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일단 일어나세요.”
“아아…….”
아에곤은 짧은 탄식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검은 눈자위 덕에 잘 보이진 않았지만, 아마 그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두 눈이 붉게 충혈됐을 거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러는 거지?”
크로드는 눈물을 글썽이는 아에곤에게 퉁명스럽게 물었다.
딱히 적의는 없을 거다.
워낙에 쌀쌀 맞은 녀석이다 보니 그냥 내뱉는 말투도 저런 거지.
“그게…….”
아에곤은 눈을 꼭 감곤 지난 날 있었던 일들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오늘로써 딱 닷새째 되는 날입니다. 그자를 만난 건.”
“그자라면… 하얀 머리에 곱상하게 생긴 남자였나요?”
아에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처럼 우로스 주변을 순찰하던 중이었습니다. 제 친구 서펜티와 함께 말이죠.”
서펜티.
아에곤이 사역한 킹 서펜트의 별명이다.
조금은 귀여운 이름이지 않나 싶다.
나름 암컷 킹 서펜트니까 그럴 만하다고 봐야 하나.
“그러던 중. 녀석을 만났습니다.”
녀석이라.
이 대목이라면 분명 주인공 녀석을 말하는 걸 거다.
“…그자는 홀로 우로스 주변을 표류하고 다니더군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깊은 심해를 향해 가라앉고 있었습니다.”
“으음.”
“처음엔 그저 당신들과 같은 지상에서 온 손님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우연히 풍랑을 만나 길을 잃은 줄 알았죠.”
“…….”
길을 잃었다라.
어찌 보면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도움을 주려 다가갔던 순간. 그자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때 전, 수백 년, 아니 난생처음으로 어떤 감정이 느껴지더군요.”
“…공포.”
처음 아에곤을 마주쳤을 때.
녀석과 눈을 마주쳤을 때 뭔가 이질적인 감각을 느꼈다.
대충 뭔지는 알았기에 가만히 있긴 했지만, 그건 나름 스킬이었다.
‘교감.’
일종의 서큐버스가 쓰는 꿈합성과 비숫한 작용을 하는 스킬이다.
어인들만이 쓸 수 있는 스킬로, 대상의 감성을 읽어 악인인지 선인인지 구분하곤 했다.
아에곤이 우릴 처음 마주했을 때 순순히 들여보내 준 이유가 바로 이 스킬 덕분이었다.
그걸 다른 녀석도 아니고 주인공 녀석한테 썼으니.
끔찍한 경험이란 건 안 봐도 뻔했다.
“…그걸 공포라는 짧은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만… 어쨌건 다신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녀석과 만나고 어떻게 됐습니까.”
아에곤은 상상만으로도 감정에 동요가 이는 듯 두 손을 벌벌 떨었다.
“그자가 말하더군요. 앞으로 열흘. 그 후에 우로하콘을 파괴하러 오겠다고. 다른 백성들마저 휘말리게 만들고 싶지 않다면, 우로스를 버리고 떠나라고.”
“그런…….”
아에곤이 날 만나고 뭔가 애매한 반응을 보였던 게 이해가 갔다.
난 아에곤에게 한 가지 궁금했던 걸 물었다.
“이 사실. 다른 우로스의 분들도 알고 계십니까?”
아에곤은 착잡한 얼굴로 고갤 가로저었다.
“…모릅니다.”
“…역시.”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아에곤과 다른 어인들의 반응이 영 딴판이었으니까.
“열흘의 시간을 주겠다 그랬다면… 이젠 닷새 남았단 소리겠군요.”
“…그렇지요.”
지난 5일간 아에곤은 어디 말도 못한 채 끙끙 앓고 있었을 거다.
우로하콘을 버리고 우로스를 떠나라던 녀석의 경고.
그걸 우로스의 어인들에게 말했다간 엄청난 혼란이 뒤따를 테니까.
싸우자는 어인들과 공포에 휩싸인 어인들.
거기에 주인공 녀석을 마주한 건 어디까지나 아에곤뿐이다.
뭣도 모르는 어인들 대부분은 싸우자고 나설 테고.
또 나머지 대부분은 그냥 무시해 버리자고 나올 거다.
하지만 주인공 녀석의 힘을 마주한 건 어디까지나 아에곤뿐.
소설에서 라크레시아는 모든 어인들이 보는 앞에서 킹 서펜트를 제압하는 걸 보여 준다.
덕분에 어인들이 혼비백산하며 두 갈래로 나뉘게 되지만.
지금은 달랐다.
아무리 설득하려 해도 어인들은 이해하지 못할 거다.
어쩌면 수백 년간의 세월 끝에 아에곤이 미쳐 버린 거라 생각할지도 모르고.
벌써부터 우로스가 어떻게 될지 골치가 아파 왔다.
‘그게 주인공 녀석이 원하는 거였을 테고.’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었나?”
잠자코 듣고 있던 크로드가 끼어들어 한마디 했다.
하기야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당시 주인공 녀석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상태.
킹 서펜트와 협공해 본다면 어찌어찌 비벼 볼 만도…….
“그러려고 했지만… 서펜티가 꿈쩍도 안 하더군요. 아니, 못하는 거였겠지만요.”
“허…….”
소설에서 본 바론 아에곤은 사역 랭크 8이다.
그런 녀석이 다루는 킹 서펜트라면 지느러미 하나하나까지 완벽히 제어할 수 있었을 터.
그런 상태의 킹 서펜트를 제압했다는 건…….
“…그럼 상대도 사역 랭크를 익혔다는 건가? 심지어 당신보다도 더?”
아에곤은 분한 표정을 한 채 고갤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흥.”
크로드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소설 속 라크레시아는 블루 드래곤 프레이야를 권속으로 부릴 만큼 강력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고대인의 유물의 힘을 빌려 가능했던 일.
녀석도 킹 서펜트를 마음대로 부릴 순 없었다.
킹 서펜트가 아닌 아에곤을 협박해 우로하콘을 파괴하려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 우로하콘을 파괴하려는 건 라크레시아가 아닌 이 소설의 주인공.
여러모로 라크레시아보다 까다로운 녀석이었다.
‘하긴. 오베론마저 이긴 녀석인데 킹 서펜트 따위 하나 제압 못할까.’
문득, 난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대안은 없었다.
주인공 녀석은 이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 테니까.
“절망적이구만.”
아에곤의 이야길 들은 난, 짧은 감상평을 늘어놓았다.
나도 모르게 내뱉어 버린 말이었지만, 아에곤은 예상했다는 듯 눈꼬리를 추욱 늘어뜨렸다.
“그런…….”
“그게 단가?”
“…응?”
절망에 빠져 있는 내게 크로드가 한마디 했다.
“지금 상황이 절망적이란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럼. 그게 끝인가? 네놈의 말대로 절망적인 상황인건 맞지만. 고작 그딴 소릴 하려고 이 먼 바닷속까지 온 건가?”
“…아니지.”
“그럼 뭐라도 해 봐라. 지금껏 네놈이 그랬던 것처럼.”
잔뜩 날이 선 말투였지만, 왜인지 모르게 마음에 위안이 되는 것 같았다.
난 나도 모르게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
작게 웃음을 터뜨리곤, 지금껏 해 왔던 것처럼 이 절망을 빠져나갈 방법을 떠올려 보려 애썼다.
“…….”
차분히 마음을 진정시키고 주인공 녀석이 원하는 게 뭘지 떠올렸다.
녀석이 원하는 건 이 세상의 멸망하는 것 그 자체가 아니다.
이 세상이 멸망하려는 순간.
그걸 막기 위해 나타날 녀석을 기다리는 거지.
‘내가 원하는 건 한 여자다.’
얀 공작이란 가명을 쓰고 있던 녀석.
그게 주인공 녀석과의 첫 대면이었다.
녀석이 원하는 한 여자라는 게 누군지는 뻔했다.
‘타르옌.’
최후의 전투에서 희생당한 녀석의 하나뿐인 여자.
녀석은 지금 주신을 협박하려는 거다.
주신의 잘난 창조물들이 절멸하는 걸 막고 싶다면 타르옌을 되살려 내라고.
‘…미친 놈.’
그게 가능할지 아닐지는 다음 문제다.
카잔 황제의 영혼과 뒤섞인 상태인 지금, 거기까지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여유는 없었으니까.
주인공 녀석이 제정신이었다면 절대 생각하지 못했을 짓이다.
주신을 상대로 협박을 한다니.
“…잠깐.”
순간, 꽤나 그럴싸한 생각이 떠올랐다.
어디까지나 그럴싸한 생각일 뿐이었지만.
충분히 해 볼 만한 도박이었다.
“…아에곤 님.”
“…네?”
침울해 있는 아에곤에게 물었다.
“만약 우로하콘이 파괴된다면… 이곳에 알들은 어떻게 됩니까?”
“그야…….”
아에곤은 주변에 가득한 어인들의 알들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수백 년간 우로스를 통치해 온 그였지만, 우로하콘은 고대인의 절멸 이래로 계속 존재해 온 녀석이다.
적어도 수만 년은 존재했던 우로스의 보물.
그게 없어지면 어떻게 될지는 아에곤도 잘 몰랐다.
“아마… 여기 있는 아이들이 제대로 부화하지 못하겠지요.”
“으음… 그렇겠죠?”
아에곤은 우로하콘 근처에 있는 알 하날 매만졌다.
허리깨에 올 법한 꽤나 알이 굵은 녀석이었다.
“아직 부화기는 아니라 3,4년 정도 더 있어야겠지만… 우로하콘이 없다면 부화가 가능할지조차 모르겠습니다.”
“흐음.”
우로스의 어인들은 십수 년마다 한 번씩 부화기를 갖는다.
그때마다 한 무더기로 알을 낳곤 우로하콘의 힘을 주입 받는 방식이었다.
난 아에곤을 따라 제일 커다란 알을 살펴봤다.
다시 보니 수박만 한 다른 알들과는 달리 거대한 게 뭐가 있는 녀석 같긴 했다.
“이 아이는… 아에곤 님의 알인가요?”
아에곤은 작게 고갤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부화하게 된다면, 알리샤란 이름을 붙여 주려 했지요.”
“알리샤라.”
소설에서도 나오는 녀석이다.
물론 그때까지도 알리샤는 부화하지 않았다.
부화를 대략 일주일 정도 앞둔 상태였으니까.
우로스가 나오는 건 어디까지나 소설의 최종장.
원래라면 우로하콘이 위협을 받는 건 3,4년 뒤의 일이다.
알리샤를 시작으로 하나 둘 부화하게 될 우로스의 어인들.
그런 상황에서 라크레시아의 협박을 받았으니, 아에곤의 고민이 얼마나 깊었을지 대충 상상이 갔다.
“3,4년.”
난 뭔가 꿍꿍이가 있는 놈마냥 혼자 중얼거렸다.
크로드와 아에곤은 그런 날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봤다.
뭔가 길이 있나 생각하는 눈치다.
‘없진 않지.’
하지만 그게 가능할지 아닐진 아직 모른다.
“…아에곤 님.”
“네?”
“지금부터. 전 도박을 하나 해 볼까 합니다.”
“…도박이요?”
“네. 어쩌면 이 상황을 타계할 묘수가 될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냥 헛짓거리가 될지도 모릅니다. 만약 후자의 경우라면, 묘수가 아니라 최악의 수가 되겠지만요.”
“그런…….”
“하지만 이 도박을 하려면 아에곤 님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
아에곤은 조용히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
아에곤의 협조.
라크레시아가 원했던 것처럼 협조가 필요한 도박이다.
그도 그럴 게 우로하콘엔 특별한 힘이 하나 있었으니까.
‘랭크 무효화.’
다른 봉인석엔 없었지만, 최후의 봉인석 우로하콘엔 특별한 힘이 존재했다.
그건 녀석에게 적의를 품는 순간, 대상의 마음을 읽어 랭크를 무효화 시키는 능력이었다.
때문에 라크레시아도 최후의 봉인석을 파괴하려 할 때, 아에곤의 협조가 필요했다.
아무리 라크레시아라 해도 우로하콘 앞에선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할 수 없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아에곤이 킹 서펜트를 불러낸다면, 우로스에도 큰 피해를 입히기야 하겠지만 우로하콘을 지킬 순 있었다.
‘그래서 아에곤의 암묵적인 협조가 필요했던 거지.’
그렇게 혼자 우로하콘을 파괴하려 낑낑대던 녀석은 주인공 일행에 의해 좌절되고 만다.
하지만 난 다르다.
주인공 녀석도 그렇고.
랭크가 무효화된다 해도 돌덩이 하나 부술 힘 정도는 남아 있었다.
“어떤 협조가 필요하시다는 건지….”
“별거 아닙니다.”
난 허리춤에 메어둔 검을 뽑아 들었다.
붉은빛을 잃은 채 평범한 검이 되어 버린 황혼.
이를 단단히 움켜쥔 채 아에곤에게 말했다.
“그냥. 가만히 계십쇼.”
“…네?”
“자세한 건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였지만, 이내 내 눈빛을 읽곤 작게 고갤 끄덕였다.
지금 난 그 누구보다도 주인공 녀석을 막고 싶었다.
그 마음을 읽어 낸 건지 몰라도 아에곤은 내 행동에 별다른 제지는 없었다.
차박.
황혼을 뽑아 든 채, 난 천천히 우로하콘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곤 녀석을 파괴해 버리겠다는 일념 하나만을 가슴에 새겼다.
…파아앗!
그러자 우로하콘의 룬 문양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으윽!”
거센 빛줄기가 몸을 덮쳐 오자, 정신이 아찔해졌다.
마치 왼팔이 잘려 나간 듯한 기분이다.
평범한 이 세계 사람이었다면 그대로 졸도해 버렸겠지만.
난 아니다.
반드시 저 봉인석을 부수겠다는 일념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었다.
주인공 녀석은 인간들에게 새겨진 금제를 파괴하는 게 목표다.
그리고 그건, 어디까지나 금제 뒤편에 숨은 ‘녀석’을 마주하기 위해서다.
금제가 풀어지는 건 녀석이 제일 원치 않는 거니까.
그래서 카잔 황제를 막기 위해 오베론이란 괴물을 만든 거고.
그렇다면.
나도 그러면 된다.
카잔 황제 때문에 수만 년간 숨어 있던 주신이 튀어나온 것처럼.
주인공 녀석이 주신을 불러내기 위해 발버둥친 것처럼.
고고한 존재라도 된양 금제 저편에 숨은 녀석을 끄집어낼 거다.
파아앗!
빛을 잃었던 황혼에서 무색의 오러가 터져 나왔다.
흉흉한 기세를 뿜어내는 오러 소드를 든 채로 우로하콘 앞에서 검을 힘껏 들어 올렸다.
‘이래도 안 나와? 독하다 독해.’
그럼 나올 때까지 해야지.
무색의 오러를 품은 황혼.
이는 우로스의 보물이자 최후의 봉인석.
우로하콘을 향해 내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