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202화 (202/222)

202화

‘부디 아니길.’

공간 도약 도중엔 몸이 붕 뜨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래서인지 처음엔 이질감에 속이 메스꺼웠지만,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지금은 오히려 머리가 맑아지는 듯했다.

난 차분히 부유감에 몸을 느낀 채로 생각에 잠겼다.

소설에서도 이런 대지진이 일어나긴 했었다.

소설의 과거 회상 씬.

카잔 황제의 명을 받은 기사왕, 리온 카이세리우스의 시점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대전쟁 이전.

황제의 명에 따라 위셀란의 자그마한 섬에 도착한 카이세리우스.

그는 정체불명의 바위를 하나 깨부순다.

뒤이어 뭔가 나타나긴 했지만 리온의 검술 앞에 무참히 처발릴 뿐이었다.

위셀란의 방어선 정도라 생각한 카이세리우스.

하지만 이건 그딴 게 아니다.

하찮은 위셀란, 아니, 인간들이 만든 게 아니니까.

이 소설의 시작이자 끝.

인간들을 향한 주신들의 금제.

카잔은 궁극적으로 이걸 파괴하는 게 목적이었다.

녀석은 인간들의 왕국을 점령하는 것 따위가 목표가 아니었다.

대륙 곳곳에 숨겨진 주신들의 금제.

이를 파괴하고 자신에게 걸린 금제를 없애고 싶어 하는 거지.

‘멍청한 놈.’

하지만 이는 단순히 카잔의 욕망만을 채워 주는 게 아니다.

주신들의 금제.

이는 인간들을 위한 울타리다.

속박이면서도 보호하기 위한 울타리.

이를 깨부쉈다간, 그간 인간들을 보호하고 있던 모든 게 산산조각 나 버린다.

파앗.

이내 생각이 정리되자 눈앞에 푸른 해안선이 보였다.

잔잔하게 나부끼는 해안선.

하지만 이를 끼고 자리 잡고 있는 섬은 난장판이었다.

“…젠장.”

불안한 예감은 어째 빗나가는 법이 없다.

공간 도약을 통해 온 건 위셀란 끝자락의 자그마한 섬.

수많은 군도로 이루어진 위셀란엔 섬이 많았다.

개중엔 웨이 포인트가 박힌 섬도 있었다.

원래는 하나였지만 뭔가에 의해 찢어지기라도 한 듯 잘게 나뉜 군도.

그 가운데 웨이 포인트가 위치한 섬은 과거 고대인들의 도시이기도 했던 땅이었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들짐승 몇 마리만 사는 무인도지만.

무인도 한가운데에 위치한 자그마한 연못, 그 중앙엔 큼지막한 바위가 하나 세워져 있었다.

‘…있었지.’

난 물끄러미 연못 중앙을 바라봤다.

거기엔 커다란 바위 하나가 둘로 쪼개진 채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미 녀석은 파괴돼 버린 뒤였다.

여기 있는 녀석이 파괴돼 버린 뒤라면… 아마 남은 건 하나뿐일 거다.

카잔 제국의 영토 너머에 위치한 어인들의 왕국.

거기에 남은 거 말곤 없을 거다.

그것마저 파괴된다면…….

“…….”

난 부서진 바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단단한 크기며 마치 누가 가져다 놓은 듯한 인위적인 모양새까지.

주인공 녀석도 당시엔 정신이 없어서 그냥 지나쳐갔지만, 이건 그냥 바위가 아니다.

뭔갈 억누르기 위한 봉인석이지.

찰박.

조심스레 연못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소금기가 섞인 듯 짭짤한 내음이 물씬 풍기는 연못.

다행히 깊이는 깊지 않아 고작해야 허리께까지만 올 정도였다.

“…….”

누군가 일도에 양단 한 듯한 매끈한 단면.

시험 삼아 허리춤에 매고 있던 검으로 봉인석을 베어 봤다.

찰캉!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검이 튕겨져 나왔다.

비록 황혼이 죽어 버린 터라 단단한 철검에 불과하긴 해도, 봉인석은 생채기 하나 없이 멀끔했다.

이만한 경도의 바위를 단칼에 베어 버렸다는 건…….

…찰칵!

파괴된 봉인석을 바라보고 있는데 별안간 날카로운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응?”

쏴아아앗!

얕은 호수 안에서 무언가가 솟구쳐 올랐다.

거대한 뱀의 형상을 한 괴생명체.

정확히는 생명체는 아니었다.

봉인석을 지키기 위한 고대의 수호자 중 하나.

수호룡 보로스였다.

드래곤이라기보단 뱀에 가까웠다.

날개에 팔다리가 달린 게 아닌, 동양풍의 기다란 뱀에 가까웠으니까.

생긴 건 드래곤 폼을 했던 유르와 닮았다고 해야 하나.

어찌 보면 먼 친척이니 그럴 만했다.

[…누구인가.]

“오호.”

잔뜩 힘이 빠진 목소리가 메아리치듯 울렸다.

녀석의 몰골을 보니 그럴 만했다.

거대한 투구를 쓰고 있어야 할 머리는 죄다 벗겨진 채 피 칠갑을 하고 있었고, 몸뚱이 군데군데 달린 발톱은 산산조각 나 버린 채였다.

“살아는 있구만그래.”

[…….]

녀석이 온전한 상태였더라면 아마 상대도 안 됐을 거다.

이래 봬도 녀석은 용의 일종이긴 하니까.

‘그런 놈과 싸워서 이기다니.’

기사왕 녀석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새삼스레 다가왔다.

‘애초에 용이란 게 이길 수 없도록 만든 거다만.’

이 세상의 용은 태초부터 존재한 종족이 아니다.

고대의 지식을 안다느니, 마법의 시초라느니 별의별 전설이 다 있긴 했지만, 그건 다 세월이 지나며 생겨난 거짓말들뿐이다.

드래곤.

이는 금제를 넘어서려는 인간들을 묶기 위한 마지막 쐐기 같은 거다.

강해지고 싶다는 인간의 욕구.

랭크 8의 경지에 다가선 이들이 괜히 용에게 도전하는 게 아니다.

전등을 향해 죽을 걸 알면서도 돌진하는 하루살이마냥.

최후의 순간을 장식하기 위한 자살 행위일 뿐.

[…네놈도 금제를 풀러 온 것인가.]

“풀 게 뭐 있겠어. 이미 다 풀린 마당에.”

[…그렇군.]

보로스는 만신창이가 된 몸뚱일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리온이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건 아닐 거다.

그건 이미 수십 년도 더 전의 일.

대전쟁 이전의 상처는 이미 다 치유되고 봉인석도 제 모습을 찾았다.

깔끔하게 잘린 절단면 하며 보로스의 상처는 비교적 최근에 생긴 거였다.

[…이제 이곳의 수명은 다 했다. 한 번도 아닌 두 번이나 제 일을 해내지 못했으니.]

“…그렇긴 하지.”

뼈가 있는 긍정의 말이었지만, 보로스는 딱히 내색하지 않았다.

봉인석을 지키라던 태초의 언령을 두 번이나 어기고 만 거니까.

[최악이더군. 터무니없는 강자에게 농락당하는 기분이란.]

보로스는 난생처음 느껴 보는 기분이었는지 처음 만나는 나한테까지 주절주절 감상을 토로했다.

“…….”

미안하지만 녀석이 느낀 게 맞을 거다.

보로스를 습격하고 봉인석을 파괴한 건 다름 아닌 주인공 녀석.

그 녀석 말곤 이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녀석이라면 봉인석은 물론이고 보로스까지 단칼에 베어 버릴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여기서 의문이 들 수 있다.

비록 보로스가 만신창이가 되긴 했지만. 녀석은 아직 살아 있었다.

왜일까.

‘그냥 주인공이 살려 둔 거지.’

아직은 일어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일어날 일은 아니지만, 디아와 보로스는 한 번 만난 적 있다.

보로스가 회상씬에서 나오긴 일이다.

소설에서도 후에 주인공 녀석의 시점으로도 한 번 나오긴 한다.

용병일을 하다 거센 풍랑에 휩쓸려 표류한 주인공.

이미 짠물을 너무 많이 들이킨 탓에 녀석은 탈수 상태에 빠져 버린다.

비몽사몽한 채로 사경을 헤매던 도중, 녀석의 시야 너머로 희뿌연 무언가가 나타난다.

이내 그는 정신을 잃어버린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마실 물이며 간단한 요깃거리가 그의 앞에 대령됐다.

물론 제대로 된 요리가 아닌 날 생선이나 거북이 같은 거였지만.

보로스는 봉인석을 수호하기 위한 용이다.

봉인석에 적대감을 갖지만 않는다면 건드리지 않는 게 그의 철칙.

게다가 주인공의 선한 영혼에 반해서인지 몰라도, 녀석은 기절한 주인공을 성심성의껏 보살핀다.

후에 어찌어찌 섬을 탈출하는 데 성공하는 디아.

녀석은 정체 모를 무언가를 향해 감사의 절까지 올린다.

지금 보로스가 살아 있는 건.

어디까지나 그때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일 거다.

[…그래서. 네놈도 결국엔 그놈과 한패인가?]

“…글쎄.”

보로스는 피칠갑을 한 머리를 내게 가까이했다.

피투성이 가운데 영롱히 빛나기 시작한 녀석의 한쪽 눈.

녀석과 눈이 마주치자 가슴속에서 무언가 훈훈한 기운이 느껴졌다.

[…신기한 놈이군.]

“뭐가?”

[타락한 영혼을 가졌으면서도 그 반대의 영혼이 느껴지다니.]

“…흠.”

아직 미약하게 남은 이안의 영혼을 말하는 건가.

애초에 이 몸뚱인 내 거가 아니니까.

[마치 방금 날 쓰러트린 그놈과 같군.]

“그놈이라면…….”

주인공 녀석을 말하는 걸 거다.

보로스는 생각에 잠긴 듯 몸을 배배 꼬았다.

[놈의 경우인 그 반대의 영혼이 더 강했지만.]

“…그래?”

소설에 나온 바로는 보로스와 눈을 마주치면 영혼을 읽힌다고 했다.

그런 녀석이 한 말인 만큼 틀린 말은 아닐 거다.

“…얼마나 남아 있었지? 아직 타락하지 않은 영혼이란 게.”

[으음…. 한입 크기 정도?]

한입 크기라.

애매한 단위긴 했지만, 용인 녀석이 말한 거다 보니 그리 적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한테 그런 말을 한 건가.’

살아남아야 자신을 막을 수 있을 거라던 주인공 녀석의 말.

그건 아마 미약하게 남은 녀석의 영혼에서 내뱉은 말이었을 거다.

거기에 희망을 걸어 보는 수밖에 없나…….

그러다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주인공 녀석처럼 영혼이 여러 개로 보였다면, 경계하는 게 당연할 텐데, 녀석은 왠지 모르게 처음 보는 내게도 잘해 주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내게 왜 이런 말을 해 주는 거지?”

[그야…….]

보로스는 몸을 반대편으로 배배 꼬며 다시 말했다.

[네놈에게선 봉인석을 깨부수겠단 기운이 안 느껴지거든. 타락한 영혼이건, 아니건.]

“흠. 뭐 그렇긴 하지.”

주신들의 금제란 게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금제란 어쩔 수 없는 거다.

파괴된다면 더 끔찍한 악몽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거니까.

“그럼… 남은 봉인석 상태도 알려 줄 수 있을까?”

이왕 내친김에 이것저것 물어보기로 했다.

[그건… 알려 줄 게 없다.]

“…뭐?”

이것저것 다 알려 줄 것처럼 굴더니 녀석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이미 대강 느꼈겠지만 난 봉인석을 부수기보단 지키는 쪽이라고. 서로 협력하는 …게….”

[알고 있다.]

“…그렇다는 건?”

[그러니 말하는 거다. 알려 줄 수 없는 게 아니라. 알려 줄 게 없다고.]

“…쯧.”

그 말인즉 내 예상대로 다른 봉인석들은 모두 파괴됐다는 거다.

남은 거라곤 어인 왕국에 남은거 단 하나뿐.

“…그래.”

[다 말했으니 이제 난 좀 쉬겠다.]

“좀 쉬라고. 남은 건 내가 할 테니까.”

[…….]

…파앗!

보로스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더니, 몸이 환하게 빛났다.

이내 몽골몽골한 빛덩이로 변한 녀석은 그대로 자그마한 연못을 향해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후.”

이제 남은 거라곤 단 하나.

어인들의 왕국으로 가는 것 말곤 길이 없었다.

“그건 좀 싫은데.”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난 마음을 다잡은 채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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