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고맙군.”
“하지만 먼저 그 봉인석에 대해 자세히 얘기해 줬으면 한다만.”
“당연히 그래야지.”
카이세리우스는 꿍한 얼굴로 다시금 팔짱을 꼈다.
“대전쟁 이전. 황제의 명령으로 드래곤 한 마릴 잡은 적 있지? 위셀란의 외딴 섬에 있던 녀석 말이야.”
“…그렇다.”
녀석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고갤 끄덕였다.
녀석이 상대한 용은 사실 두 마리다.
무투왕 탈리스, 그가 프레이야를 처음 만났을 당시, 블루 드래곤 프레이야는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이는 다름 아닌 카이세리온의 작품이었다.
처음 검술 랭크 8에 도달했을 당시, 카이세리우스는 곧바로 프레이야에게 도전했다.
아슬아슬한 접전 끝에 승자는 결국 정해지지 않았다.
심각한 부상을 입은 프레이야.
그에 못지않게 카이세리우스 또한 사경을 헤맬 지경까지 갔다.
그렇게 눈덮힌 설산을 돌아다니던 카이세리우스.
죽음을 앞에 둔 상황에서 카잔 황제를 만났고, 둘의 인연이 시작된다.
“그건 평범한 용이 아니다. 곁에 있던 바위를 부수는 게 녀석의 임무였지.”
“그게 봉인석이었단 소리를 하려는 건가.”
“그래. 카잔 황제한테는 그저 위셀란의 해안선을 지키는 결계석쯤으로 들었겠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 어마어마한 놈이었지.”
“으음…….”
카이세리우스는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뭔가 의문이 해소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긴 했지. 고작 위셀란 놈이 드래곤을 부렸다는 게.”
수호룡 보로스.
녀석이 카이세리우스에게 패배한 건 어디까지나 카잔 황제가 건넨 고대인의 유물 덕분이었다.
용의 혈맥을 뒤틀어 강제로 수면기 상태로 만드는 어마 무시한 유물.
덕분에 보로스는 별다른 힘도 못 쓰고 카이세리우스에게 패배한다.
프레이야보다 손쉽게 보로스를 처치한 덕에, 카이세리우스는 녀석을 용이 아닌 용의 형상을 한 골렘 정도로 생각하고 만다.
‘물론 수면기의 드래곤이라 해도 어마어마하게 센 건 똑같지만.’
“드래곤을 잡으셨단 말이십니까!”
솔루스가 눈이 휘둥그레져 가지곤 카이세리우스를 쳐다봤다.
“그랬었나 보군.”
이야기가 끊기는 걸 원치 않았는지 카이세리우스는 그의 경외 어린 시선을 무시했다.
“…계속해라. 이안 임페라.”
“그래.”
난 연합 왕국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다시금 내보였다.
“봉인석은 총 일곱 개다. 연합 왕국의 전신이 된 왕국들에 하나씩 있었지.”
“하지만 프란츠와 프로스트 랜드는 본디 한 왕국이었을 텐데.”
“그렇지. 그래서 대륙에 있던 봉인석은 총 여섯 개야.”
“대륙에……?”
“하나는 모든 봉인석을 관장하는 최후의 봉인석이지. 어인들의 왕국. 우로스에 있고.”
“우로스라.”
다들 처음 듣는 이름에 고갤 갸웃했다.
하기야 우로스는 해상에 있는 게 아니라 바닷속 깊은 심해에 위치해 있다.
게다가 고대인들이 절멸한 뒤로 줄곧 뭍으로 나올 일이 없었던 이들이었기에, 이들이 모르는 게 당연했다.
“그…….”
다들 고갤 갸웃하는데 이스바르트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위셀란의 전설 속 왕국 어인왕국 우로스 말하시는 건가요?”
“으음. 뭐 그런 거지.”
내 밑에 들어오기 전까지 맨날 책만 읽던 녀석답게 희한한 지식에 빠삭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설…….”
“그럼 그 전설에 대해서 말해 봐라.”
카이세리우스가 흘긋 쳐다보자 이스바르트는 자라마냥 목을 움츠렸다.
“너무 겁먹지 말거라. 당장은 동맹인 녀석들이니.”
“그럼…….”
이스바르트는 차분히 전설 속 이야길 늘어놓기 시작했다.
“위셀란의 어부들 사이에서 도는 소문입니다. 가끔 씨 서펜트한테 공격 받을 당시 인간의 모습을 한 이들을 봤다구요. 그들은 씨 서펜트를 사냥하곤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고 합니다. 그런 소문에 살이 덧붙여져서 어인들의 왕국 우로스가 나온 걸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호오.”
“다리 대신 지느러미를 갖고 있는 이들은 인간보단 마물에 가깝다고 하더군요. 검은 눈에 비늘로 뒤덮인 몸을 하고 있고… 물속에선 그 어느 물고기보다 빠르게 움직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랭크는 보유하고 있나?”
“으음. 거기까진 확실치 않지만. 작살을 쥔 손이 반짝이긴 했다고…….”
희한한 어인들의 모습에 다들 상상이 안 되는 듯했다.
나도 녀석들을 글로만 봤지 실제로 본 적은 없다.
어렸을 때 본 만화 영화의 어인에 가까울지, 스릴러에 나오는 팔만 달린 괴물에 가까울진 나도 몰랐다.
“아마 랭크는 보유하고 있을 거다. 놈들도 고대인이 절멸한 이후에 생긴 놈들이니.”
“오오… 그런가요?”
이스바라트는 전설 속 이야기에 흥분한 듯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런 와중에 카이세리우스가 끼어들었다.
“그 봉인석이 깨지면 금제가 풀린다는 건가.”
“그래.”
“그 여파로 뭔가 일이 생기고, 대륙의 인간 대부분이 죽는다는 소리군.”
“그렇지.”
“…….”
카이세리우스는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입을 다물었다.
긴 침묵 끝에 그의 입술을 비집고 나온 건.
“…쯧.”
불만이 가득한 혀 차는 소리였다.
“전하…….”
솔루스는 카이세리우스의 곁에서 그의 눈치를 살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길래 대륙의 인간 대부분이…….”
솔루스는 금제가 깨지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물어보려 했다.
“그만.”
하지만 카이세리우스가 이를 막아섰다.
“그게 뭔지는 나도 모르겠다만, 폐하께서도 내게 숨기고 있던 사실이라면 말도 못하게 끔찍할 거란 건 분명하겠군.”
“그렇지.”
수만 년간 억눌려 있던 금제니 그 여파가 대륙을 휩쓸 거란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사실 나도 그게 뭔지 말하고 싶진 않았다.
여기 자리한 이들의 사기만 떨어뜨릴 게 분명했으니까.
“그럼 그걸 막기 위해 최후의 봉인석을 지키러 가자는 거군.”
“이해가 빨라서 좋네.”
우로스에 위치한 최후의 봉인석.
지금쯤 주인공 녀석이 그걸 깨부수려고 안간힘 쓰고 있을 거다.
괜히 최후의 봉인석이 아니다.
오베론마저 쓰러뜨린 녀석마저도 함부로 깰 수 없는 거니까.
그리고 녀석이 그렇게까지 하는 건…….
‘주신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겠지.’
과거에도 주신은 딱 한 번 나왔다.
온 대륙을 휩쓸었던 대전쟁.
카잔 황제의 깽판을 가만히 두고만 있을 수 없었던 녀석은 오베론의 앞에 나타난다.
그렇게 그는 오베론에게 걸려 있던 최후의 벽.
금제를 깰 계기를 건네준다.
그 결과가 이거다.
미친 먼치킨 마법사에 의해 만들어진 거짓된 평화.
덕분에 카잔 황제의 야욕은 좌절되고 지금에 이르렀다.
차라리 오베론이 조금 더 잔혹했다면. 주인공 녀석과의 인연을 외면 할 수 있었더라면, 여기까지 오진 않았을 거다.
“…….”
어쩌면 여기까지 오는 게 주신의 목표였을지도 모른다.
녀석은 그런 녀석이니까.
“…알겠다.”
카이세리우스가 끼고 있던 팔짱을 풀었다.
“하, 하오나 전하. 저자의 말을 신용할 만한 증거가…….”
솔루스가 괜히 끼어들었지만 카이세리우스의 마음은 확고했다.
“그럼 거짓이란 증거는 있나?”
“그건…….”
“방금 봤다시피 녀석은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것까지 하나 빠짐없이 알고 있다. 게다가 대륙의 멸망 같은걸 빌미로 거짓말을 할 놈 같지는 않고.”
“…….”
“그렇지? 이안 임페라?”
카이세리우스는 슬쩍 입꼬릴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난 입을 굳게 닫은 채 고갤 끄덕였다.
“보라고. 진짜라잖아?”
“으음…….”
사실 따지고 보면 솔루스의 말이 맞았다.
난 연합의 일원이고, 녀석들은 연합의 적이니까.
억지에 불과한 카이세리우스의 주장이었지만, 솔루스는 차마 반기를 들 수 없었다.
“…저도 동의합니다.”
“크, 크로드! 너까지…….”
예상외의 인물이 내 말을 믿어 줬다.
크로드 녀석, 따지고 보면 그리 나쁜 놈은 아니라니깐.
“…나도.”
“바르카! 너까지 왜 그러는 건가!”
“…실은 봤어. 저 녀석의 머릿속에서. 뚜렷하게 떠오르진 않지만… 녀석이 한 말 대부분은 사실이야. 아니, 사실보단 저 녀석이 본 미래에 일어날 일들이지.”
“…….”
꿈 합성을 통해 내 기억을 엿본 바르카.
녀석은 내가 본 게 소설이란 사실까진 몰랐다.
어디까지나 미래를 예지할 수 있는 힘 같은 걸로 받아들인 듯했다.
‘따지고 보면 그게 맞는 건가.’
애초에 내가 읽은 건 그저 공상 소설이 아니니까.
누군가에게 실제로 일어났고, 앞으로 일어날 미래의 일.
바르카까지 동의하고 나서자 솔루스는 하는 수 없이 고갤 끄덕였다.
“…알겠다. 전하의 뜻에 따라 네 녀석과 손을 잡지. 그게 언제까지일지는 모르겠지만.”
“고맙구만.”
이렇게 영겁의 기사단과의 일시적인 동맹은 체결됐다.
남은 건 이들의 힘을 모아 주인공 녀석을 막는 것뿐.
“그럼. 곧바로 우로스란 곳으로 향할 계획인가?”
“…그래. 하지만 당장 출발하는 건 나 혼자다.”
“하오나 공작님! 그건 너무 위험…….”
“그럼 뭐. 수만 년 동안 교류도 없던 왕국에 우르르 쳐들어가게?”
“윽…….”
프리아나가 괜히 한마디 했다가 주눅만 잔뜩 들었다.
“일단은 우로스의 상황을 살펴보는 게 먼저다. 아직 우로스의 어인들이 누구 편인진 확실치 않으니까.”
소설에서 우로스는 두 갈래로 나뉜다.
라크레시아를 따르겠다는 부류와 반대하겠다는 부류.
굳이 놈들을 자극해 주인공 녀석의 편에 서게 할 필요는 없었다.
“위치는 나중에 통신용 마법구로 보내 줄 테니까. 내가 연락하면 곧바로 와…….”
“꼭 명령이라도 하는 말투군.”
“…주면 좋겠군.”
“크큭.”
카이세리우스는 고분고분한 내 태도가 재밌는 듯 웃었다.
배알 꼴리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소설에서 본 바론 딱히 적의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적의가 있다면 이런 장난을 칠 게 아니라 목을 베어 버렸을 놈이니까.
“혼자 가는 건 반대다.”
“…뭐?”
갑작스레 누군가 끼어들었다.
그건 프리아나도 이슬린도 아니었다.
크로드.
녀석은 무뚝뚝한 얼굴로 내 계획에 반대했다.
“왜지?”
“네놈 말대로 죄다 몰려가는 건 어렵겠지. 하지만 혼자 가는 건 위험하다. 네놈한테도 그렇고. 우리한테도 그렇지.”
“흠.”
녀석 성격이라면 딱히 날 걱정해서 하는 말은 아닐 거다.
그렇다면.
‘감시역을 붙이겠다는 건가.’
비록 카이세리우스가 내 계획에 동참해 주겠다곤 했지만, 아직 날 완전히 신용하진 못하겠다는 뜻이었다.
당해 본 놈이 안다고.
카이세리우스는 아니어도 크로드는 나한테 속아 된통 당했던 기억이 있으니까.
“그래! 그거 좋겠군!”
카이세리우스 탓에 아무 말도 못하던 솔루스는 신이 나 맞장구쳤다.
“그럼… 누가 날 따라오겠단 거지?”
“그건 당연히 내가…….”
반짝반짝 빛나는 대머리 녀석이 신이 나서 손을 들었다.
하지만.
“나다.”
“앗…….”
크로드가 짧게 말하자 솔루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얼굴엔 불만이 가득했지만 더 이상 토를 달진 않았다.
랭크도 그렇고 카이세리우스에게서 받는 신임도 그렇고, 모두 솔루스보단 크로드가 더 높았으니까.
“그래. 한 명 정도야 같이 가는 게 좋겠지.”
“…흥.”
“공작님! 그렇다면 저도…….”
눈치 없이 프리아나가 끼어들었지만 난 고갤 가로저었다.
“넌 영지를 지키는 편이 나을 거다. 혹시라도 영지에 무슨 일이 생기면 곤란하니까.”
“으윽… 네. 공작님.”
이야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자리에 모였던 이들이 모두 일어섰다.
“출발은 언제 할 생각이지?”
“지금 당장 해야지. 마지막 봉인석은 일주일이면 박살 나 버릴 테니까.”
“…그래.”
일단 급한 대로 일주일만 남은 것처럼 얘기했다.
하지만 그것도 장담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공작님.”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슬린이 평소 자주 입던 갑옷을 건넸다.
이슬린의 시선이 잠시 에고 소드였던 검에 머물렀지만, 딱히 새로운 검을 건네진 않았다.
“고마워.”
난 이슬린이 건넨 갑옷을 입었다.
오러가 판치는 세상인 이상 거창한 갑옷은 움직임만 둔하게 할 뿐이다.
게다가 지금 향하는 건 어인 왕국.
두터운 갑옷은 방해만 될 뿐이다.
적당히 갖춰 입곤 크로드를 훑어봤다.
묵직한 풀 플레이트 메일을 입은 채 거검 파산검을 등에 매고 있었다.
“그걸로 괜찮겠어?”
“나야말로 하고 싶은 말이다만.”
“흠.”
나중에 물에서 허우적대면 알아서 벗을 거다.
“가자고.”
“…….”
크로드는 아무 말 없이 내 등에 손을 얹었다.
적일 땐 두려운 놈이었지만, 동맹을 맺고 나니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그렇게 난 카펫 아래에 숨겨진 웨이 포인트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그리곤 소설 속에서도 나오던 한 장소를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