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한 남자가 길게 늘어뜨린 옷을 입은 채 다가왔다.
마치 물고기의 비늘을 연상시키는 하늘하늘한 재질의 옷.
매번 내딛는 그의 발자국에선 고풍스런 품격이 느껴졌다.
저자가 바로 우로스의 왕.
아에곤.
수백 년간 우로스의 왕으로 군림해 온 자.
하지만 어인이라 그런지 얼굴에 주름은 없었다.
피부를 절반쯤 뒤덮고 있는 비늘만이 그의 나이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줬다.
난 조심스레 그의 의중을 파악하려 애썼다.
사람은 보통 눈을 보면 그 의중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럼…….’
이를 위해 아에곤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칠흑처럼 검은 자위에 세로로 쭉 째진 누런 동공.
사람이 아니라 그런지 좀처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을 수가 없었다.
‘녀석들한테 내려진 사명대로라면 주인공 녀석의 반대편에 서는 게 맞긴 할 텐데.’
어인들에게 내려진 사명.
우로하콘을 지켜라.
요 근래에 태어난 녀석들에겐 조금 먼 이야기지만, 왕의 경우엔 달랐다.
매번 왕이 교체될 때마다 우로하콘에 대고 맹세하는 관습이 있으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우로하콘을 지키겠다는 맹세.
어찌 보면 그럴싸한 맹세지만, 사실 조금 모순이 있다.
우로하콘이 제대로 동작해야 어인들이 살 수 있는 반면, 어인들이 없다고 우르하콘이 파괴되는 건 아니니까.
‘소설에서도 그랬지.’
소설 최종장에서 최후의 봉인석을 파괴하려던 라크레시아.
녀석이 강한 건 맞지만, 우르하콘의 앞에선 그도 본래의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때문에 우로스의 왕. 아에곤의 협조가 어느 정도 필요했다.
당연히 아에곤이 이를 들어줄 리 만무했기에,
라크레시아는 우로스의 어인들을 인질로 삼는다. 어인의 절멸을 원치 않는다면 우로하콘을 내놓으라고.
그렇게 우로스는 두 갈래로 나뉜다.
어인들을 지킬지, 아니면 우로하콘을 지킬지.
최후의 순간.
아에곤은 어인들을 택한다.
그렇게 우로하콘이 반쯤 파괴되려던 순간, 주인공 일행이 이를 막는다.
결국 도망을 택한 라크레시아.
녀석은 최후의 유물이 숨겨진 밀실로 도망쳤고…….
‘그 뒤를 쫓다가 다 죽었지.’
이 세상에 처음 왔을 당시만 해도 몰랐던 사실.
주인공 일행은 거기서 최후를 맞이한다.
그 결과 미쳐 버린 주인공이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버린 거고.
“…….”
난 아에곤을 마주한 채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 이 순간.
아에곤은 어떤 선택을 할까.
또, 주인공 녀석이라면 아에곤의 협조 없이도 우로하콘을 파괴할 수 있지 않을까.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저 녀석이 여기 왕인가?’
한창 생각에 빠져 있는데 크로드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그럼… 어느 쪽이지? 저놈은?’
크로드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과연 아에곤은 누구 편일까.
주인공 녀석? 아니면 오랜 세월 그의 종족에게 내려진 사명의 편?
‘아직… 모르지.’
‘…흥.’
크로드는 대강 이해했는지 입을 이죽였다.
그러면서 아에곤의 주위에 선 병사들을 훑어봤다.
다른 어인들과는 달리 두터운 중갑을 차려입은 병사들.
이들의 손엔 뾰족한 삼지창이 하나씩 붙들려 있었다.
검이 아닌 삼지창.
거기엔 다 이유가 있었다.
일단 우로스 자체는 호흡이 가능한 대기가 있었지만, 어인들의 주된 싸움터는 이런 대기가 있는 땅이 아닌 바닷속이다.
검을 자유자재로 휘두를 수 없는 탓에 어인들은 검 대신 창을 택했다.
빠른 속도로 내지를 수 있는 창술 랭크.
그리고 주변 마물들을 통제할 수 있는 사역 랭크.
그 둘이 우로스에서 주류인 랭크였다.
그런 어인들 가운데서 하늘하늘한 옷을 입은 채 천천히 걸어오는 아에곤.
킹 서펜트를 사역할 만큼 강력한 사역술사일 뿐 아니라 소설에서 본 바론 녀석은 창술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 때문인지 비늘로 뒤덮인 그의 몸은 매우 다부졌다.
“반갑군요. 지상에서 온 자들이여.”
싱긋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는 아에곤.
아에곤도 일단은 어인이었기에 꽤나 호의적으로 다가왔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왕이시여.”
“후후.”
녀석의 미소에도 왠지 모를 거리감이 느껴졌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럼…….”
난 주변 사람들 눈칠 살피는 척 말했다.
이제부터 진지한 대화가 오갈 테니 적당히 자릴 비워 달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아에곤은 뜻밖의 대답을 늘어놓았다.
“지상에서 이곳까지 먼 길 오신 이유가 있으시겠지만… 그 전에 우로스를 잠깐이나마 소개시켜 드리고 싶습니다만.”
“…네?”
우로스를 소개시켜 준다고?
갑자기 그건 웬 뜬금없는…….
“오오… 전하께서 직접 이곳 우로스를 소개시켜 주신다니!”
“정말 영광이겠어요! 그렇죠?”
“…….”
다들 기대에 가득 찬 눈빛으로 우릴 바라봤다.
이러면 거절하기도 뭐했다.
거절하는 즉시 자기네들을 무시한 거라며 적대적으로 나올 녀석들이니까.
그런 상황에서 내가 내뱉을 수 있는 말은 정해져 있었다.
“…알겠습니다.”
* * *
우로스의 크기는 생각보다 컸다.
우릴 대접해 준 연회장은 우로스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을 뿐이었다.
그 너머로 들어서자, 어인들이 가득한 우로스의 풍경이 나타났다.
우로스는 고립되어 있긴 해도 하나의 왕국이다.
아니, 어쩌면 고립되어 있다 보니 일반 왕국보다 더 거대할 수밖에 없었다.
투명한 막 아래 보호되고 있는 우로스.
덕분에 우로스 안에서 밖을 내다보면, 하늘을 가득 메운 심해어들을 볼 수 있었다.
“…….”
잠시 넋이 나가 심해어들을 쳐다봤다.
강한 수압 탓인지 독특하게 생긴 녀석들이 많았다.
머리에 자그마한 빛구슬을 단 녀석부터, 제대로 입을 다물 순 있을지 궁금할 정도로 이빨이 삐죽삐죽 튀어나온 녀석들까지.
지상에선 볼 수 없는 녀석들이었다.
이따금 씨 서펜트 녀석들이 유유히 우로스 주변을 헤엄쳤지만, 지상에서 보던 놈들과는 달리 얌전하게 헤엄만 치고 있을 뿐이었다.
“어떠신가요. 우로스의 풍경은.”
“…멋지네요.”
이번엔 대충 둘러대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하늘을 헤엄치는 물고기라니.
거기에 건물들도 거대한 산호를 깎아 만들어 다들 모양이 제각각이었다.
그러면서도 일정한 규칙을 유지하고 있는 듯한.
인간이 흉내 낼 수 없는 건축 양식이었다.
한창 감상에 빠져 있는 내 옆에서 아에곤이 나지막히 말했다.
“지난 수백 년간 본 풍경이지만… 매번 볼 때마다 감사함을 느낄 정도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왕국을 통치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렇군요.”
“뭐 젊은 친구들한테 이런 말을 해 봤자 늙은이 티 내는 거냐는 말밖에 못 듣지만요.”
“흐흠.”
아에곤은 그렇게 말하며 푸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미소였지만, 그거랑 우로하콘을 지키는 거랑은 별개의 일이다.
평화의 왕 아에곤.
그게 녀석이 가진 또 다른 이름이다.
어쩌면 녀석의 이런 선한 심성 탓에 우로하콘이 파괴될 뻔한 거라 봐도 무방했으니까.
“…그래서. 아까 제가 한 말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으음. 우로하콘을 지키도록 도와주겠다던, 그 말 말씀이시군요.”
“…네.”
“흐음…….”
녀석은 여전히 뭔가 숨기는 듯 말을 아꼈다.
“일단 관람부터 계속하시죠.”
“…….”
녀석은 그렇게 말하곤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녀석이 향한 건 우로스 중앙에 위치한 거대 산호.
마치 셀리버트의 세계수마냥 거대한 가지를 뽑아낸 산호다.
언뜻 봐도 겉껍질이 아주 단단해 보였다.
아마 우로스에서 왕성으로 쓰이는 산호 같았다.
“들어오시지요.”
우린 잠자코 아에곤을 따라 거대 산호 내부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충성!”
아에곤을 보자마자 경례를 올리는 어인들.
녀석은 가볍게 고갤 까딱이곤 거대 산호의 지하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여긴…….’
소설에서도 읽어 본 곳이기에 대충 아에곤이 무슨 생각인지 예상이 갔다.
‘…언제까지 놈의 장단에 맞춰 줄 생각인가.’
‘금방 끝나니까 걱정 말어.’
‘으음…….’
크로드는 좀이 쑤시는 듯 침음을 흘렸다.
그런 그를 애써 무시한 채 아에곤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한참 동안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이윽고 내 키를 훌쩍 넘기는 거대한 문을 마주했다.
“여기서부터 자네들은 대기하게.”
“예!”
아에곤의 명령에 주변 병사들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이들의 가장 주된 업무는 아에곤을 호위하는 것.
아무리 아에곤이 가장 강력한 어인이라 해도 그건 좀 이상하긴 했다.
하지만 이 문 너머에 있을 그것들을 생각해 보면 그러는 게 당연했다.
스스슥…….
부드럽게 양쪽으로 입을 벌리는 거대한 문.
그 너머엔 노란 빛으로 빛나는 뭔가가 잔뜩 있었다.
“…알?”
지하 공동을 가득 채운 무수한 양의 알.
노랗게 빛나는 알들은 마치 보석처럼 영롱히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알들의 주위를 뒤덮은 뿌리.
이는 공동 한가운데 위치한 그것을 향해 모여들고 있었다.
“여긴…….”
“여기가 바로 우로하콘이 있는 곳이라네.”
한곳으로 모여든 뿌리를 향해 시선이 따라갔다.
그러자 거대한 바위 하나를 마주할 수 있었다.
복잡한 룬 문양이 가득 새겨진 거대한 바위.
매끈하게 다듬어져 있지 않고 투박한 외형이었지만, 그 외견과는 별개로 바위에 내포된 힘은 어마어마했다.
대충 봐도 우로하콘 주위에 소용돌이치는 마나는 드래곤 하트를 가볍게 뛰어넘고 있었다.
어쩌면 최후의 대격변 직후 지구의 마나와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어인들이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갖고 태어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어인들은 임신을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알을 낳고 이를 우로하콘의 힘으로 부화시킨다.
덕분에 갓 태어난 어인들조차 평범한 성인 남성의 힘을 뛰어넘고, 물속에서도 숨 쉴 수 있게 되는거다.
“아름답지 않나?”
아에곤은 우로하콘 주위에 가득한 알들을 보며 말했다.
생명을 사랑하고 어인들을 사랑하는 평화의 왕.
지금껏 그를 의심하고 있던 게 미안해질 정도였다.
그라면 이런 우로스를 잃고 싶지 않을 게 뻔했으니까.
그리고 그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뻔했다.
콰악.
아에곤은 거칠게 내 손을 잡아챘다.
비늘과 굳은 살로 가득한 아에곤의 두 손.
그가 지금껏 어떤 수라장을 걸어왔을지 느껴졌다.
그리고 그가 얼마나 이 세상을 지키고 싶어 할지 알 수 있었다.
난 천천히 그의 눈을 들여다봤다.
검은 자위에 누렇게 세로로 째진 동공.
인간인 내겐 조금 두렵게 느껴질 수도 있었지만, 그의 두 눈동자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그리고 아에곤은 목이 메이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부디 도와주시오. 지상에서 온 이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