건, 신이라는 것들이 뜬구름 잡는 전설들이 아닌, 모두 실체가 있는 놈들이어서다.
마물을 아끼는 마음과 인간을 아끼는 마음이 갈라져 셀렌교와 히테라교를 만들었고.
그 안에서 전쟁을 원하는 감정과 평화를 원하는 감정이 갈라져 두 주신을 만들었다.
그저 감정을 느끼는 것만으로 주신들을 만드는 절대적인 존재.
지금 눈앞의 어린 아이 같은 히테라는, 사실 하나의 존재이면서도 수많은 주신들로 분화된 녀석이다.
감정 그 자체로 분화한 주신.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한 가지 감정밖에 모르는 존재는 히테라 주신 말고도 딱 하나 더 있다.
‘그냥 애기들이 그렇지.’
어찌 보면 수만 년을 군림해 온 주신임에도 아이의 모습을 띄고 있는 건, 이런 이유도 상당 부분 차지하고 있을 거다.
지금이야 말 잘 듣는 순한 어린아이 같은 상태지만.
조금이라도 다른 감정을 끄집어내는 즉시, 전혀 다른 모습을 띌지도 모른다.
오베론이나 주인공 녀석 따윈 한순간에 가루로 만들어 버릴 어마어마한 존재.
난 숨 죽여 녀석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서 이진수. 여기까지 온 이유는 뭐야?]
“…협상을 하러 왔다.”
[혀어업사앙?]
“…거래를 하자는 거다. 서로 윈윈 할 수 있…….”
[협상이 무슨 말인지는 나도 알아.]
“…그렇담 다행이군.”
행여나 녀석이 삐져 버린 건 아닐까 조심스레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아직 표정을 보니 그 정도는 아닌 듯했다.
[흐음… 이계에서 왔다 해도 나한테 협상이라니.]
“…….”
난 숨 죽여 눈치를 살피는 한편,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물어라.’
누구한테 기도한 건진 모르겠다만.
기도 끝에 응답이 들려왔다.
[…재밌겠다! 나한테 협상을 시도한 사람은 처음이야. 다들 눈물 흘리면서 부탁만 하던데.]
“…그런가?”
히테라는 재밌다는 듯 헤실헤실 웃었다.
쓸 만한 장난감을 마주했다는 듯 미소 짓는 녀석.
여전히 의중을 알 수 없는 놈이지만 일단 협상의 첫 단추는 끼웠다.
[그래서. 나랑 하겠다는 협상이 뭐야?]
“그건…….”
난 생각을 정리하곤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이 나오기도 전에, 히테라는 재밌다는 듯 손뼉을 치며 좋아라 했다.
[그거 대단한데! 진짜 재밌겠어!]
“…그래?”
아직 말도 안 했는데 내 속마음을 읽곤 저렇게 말하는 걸 거다.
[그럼. 그 대가는 뭐야?]
“대가라.”
[협상을 하자고 했잖아? 내가 들어주는 게 있으면, 너도 뭔갈 하나 해 줘야겠지.]
“…그랬지.”
히테라 주신과의 거래라면 대가로 뭐가 적당할까.
내 목숨?
사실 그건 녀석에게 그다지 필요 없을 거다.
억만금을 가져다준다 해도 그건 똑같을 테고.
그렇다면 녀석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걸 거래 대상으로 내걸어야 했다.
“…이 세상이다.”
[…뭐?]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 이 세상을 멸망에서 구원해 주겠다.”
[…….]
내 말에 히테라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아마 주에른이 살아 있었다면 거품을 물고 쓰러지지 않았을까.
다른 녀석도 아니고 주신한테 이런 제안을 하다니.
녀석이라면 이깟 세상쯤 얼마든지 파괴하고 재창조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어린아이의 마음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녀석에게서 이 세상은 놀이터다.
아주 심혈을 기울여 만든 완벽한 놀이터.
때문에 이런 세상을 부수고 새로 만든다는 건, 주신으로서 가장 원치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카잔 황제가 망한 거고.’
모든 걸 아는 녀석이었지만 히테라 주신에 대해선 잘 몰랐다.
주신이 직접적으로 세상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건 알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주신 스스로가 만든 규칙.
이를 파괴하려는 순간 주신은 개입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오베론이 나타나게 된 거고.
난 지금 녀석에게 거래를 하자는 거다.
내게 힘을 주는 대신, 주인공 녀석을 막아 이 세상을 지켜 주겠다고.
잠시 동안 녀석과 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히테라의 입꼬리가 하늘로 치솟았다.
[좋아.]
파아앗……!
녀석의 대답과 동시에 사위가 환하게 빛났다.
정신이 돌아오자 오러를 가득 머금은 황혼이 우로하콘을 때리려 하고 있었다.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으읏……!”
황급히 검을 거두려 했지만 이미 검선의 끝에 우로하콘이 맞닿아 있었다.
…콰앙!
이내 크나큰 굉음과 함께 둘이 격돌했다.
하지만 우로하콘은 이 정도론 부서질 생각이 없다는 듯 손쉽게 공격을 튕겨 냈다.
순식간에 몸이 붕 떠 버린 난 그대로 뒤로 한참을 나뒹굴었다.
“어엇……!”
콰르르……!
눈앞이 핑핑 돌았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자 곁에 아에곤이 달려와 손을 내밀었다.
“괘, 괜찮으십니까!”
“으윽…….”
“흥. 멍청하긴.”
크로드는 꼴사납게 바닥을 내뒹군 내게 조소를 흘렸다.
하지만 괜찮다.
내 검을 받아 낸 우로하콘은.
이미 두 동강 나 버린 상태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