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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201화 (201/222)

201화

이십여 년 전.

그날은 비가 미치도록 내리는 날이었다.

두두두두…….

틸리안은 홀로 교장 한켠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비록 방계 출신인데다가 본가 사람들과 사이가 안 좋긴 했지만, 자신을 제외한 본가 사람들 모두가 처형 당했다.

그런 일을 당하고도 어찌 기분이 좋을 수 있겠나.

심지어 자신이 그토록 아껴 온 기사 학교마저 잘게 나뉘어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

카잔 제국에 남아 있던 제니스 기사 학교도 모두 해체돼, 남은 거라곤 폐허가 된 건물 잔해뿐.

‘…이제 가야지.’

내일부터 이곳 제니스 기사 학교는 폐쇄된다.

하지만 끝난 건 아니다.

연합의 영토에 잘게 나뉘긴 했어도 기사 학교는 남아 있으니까.

“쯧.”

틸리안은 아이소테르에 있는 기사 학교로 가기로 마음 먹었다.

새로 왕위에 오른 에런골드 2세란 작자가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거기가 그래도 가장 먼저 제니스 기사 학교를 새로 지어 줬으니까.

당분간은 거기서 몸을 사려야…….

“…응?”

저 멀리 누군가가 빗속을 뚫고 틸리안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요새 이 근처 치안이 안 좋아지긴 했다.

폐허가 된 제니스 기사 학교에서 뭐라도 주워 가려는 놈 같았다.

‘미안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군.’

이래 봬도 검술 랭크 7의 어마 무시한 경지의 기사다.

적당히 돌려보내고 거절한다면 가만두지 않으리라.

스릉!

틸리안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검을 뽑아 들었다.

짙푸른 오러가 빛나며 비구름으로 어두워진 주위를 밝혔다.

“거기 누구요!”

“…….”

“돌아가시오! 이곳에 외부인은 들어올 수 없소!”

“…틸리안.”

그의 이름을 나지막이 부르는 외부인.

그런 그의 주위론 신기하게도 비가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그를 피하기라도 하듯, 비는 그의 주위로만 억수같이 쏟아질 뿐이었다.

마법사라도 되는 건가 하고 눈을 가늘게 뜬 틸리안.

그는 이내 외부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오베론?”

대마법사 오베론 스테이라.

이 망할 대전쟁을 끝내 버린 미친 마법사.

그의 손에 수백만의 카잔 제국 병사들이 죽었다.

그토록 강성했던 제니스 가문의 기사들도 그의 마법 앞에선 날파리마냥 우수수 터져 나갔다.

“당신이 여기에 무슨 낯짝으로……!”

대전쟁 전까지만 해도 그와 꽤나 친한 사이였다.

하지만 틸리안도 결국엔 카잔 제국 사람이고, 제니스 가문 사람이다.

오베론이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미안하네. 친우여.”

“친우! 자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나!”

“정말 미안하네. 하지만 자네 말곤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어.”

“뭐라?”

“제발… 내가 친우로서 마지막 부탁을 하겠네.”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오베론이 이렇게까지 나오자 틸리안은 하는 수 없이 검을 검집에 꽂아 넣었다.

“…그래서. 무슨 용무인가. 자네 같은 사람이.”

“…….”

오베론은 조심스레 품 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이건?”

곤히 잠들어 있는 아이.

두세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였다.

“이 아이를 부탁하네.”

“뭐라고?”

대뜸 와서 하는 말이 아이를 부탁한다는 거라니.

틸리안은 곧바로 뭔가 심상치 않은 아이란 걸 눈치챘다.

“…이 아이는 뭔가?”

“…제발 더 이상 묻진 말아 주게. 그저 이 아이가 올바르게 자라게만 도와줄 수 없겠나?”

“…….”

간곡히 바라는 오베론의 눈빛.

둘 사이 힘의 우열을 떠나, 그의 눈빛을 본 틸리안은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

“…알겠네.”

“고맙네. 고마워…….”

오베론은 눈물을 흘리며 감사를 표했다.

“…….”

녀석은 그렇게 건넨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곤 눈을 한 번 꼭 감고는.

파앗.

그의 몸이 밝게 빛나더니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

그가 사라지자 미친 듯이 쏟아지던 비가 감쪽같이 그쳤다.

비구름 사이에 얼굴을 감추고 있던 밝은 태양.

이는 틸리안이 받아든 아이의 얼굴을 밝게 비췄다.

“꺄핫.”

덕분에 잠에서 깼는지 해맑게 미소 짓는 어린아이.

틸리안은 그런 아이를 보며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귀엽게 생긴 녀석이구나.”

멸문 당해 버린 제니스 가문.

틸리안은 아이를 받아 들곤 생각했다.

이 끔찍한 전쟁에 아이들은 죄가 없다.

그렇담 나라도 이 아이들을 보살피고 훌륭한 기사로 키워 내리라.

틸리안은 아이의 콧잔등을 간질였다.

“꺄학.”

아이는 앞으로 닥칠 자신의 운명도 모른 채 마냥 웃기만 했다.

“…이제부터 네 성은 제니스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틸리안이 직접 키우게 될 아이다.

훌륭한 기사로 성공한다면, 언젠간 새로운 제니스 가문의 뒤를 잇게 되리라.

“이름은… 나중 가서 생각하지.”

틸리안은 마냥 헤실거리는 아이를 데리곤 폐허가 된 제니스 기사 학교에서 걸어 나왔다.

* * *

“뭐라구요?”

“사실이오. 디아 제니스. 그 아이는 오베론이 맡기고 간 아이야.”

“그런…….”

“나도 처음 아이를 받았을 땐 몰랐소. 하지만 점점 해가 갈수록 진실을 알게 됐지. 물론 그 사실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비밀로 했지만.”

“…….”

디아는 어렸을 적 카잔 제국에서 내려온 전쟁고아라 했다.

하지만 이상하긴 했다.

어떻게 나이도 어린 녀석이 혼자 카잔 제국에서 아이소테르로 넘어온 건지 말이 안 됐으니까.

기차가 뚫린 것도 아니고, 혼자 걸어왔다는 건데.

그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냥 만들어진 블랭크라 그랬나 보다 하고 말았는데.’

“하지만 디아는 어렸을 적 빈민촌에서 자랐다고…….”

“그거야 내가 기사 학교 교사들한테 해 준 말이지. 녀석의 정체가 탄로 나면 안 되니까.”

“그런…….”

“그 아이는 어려서부터 제니스 기사 학교에서 자라 왔다네. 교장이란 자리 탓에 직접 지도를 하진 못했지만, 먼 발치에서 훌륭한 기사 생도로 거듭나는 걸 봐 왔지.”

“음…….”

하기야 어린 시절의 기억은 풍화되기 마련이다.

당장 나도 여섯 살 이전 기억은 거의 나지 않으니까.

‘소설에서도 어린 시절 회상씬은 직접적으로 안 나왔지.’

“…그럼 하나만 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해 보시오.”

난 머릿속으로 흩어진 퍼즐 조각들을 끼워 맞췄다.

그리곤 이내 한 가지 결론에 도달 할 수 있었다.

그토록 강인한 정신의 소유자였던 주인공.

아무리 녀석이 라크레시아의 복제가 아닌 진짜 카잔 황제의 아들이라 해도, 이렇게까지 미쳐 버리는 건 조금 이해가 안 됐다.

분명 마지막 화에서 녀석은 동료들의 죽음에도 의연한 자셀 취했었으니까.

하지만 마지막 순간.

카잔이 남기고 간 최후의 유물에 의해 무슨 일이 벌어졌다.

“…전생의 술법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전생의 술법……?”

틸리안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래……! 그거였어. 그거라면 충분히 모든 게 설명이 되는군.”

마치 그게 뭔지 아는 것처럼 말하는 그의 말투.

난 조용히 그의 다음 대사를 기다렸다.

“고대인이 만들었다 전해지는 전설의 마법이라오. 영혼을 뽑아내 다른 대상으로 이동시키는 마법이지.”

“고대인…….”

그러고 보니 그런 언급이 한번 있긴 했다.

먼 과거 대재앙을 막기 위해 고대인들이 고안한 생존 방법.

이것저것 많긴 했지만 성공한 건 없었다.

전생의 술법도 그런 것들 중 하나이리라.

“타인의 몸에 새로운 영혼을 주입시킬 순 있지만, 그만큼 리스크가 큰 마법이라오. 만에 하나 대상의 영혼이 너무 강하면, 주입된 영혼이 소멸될 수도 있고. 어쩌면 둘이 뒤엉켜 전혀 다른 무언가가 나올 수도 있다오.”

“전혀 다른 무언가라…….”

머릿속으로 그 전혀 다른 무언가가 하나 떠올랐다.

“…일단 알겠습니다. 덕분에 많은걸 알아냈군요.”

“으음. 알겠소. 그럼 이만.”

틸리안은 이제 그만 나가 보라는 듯 고갤 살짝 까딱였다.

잠시 생각을 정리해 보려 나가려는 내게 틸리안이 한마디 했다.

“잘 대해 주시오. 그 아이. 심성은 착한 아이라오.”

“…그래야죠.”

철컥.

교장실에서 나온 난 다시 기사 학교의 운동장으로 나왔다.

“전생의 술법이라.”

일단 전생의 술법을 적어도 세 번은 성공했다.

그 증거가 바로 나.

내 영혼은 이안 임페라가 아닌 대한민국의 이진수다.

그저 개망나니 술꾼에 불과했던 이안 임페라.

그런 놈이었기에 내 영혼이 주입되자마자 놈은 흔적도 없이 소멸됐다.

그렇다면 다음은.

‘카잔 황제.’

놈은 자신의 영혼을 최후의 유물에 넣은 채 육신이 처형당하도록 내버려뒀다.

연합은 그런 것도 모르고 빈 껍데기만 남은 그의 육신을 처형시키곤 좋아라 했고.

“그런 거였나.”

소설의 최종장.

라크레시아는 자신의 아비를 깨울 생각에 흥분해 있었다.

황제의 재림을 꿈꾸며 최후의 유물을 작동시키려 했다.

진짜 라크레시아.

아니, 사실 그는 가짜였다.

최후의 유물을 작동시키기 위한 장기말 중 하나였을 뿐.

그도 결국엔 황제의 꿈을 위해 이용만 당하던 녀석이었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

카잔 황제의 영혼이 담긴 최후의 유물은, 라크레시아가 아닌 주인공을 택했다.

그가 바로 카잔 황제의 진짜 아들이었으니까.

소설 전반의 설정이 뒤집힌 것이다.

“그때 전생의 술법이 사용된 거군.”

하지만 대상은 내가 본 소설의 주인공이었던 놈이다.

육체만큼이나 강력한 영혼의 소유자.

덕분에 카잔 황제의 영혼이 주입되어도 주인공의 영혼은 소멸되지 않았다.

주인공과 카잔 황제 둘의 영혼이 뒤엉킨 무언가.

그게 바로 지금 이 세상에 깽판을 치고 있는 놈이다.

그리고 그렇게 뒤엉킨 영혼의 괴물은, 뭔가 새로운 목표를 위해 과거로 전생의 술법을 사용했다.

카잔 황제.

끔찍한 놈이다.

제 아들을 인질로 삼은 것도 모자라, 자신의 영혼을 담을 그릇으로 쓰다니.

“후.”

틸리안을 통해 사건의 전말을 깨달은 난, 후련함보단 씁쓸함이 더 컸다.

결국 주인공 녀석도 피해자에 불과한 놈이니까.

그렇다고 녀석이 지금껏 깽판을 쳤단 사실은 변함없지만.

“쯧.”

내심 뭔가 큰 비밀이 있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딱히 당장 도움 되는 건 없었다.

주인공 녀석이 이렇게까지 깽판을 치는 건 다름 아닌 ‘그놈들’을 불러내기 위해서인 것 같으니까.

“아니, 놈들이 아니라 놈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다면 더더욱 상황은 끔찍했다.

웬만해선 꿈쩍도 안 하는 ‘놈’이니 주인공의 깽판은 더욱 거세질 것이다.

예를 들면 대륙을 반으로 갈라 버린다든가…….

쿠르르……!

“어엇……?”

한창 생각에 잠겨 있는 그때.

지축을 흔드는 듯한 굉음이 기사 학교 내에 울려 퍼졌다.

“뭐지?”

마물이라도 나타난 건가?

굉음은 꽤나 오랜 시간 계속됐다.

주변을 두리번거려도 딱히 거대한 마물 같은 건 없었다.

쿠르르……!

[제니스 기사 생도들에게 알립니다. 현재 원인 불명의 지진이 관측되고 있습니다. 생도들은 신속히 운동장으로 대피해 주시기 바랍니다.]

“으아악!”

“빨리 비켜!”

계속된 지진에 교습소에 들어가 있던 기사 생도들이 파도처럼 빠져나왔다.

다행히 난 운동장에 있었던 터라 따로 대피할 필요는 없었다.

쿠르르…….

한참을 지속되던 지진은 다행히 별 사고 없이 끝났다.

운동장 밖으로 기어 나왔던 기사 생도들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여전히 불안에 떨고 있었다.

“뭐, 뭐였지?”

“그냥 지진 아니야? 괜한 호들갑은…….”

“네 다음 질질 짜면서 도망친 놈.”

“아, 아니거든!”

“아니긴 뭐가 아니야. 엄마! 하면서 바로 튀어 나간 놈이 무슨.”

“이익…….”

티격거리는 생도들은 다시금 교사들의 지도에 따라 다친 사람이 있는지 확인부터 했다.

여기까지 보면 그저 평범한 지진이었다.

하지만 쓸데없는 생각을 해서 그런가.

괜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설마…….”

쿠르르르…….

또다시 시작된 지진.

규모가 큰 건 아닌데도 이렇게 오래 지진이 지속된다는 건 이상했다.

“…젠장.”

괜한 생각을 한 건가.

대륙을 반으로 갈라 버린다는 생각에 호응하듯 그 이상으로 어마 무시한 뭔가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확인해 봐야지.”

부디 아니길 빌며.

품 안에 쟁여 둔 웨이 포인트 파편에 마나를 불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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