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파앗!
공간 도약을 하자마자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살갗을 스쳤다.
차디찬 강풍이 몰아치는 바다.
그 위에 석판 하나만이 홀로 떠 있었다.
“…여긴?”
크로드는 난데없는 추위에 눈살을 찌푸렸다.
“어디겠어. 우로스지.”
“뭐라?”
“그럼 뭐. 어인왕국이 멀쩡한 땅 위에 있을 줄 알았어?”
“…흥.”
난 품 안에서 반지 몇 개를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체온을 유지시켜 주는 평온의 암석이 박힌 반지.
그리고 물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게 해 주는 호흡의 암석이 박힌 반지였다.
예전에 공간 도약을 처음 쓸 수 있게 됐을 때 여기저기서 그러모은 고대인의 유물들이었다.
“자.”
난 반지 두 개를 크로드에게 건넸다.
이미 활성화된 반지 두갤 보자 크로드의 눈썹이 꿈틀했다.
“얼어 죽기 싫으면 끼고 있으라고.”
“…….”
크로드는 조용히 반지 두 개를 엄지와 검지에 끼워 넣었다.
나도 따라 같은 반지를 손가락에 끼워 넣자, 이내 훈훈한 기운이 전신을 감쌌다.
후우웅.
몸이 후덥지근한게 추위를 어느정도 막아 줬다.
난 석판 위에서 팔을 허우적거리며 준비 운동을 시작했다.
“…뭐하는 거지?”
이를 크로드는 미친 놈이라도 보는 것마냥 쳐다봤다.
“원래 입수하기 전엔 이렇게 해야 안 다친다구. 너도 할래?”
“…….”
“싫음 말고.”
가벼운 준비 운동이 끝나고.
난 지체 없이 차디찬 바닷물을 향해 몸을 집어 던졌다.
푸르르…….
순간 차디찬 바닷물에 정신이 아찔해졌지만, 이내 반지에 담긴 힘이 이를 막아 줬다.
‘음.’
거기에 바닷물을 들이키자 물고기라도 된 것마냥 물속에서도 호흡이 가능했다.
잠시 기다리자 크로드 녀석도 따라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녀석은 똥고집답게 풀 플레이트 메일을 입은 채로 바닷속에 들어왔다.
저러다 가라 앉을 텐…….
우우웅.
크로드의 갑옷 등쪽에서 뭔가가 뿜어져 나왔다.
덕분에 추진력을 얻은 녀석은 무거운 갑주를 입은 상태에서도 둥둥 떠 있을 수 있었다.
‘마갑인 건 알았다만… 저 정도였나.’
내심 녀석이 허우적거리는 꼴을 기대했었는데, 뭔가 아쉬웠다.
‘뭘 그렇게 쳐다보는거지.’
물 속에서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뭐. 수영까지 할 줄 아는진 몰랐네 싶어서.’
크로드는 별 관심 없다는 듯 고갤 돌렸다.
녀석의 시선은 어두운 심해 쪽으로 향해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만이 존재 할 것 같은 깊은 바닷속.
그 안에서 뭔가가 올라오고 있었다.
‘뭐지?’
‘뭐긴. 먹잇감 먹으러 온 녀석들이지.’
쿠르르르…….
매섭게 기포를 뿜어 대며 올라오는 무언가.
바다의 주인 씨 서펜트 무리였다.
드래곤을 연상 시키는 거대한 몸집에 날카로운 이빨과 지느러미.
놈들은 갑작스레 등장한 먹잇감들을 향해 힘차게 헤엄쳐 올라왔다.
‘흡.’
일단 검을 뽑긴 했지만 움직임이 너무 둔했다.
이럴 땐 마법으로 제압을 해야 하나?
그럼 무슨 마법이 좋을까.
불 마법은 물속이니 안 될 테고, 전격 마법은 나나 크로드한테까지 피해가 갈 수 있어 안 된다.
그렇다면 빙결 마법으로 놈들의 움직임을 제압하고…….
‘비켜라.’
‘…응?’
마법을 준비하려는데 뒤에서 크로드가 어깨를 잡아당겼다.
그리곤 내 앞으로 헤엄쳐 나가더니 등 뒤에서 파산검을 꺼내 들었다.
이내 거대한 오러를 내뿜기 시작한 녀석의 거검.
녀석은 그렇게 흉흉한 기세를 내뿜는 검을 크게 휘둘렀다.
콰르르륵!
물속이라 그런지 괴랄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파산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오러는 거대한 파도처럼 씨 서펜트 무릴 집어삼켰다.
키에엑…….
물결을 타고 씨 서펜트들의 괴성이 울려 퍼졌다.
이내 크로드가 만들어 낸 파도가 잠잠해졌을 땐, 씨 서펜트 무리들은 다진 고기로 전락해 버린 뒤였다.
그 뒤로 자잘한 물고기들이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들었다.
‘워후. 대단한데.’
‘…앞장서라.’
‘크흐흐. 그래.’
크로드 덕분에 일이 편해졌다.
역시 몸이 나쁘면 머리가 고생한다더니.
자잘한거 신경 쓸 필요 없이 힘이 세면 장땡이긴 했다.
씨 서펜트 무리는 처치했으니 일단은 심해를 향해 쭉 내려가기만 하면 됐다.
물속이라 방향감각을 잡기 어려웠지만, 정신을 집중한 채 어두운 심연을 향해 계속해서 헤엄쳤다.
‘읍…….’
호흡과 체온은 그럭저럭 버틸 만했지만, 심해로 가라앉을수록 전신을 옥죄여 오는 수압은 그대로 전해졌다.
‘슬슬 나올 때가 됐는데.’
폐가 짜부라질 것 같았지만 단전의 마나를 끌어올려 어찌어찌 버텨 냈다.
뒤에 따라오는 크로드는 어떤가 해서 흘끗 쳐다봤다.
‘…….’
한 치의 표정 변화도 없이 꿋꿋이 내 뒤를 따라오는 크로드.
풀 플레이트 메일 덕에 수압으로부터 압박감이 덜 한 둣했다.
잠수복 느낌이라 해야 하나.
차라리 나도 하룬한테 하나 만들어 달라 할 걸 그랬나.
부그륵…….
‘…오.’
그렇게 계속해서 어둠 속을 향해 나아가는데.
커다란 공기방울 하나가 튀어 올라왔다.
슬슬 도착했다는 건데.
…부르륵!
어둠 속에서 무언가 요동쳤다.
누렇고 커다란 두 개의 동심원.
직경만 해도 내 키를 훌쩍 넘을 정도로 거대했다.
처음 저걸 보면 뭔가 싶을 거다.
어둠 속에서 누렇게 빛나는 뭔가를 마주한 거니까.
하지만 난 안다.
저건 다름 아닌 눈이다.
점차 가까워지자 녀석의 얼굴이 점차 뚜렷한 윤곽을 드러냈다.
어인들의 왕국, 우로스를 지키는 수호자.
씨 서펜트들의 상위종이자 녀석들의 왕.
킹 서펜트.
씨 서펜트만 해도 상당히 덩치 큰 마물에 속한다.
하지만 그런 놈들의 왕으로 군림하는 녀석답게, 방금 본 씨 서펜트들이 새끼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웬만한 건물만 한 크기의 얼굴.
이 세상 어부들에겐 전설이 하나 있다.
저 깊은 바닷속에 존재한 심연.
이는 심연이 아니라 마물의 비늘 한 조각일 뿐이라고.
녀석이 분노할 때마다 거센 파도가 이는 거라고.
틀린 말은 아니다.
킹 서펜트의 몸집은 웬만한 영지 규모로 거대하니까.
녀석이 우로스의 위에서 또아리를 튼 덕에 지금껏 우로스가 숨겨져 있을 수 있었던 거기도 했고.
킹 서펜트가 마음만 먹는다면 위셀란을 해양 도시로 만들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수호룡 보로스가 봉인석을 지키는 게 임무였듯, 킹 서펜트의 임무도 우로스를 지키는 거다.
녀석이 위셀란을 쑥대밭으로 만들거나 파도를 일으킬 일은 없었다.
거대한 킹 서펜트의 얼굴이 점차 가까워졌다.
집채만 한 녀석의 머리통은 어쩌면 드래곤마저 한입에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문득 킹 서펜트랑 드래곤이 싸우면 누가 이길지 궁금해졌다.
아무리 드래곤이라도 심해에서 싸우는 거라면 킹 서펜트가 이기지 않을까.
‘이건 또 뭐지.’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뭔가 반짝였다.
‘…설마?’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돌려보니 크로드 녀석이 파산검에 오러를 집중시키고 있었다.
‘자, 잠깐! 아직 이 녀석이 적인지 아닌지 모른다고!’
‘…흥.’
크로드는 내 외침에 겨우 오러를 거뒀다.
덕분에 잠시 움찔했던 킹 서펜트였지만, 녀석은 이내 우리 둘에게 말했다.
[[email protected]#&!]
‘으음…….’
고막을 때리는 듯한 불협화음이 들려왔다.
수만 년간 고립된 세상에서 살던 녀석들이라 그런지 언어 자체가 완전 달랐다.
내가 눈살을 찌푸리자 녀석은 알았다는 듯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리곤 머릿속으로 전언이 흘러 들어왔다.
[지상인이 이곳까지 무슨 일이지.]
다행히 전언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지상인.
어인들이 인간들을 부를 때 쓰는 말이었다.
텅 비어 있는 킹 서펜트의 두 눈동자.
그 너머에 은은한 푸른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놈을 사역한 건가.’
소설로 보긴 했지만 실제로 마주하니 섬뜩했다.
이만한 마물을 사역할 수 있다는 건, 적어도 사역 랭크 8은 되는 괴물이란 거니까.
어인 왕국 우로스는 다른 랭크보다 사역 랭크가 발달한 왕국이다.
심해에 사는 마물들을 다스리기 위해서였다.
마법이야 제약이 많고, 육중한 수압에서 검을 휘두르기란 어려우니까.
오죽하면 킹 서펜트를 사역 할 줄 아는 자만이 우로스의 왕좌에 오를 수 있을 정도였다.
‘내 목소리. 들리나?’
[그래. 말해 보거라, 지상인이여.]
킹 서펜트, 정확히는 그 너머에 녀석을 사역하고 있는 녀석에게 말했다.
‘우린 최후의 봉인석을 지키러 왔다.’
[…최후의 봉인석?]
녀석은 봉인석이란 말에 무슨 뜻인지 이해 못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거대한 킹 서펜트의 머리가 빙그르르 돌며 거센 물살을 일으켰다.
‘으읏… 그 있지 않나? 노랗고 거대한 보석.’
난 소설 속에서 본 그대로 녀석에게 물었다.
[…아, 설마 우로하콘을 말하는 건가?]
우로하콘.
우로스의 보물이라는 뜻이다.
수만 년간 어인들이 지켜 온 우로스의 보물.
그게 왜 지켜야 하는 건지는 녀석들도 잘 몰랐다.
그저 선조부터 대대로 지켜야 하는 거니 지키는 것일 뿐.
하지만 우로하콘의 존재만으로 우로스에 방대한 양의 마나가 유지된다는 건 알았다.
녀석들 입장에선 꽤나 고마운 존재인 셈.
그걸 지키러 왔다는 말이었지만, 당연히 의심이 뒤따랐다.
[우로하콘을 지키러 왔다니. 그 마음만큼은 갸륵하나 지상인들의 도움 따윈 필요 없다.]
‘그래? 내가 알기론 벌써 다른 봉인석들은 다 파괴됐는데. 이제 우로하콘이란 것도 조만간 파괴될 것 같고.’
[흥. 우로하콘은 우리들의 철통같은 보호 아래 지켜지고 있다. 그러니…….]
바아앙……!
‘…말이 안 통하는군. 역시 베어 버려야…….’
참다못한 크로드가 파산검에 오러를 불어넣었다.
‘에잇. 잠깐 기다려 보래도.’
‘…….’
…바앙.
크로드는 다시금 파산검에 응집된 오러를 거둬들었다.
난 차분히 킹 서펜트를 설득했다.
‘잘 생각해 보라고. 최근에 뭔가 수상쩍은 일 같은 건 없었나? 우로하콘이 파괴되는 건 우리 지상인들 입장에서도 절대 피하고 싶은 일이라 그러는 거다.’
[으음…….]
골똘히 생각에 잠긴 킹 서펜트.
보아하니 무슨 일이 있긴 했었나 보다.
이럴 땐…….
‘으윽……!’
[…으응?]
난 느닷없이 가슴을 부여잡고 고통스런 신음을 내뱉었다.
그 모습에 킹 서펜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으윽… 오랫동안 잠수해 있다 보니 숨이…….’
[…….]
‘빠, 빨리 숨을 쉴 수 있는 곳으로 가야…….’
난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물속에서 팔딱거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난 녀석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폈다.
[…….]
킹 서펜트는 이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빠, 빨리… 일단 들여보내 주고 얘길 들어 봐도 될 거 아냐……?’
[…알겠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재촉하자 녀석이 하는 수 없이 고갤 돌렸다.
녀석이 심해 속에서 틀고 있던 또아리를 풀자, 그 아래 숨겨져 있던 왕국.
우로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
반투명한 돔 안에 위치한 우로스에선 밝은 빛을 심연 한가운데서 뿜어 대고 있었다.
거대한 산호를 파내어 만든 듯한 성.
그 안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안에선 공기가 통하는지 빛이 살짝 꺾이는 것처럼 보였다.
[자세한 이야긴 들어오면 듣지.]
‘으윽… 고, 고마워.’
소설에서 본 대로 숨넘어가는 연기를 보여 주자 킹 서펜트 너머의 녀석은 별 말 없이 길을 터 줬다.
멍청하거나 마냥 착해서 그런 건 아니다.
긴 세월 바닷속 왕국에서 살아온 어인들의 자신감.
만에 하나 무슨 수작을 부린다 해도 처치해 버리면 그만이라는 거다.
게다가 놈들 입장에선 지상인 둘이 느닷없이 나타난 거니 신기하기도 할 테고.
푸르륵…….
킹 서펜트가 또아리를 풀자 거센 소용돌이가 일기 시작했다.
그 흐름에 몸을 맡기자, 나와 크로드는 우로스를 향해 빨려 들어가듯 휩쓸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