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난 다시 임페라 백작령, 아니 이젠 공작령이 된 내 영지로 되돌아왔다.
파앗.
“후.”
집무실에 도착하자 인기척을 느끼곤 이슬린이 달려왔다.
“공작님!”
“아, 이슬린. 잘 있었나.”
숨을 헐떡이면서까지 달려온 녀석은 날 발견하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지진이 시작되질 않나, 공작님도 사라졌다질 않나.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습니다.”
“무슨 일이라.”
아직은 무슨 일이 일어나진 않았다.
조만간 일어나게 생겼지만.
빠르면 일주일 정도 남았나?
“다행히 지진도 잦아들었고. 별문제는 없을 것 같군요.”
“…그럴 거 같나?”
“…네?”
녀석에게 되묻자 이슬린은 고갤 갸웃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클랜원들에게 연락해 봐라. 지진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피해는 또 얼마만큼인지.”
“네.”
이슬린은 곧장 통신용 마법구를 꺼내 들었다.
그리곤 서둘러 온 대륙에 퍼진 이안 클랜의 클랜원들에게 연락했다.
아이소테르에서 얼쩡거리던 지오 클랜.
이는 어느새 크게 성장해 지금은 대륙 전역에 영향력을 펼칠 정도였다.
그만한 규모의 클랜으로 성장시켜 준 이슬린.
녀석에게 고맙긴 했지만, 당장 닥쳐 올 대재앙엔 역부족이었다.
“그럴 리가…….”
마법구로 이래저래 떠들던 이슬린이 눈을 크게 떴다.
“피해 규모는 어떻지?”
“그게… 지진 규모가 약했던 터라 다들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삐빅. 삐빅.
마법구에서 짧은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이슬린은 품 안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 마법구 위로 나타나는 글귀들을 받아 적었다.
“…….”
[아이소테르, 위셀란, 도라스, 프란츠, 프로스트 랜드…….]
차분히 글귀를 적어 내려가던 그녀는 마침내 손을 멈췄다.
그리고 종이 위엔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연합 왕국들이 적혀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난 눈을 질끈 감곤 이슬린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사람들을 불러 모아라.”
* * *
얼마 지나지 않아 임페라 공작령에 속한 이들이 모두 모였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공작님!”
“그러게나 말이야! 소테라에서도 안 보인다길래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지 뭔가!”
프리아나와 하룬이 호탕한 목소리로 날 반겼다.
“…고맙구만.”
절망적인 상황이긴 했지만, 둘의 환대에 조금은 기분이 풀렸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라도…….”
“일단 앉아라. 다들 모이면 시작하지.”
“으음. 네! 알겠습니다, 공작님!”
프리아나는 내가 공작이라도 된 게 기분 좋은지 괜히 공작이란 칭호에 힘주어 말했다.
그렇게 녀석들은 집무실에 마련된 자리에 하나 둘 앉았다.
아직 자리가 몇 개 남아 있긴 했다.
“…….”
사람들이 다 모이자 이슬린이 입을 열었다.
“그럼… 시작할까요?”
“아니. 잠깐. 아직 안 온 녀석들이 있어.”
“…네?”
집무실 정 중앙에 놓인 붉은 카펫.
그 아래엔 공간 도약용 웨이 포인트가 하나 있었다.
광산에 있던 녀석을 가지고 온 거다.
공간 도약을 할 줄 아는 놈이 몇 없다 보니 그간 요긴하게 썼다.
위험하니 이슬린은 치워 버려야 한다곤 했지만…….
이런데 쓰게 될 줄이야.
파아앗!
다들 자리에 앉아 있는데, 붉은 카펫 위로 빛이 몽우리지기 시작했다.
누군가 공간 도약을 하고 있단 뜻이었다.
이걸 쓸 줄 아는 놈은 나 말곤 몇 없다.
주인공 녀석이야 굳이 쓸 필요가 없으니 안 쓰고, 나처럼 고대인의 영약을 통해 단전을 얻은 자들만이 쓸 수 있다.
“으응?”
자리에 앉은 모든 이들의 시선이 카펫 위로 향했다.
이내 형체를 갖추기 시작한 빛의 몽우리는, 사람 넷을 토해 냈다.
“우욱….”
개중 삐죽삐죽한 머릴 한 녀석이 속이 안 좋은 듯 인상을 찌푸렸다.
사역술사 바르카.
영겁의 기사단 소속 사역술사였다.
“이래서 공간 도약은 싫다고…….”
눈을 가늘게 뜨던 바르카가 고갤 들어 올렸다.
그러자 나와 눈을 마주친 바르카는 얼굴이 사색이 돼 가지곤 뒤로 물러섰다.
“네, 네놈은…!”
“오랜만이야.”
예전에 황금 은행 습격 사건 때 한 번 보고 말았는데.
한동안 고생 좀 했을 거다.
서큐버스의 꿈 합성 부작용으로 내 트라우마를 그대로 받아먹고 말았으니까.
스릉!
“물러서십시오! 공작님!”
오랜만의 만남에 담소나 나누려는데, 프리아나가 튀어나와 칼을 뽑아 들었다.
카앙!
이에 응하듯 지체 없이 검을 뽑은 검은 머리의 남자.
크로드.
둘은 검을 맞댄 채로 서로를 응시했다.
“호오… 제법 그럴싸한 검을 쓰는군.”
“이 자식이……!”
둘도 어느새 검술 랭크 7의 경지에 올라섰다.
덕분에 둘 사이에선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매서운 눈빛이 오갔다.
“이 자식들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흥!”
뒤이어 솔루스가 지팡이에 마나를 그러모았다.
이슬린 또한 질 수 없다는 듯 차가운 얼음창을 허공에 소환했다.
“…….”
슬금슬금 눈칠 살피던 디아는 조심스레 내 곁에 서 영겁의 기사단 녀석들을 노려봤다.
이를 재밌다는 듯 쳐다보고 있는 한 남자.
기사왕 리온 카이세리우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한마디 했다.
“상황 설명이 안 된 건가?”
“…그래. 나도 방금 연락한 거니까.”
“후후. 그렇군.”
“공작님! 어서 몸을 피하셔야…….”
“됐어. 내가 부른 거니까.”
“…네?”
“그러니까 일단 검부터 내려놔.”
“…….”
프리아나는 눈살을 찌푸린 채 크로드를 노려봤다.
그러다 점점 프리아나의 검에 담겨 있던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흥.”
이내 프리아나가 한 발짝 물러서자, 크로드도 입을 이죽이며 파산검을 등 뒤에 맸다.
상황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카이세리우스가 한마디 했다.
“그럼. 이제 슬슬 말해 주실까. 상황 설명도 없이 우릴 한자리에 모은 이유를.”
“…그래. 일단 다들 앉지.”
“으음…….”
프리아나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영겁의 기사단 녀석들을 노려봤다.
하지만 내 명령이 떨어져서 그런지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집무실에 마련돼 있던 좌석은 양쪽으로 나뉘었다.
한쪽은 임페라 공작령의 사람들.
한쪽은 영겁의 기사단.
두 집단 사이에선 묘한 신경전이 오갔지만 애써 무시했다.
“일단 다들 와 줘서 고맙다. 상황 설명도 없이 불러서 가벼운 충돌이 있긴 했지만, 앞으로 당분간은 친하게 지내야 하니 서로 이해해 주자고.”
“그게 무슨…….”
한 마디 하려던 크로드가 카이세리우스의 손짓 한 번에 입을 다물었다.
“계속 해 보게.”
“먼저 이걸 봐 줬으면 한다.”
이들을 한데 모으곤 아까 이슬린이 적었던 종이를 꺼내 들었다.
종이엔 연합 왕국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게 뭐지?”
“오늘 아침. 작은 규모의 지진이 일어났다.”
“으음. 그거야 알지.”
솔루스가 고갤 끄덕였다.
“그럼그럼. 덕분에 깜짝 놀랐다고.”
“…잠깐. 바르카. 넌 도라스에 있던 게…….”
솔루스는 뭔갈 말 하려다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아마 도라스에서 뭔가 수작을 부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솔루스. 넌 어디에 있었지?”
“…넌?”
“그럼 뭐. 선생님이라고 불러 줄까? 시답잖은 건 신경 끄고 대화에 집중해 줬으면 하는데.”
“뭣……!”
솔루스가 목에 핏대를 세우려는데 카이세리우스가 대신 입을 열었다.
“솔루스는 프로스트 랜드에 있었다. 나단 공작이란 놈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서였지.”
“저, 전하! 그건…….”
“그리고 바르카는 도라스에 있었고. 크로드와 난 피스트에 있었다.”
거침없이 기밀을 불어 버리는 영겁의 기사단.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영겁의 기사단의 수장, 기사왕이 한 말이었기에 토를 다는 이는 없었다.
“그래. 그리고 아이소테르도 마찬가지야.”
“근데 그게 무슨 상관인 거지? 지진이야 흔히 일어나는 일일 텐데.”
“으음! 대지의 여신께서 노하셨나 보구만!”
옆에 앉아 있던 하룬이 괜히 한마디 거들었다.
대지의 여신이라.
틀린 말은 아니다.
평범한 지진이었다면 그냥 자연 현상이었겠지만, 이번 지진은 아니니까.
“규모가 엄청 큰 거라면 모를까. 이렇게 작은 규모의 지진이 온 대륙에 걸쳐 일어나는 게 흔한 일일 것 같나?”
“그렇다면…….”
“봉인석이 파괴됐다.”
“…봉인석? 무슨 봉인석을 말하는 거지?”
“…후.”
기사왕이라도 모르는 건 모르는 건가.
난 차분히 머릿속을 정리하곤 이야길 시작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고대 설화 중 하나다. 그걸 명심하고 듣도록.”
“음. 고대 설화라.”
설화란 얘기에 카이세리우스가 입꼬릴 슬쩍 들어 올렸다.
설화가 아니란 건 알지만 굳이 캐묻진 않겠단 소리였다.
“먼 옛날. 고대인이 살았던 건 다들 알 거다. 그들에게 랭크 시스템이란 게 없었단 것도 알고 있을 테고.”
“그랬지.”
“그렇게 살고 있던 고대인들에게. 대재앙이 한번 몰아쳤다. 라크레시아나 오베론 같은 놈들과는 비교도 안 될 어마어마한 대재앙.”
“…….”
설화라 얘기하긴 했지만 자리에 참석한 이들은 모두 귀를 기울여 내 이야기에 집중했다.
다들 어느 정도 이게 설화가 아니란 걸 예상하는 분위기다.
“때문에 고대인들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다. 대재앙과 직접 맞서 보려고도 해 보고, 그게 안 될 거라 생각한 녀석들은 어떻게서든 살아남을 길을 모색했지.”
“예를 들면?”
“이곳 엔델로 광산에 묻혀 있던 고대인의 보고라든가. 자이겔론드 지하에 숨겨져 있던 고대인이라든가. 그런 것들이지.”
“그런…….”
“하지만 결과는 다들 알고 있다시피 모조리 실패했다. 단 하나도 빠짐없이.”
카이세리우스는 팔짱은 끼곤 말했다.
“그리고 남은 게 지금 우리 같은 인간들이란 건가.”
“…그래.”
“…….”
뭔가 떠오른 듯한 카이세리우스는 자신의 왼손을 들여다봤다.
복잡한 룬 문양이 새겨진 왼손.
랭크 시스템.
“그 증거가 이거란 거군.”
“그래. 이건 그런 거다. 대재앙에 의해 부여된 지금 인류들의 금제. 무슨 짓을 하더라도 혼자 힘만으론 랭크 9에 도달할 수 없는 금제. 그건 당신이 제일 잘 알 테고.”
“…….”
여유로운 표정이었던 카이세리우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그 금제가 지금 깨지려 하고 있다. 라크레시아의 손에.”
“뭣……?”
카이세리우스의 표정이 돌변했다.
“그렇다면…….”
“그래. 금제가 깨지면 랭크 시스템도 붕괴될 거다. 아마 네 녀석을 속박하고 있던 금제도 깨지겠지.”
“…그럼 그런 얘기를 지금 해 주는 이유가 뭐지?”
사실 그랬다.
금제를 깨는 건 카이세리우스가 가장 원하는 것.
이를 위해서라면 내가 아닌 라크레시아의 편에 서는 게 맞았다.
하지만.
“물론 금제도 깨지고 더 강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인간을 속박시키기 위한 금제가 아니다. 보호하기 위한 거지.”
“흠.”
“내가 알기론 지금 대륙에 남은 봉인석은 단 하나. 아마 그게 파괴된다면 금제는 풀릴 거다. 하지만 그랬다간 모두 죽을 거다. 랭크 8에 도달하지 못한 이들은 모두.”
“…….”
카이세리우스는 뚱한 얼굴로 날 노려봤다.
그러다 문득 주변에 앉은 영겁의 기사단원들을 둘러봤다.
난 안다.
이제 카이세리우스는 대전쟁 이전만큼 랭크 9를 달성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그에겐 사념 상태에서도 줄곧 보필해 온 영겁의 기사단원들이 있었다.
아마 금제가 풀린다면, 기사왕은 살아남을 거다.
하지만 그를 따르던 이들은 모두 죽을 거다.
단 하나도 빠짐없이.
‘그래서 카잔 황제도 녀석에게 제대로 된 설명은 안 해 줬지.’
그저 금제가 깨지면 랭크 9에 도달할 수 있을 거란 설명만 해 줬을 뿐.
덕분에 대전쟁 시절 수호룡 보로스를 쓰러뜨렸을 때도 그저 위셀란을 보호하는 봉인석 쯤으로 알려 준 거다.
소설에서도 녀석은 라크레시아의 협박에 어쩔 수 없이 녀석의 밑으로 들어갔다.
소설 속 라크레시아는 금제보단 카잔 황제를 복원시키는 게 꿈이었으니까.
그 결과 카이세리우스는 자기 부하들을 살릴 길을 선택했다.
난 거기에 희망을 걸고 녀석을 설득시키려 했다.
긴 침묵 끝에 카이세리우스의 입이 열렸다.
“…계속 말해 봐라. 그 잘난 계획이란 게 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